# 129
귀환 마교관
129화
사비강을 향해 쇄도하려던 다섯 명의 살수들이 멈칫하고는 거리를 조금 벌렸다.
사비강이 능소소에게 뜻을 전달하기 위해 손을 움직인 것인데, 그것을 무슨 사술이라도 쓰는 줄 착각한 것이다.
반면 능소소는 사비강이 자신에게 전하는 뜻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일전에 처음 정령과 계약하던 그 순간, 사비강은 자신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바람의 정령 말고도 수많은 정령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물의 정령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사비강이 자신에게 지금 느끼라고 한 것은 바로 물의 정령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능소소가 눈을 감고 모든 의식을 물의 흐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사비강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녀석, 눈치는 있구나.’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
자신이 키우기로 한 제자라면.
적어도 자신의 발목을 잡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매정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미래에 닥칠 재앙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작은 위기마다 누군가를 살뜰히 챙기고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어느 정도 자기 몫은 해주어야 한다.
이제 능소소는 믿고 맡겨 둔다.
그리고….
‘너희들은 표적을 잘못 노린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다음 순간, 사비강의 눈빛이 완전히 변했다.
그가 허리춤에서 베르타스를 스르릉 뽑아 들었다.
물속임에도 불구하고 칼날에서 뿜어지는 예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사비강을 향해 쇄도하던 다섯 명의 살수들 역시 사술 따위를 쓴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다시 접근해 왔다.
쉬이이잇!
가장 먼저 다가선 살수가 수중에서 암기를 뿌리는 것과 동시에 칼을 베어 들어왔다.
물속임에도 불구하고 살수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깔끔했다.
‘수중전에 특화된 자들이군.’
그 말은 처음부터 철저히 수중전만을 계획하고 접근했다는 뜻.
아마도 이는 서래향이 살막에 내준 정보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사비강의 의도가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간 것이다.
그동안 사비강은 일부러 서래향 앞에서 화염 속성 마법만을 주로 사용했다.
때문에 그녀는 사비강이 극양의 무공을 익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그대로 살막에 제공했을 것이고.
‘살막은 그 정보를 토대로 극음의 환경인 수중전을 선택했겠지.’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곧 알게 되리라.
순간 사비강이 손을 불쑥 내밀었다.
찰나.
쩌저저적!
카작!
매섭게 짓쳐들던 칼날이 반투명한 얼음벽에 부딪치면서 튕겨 나갔다.
느닷없이 나타난 얼음벽을 본 살수들이 당황한 기색으로 서로를 보았다.
그러는 사이.
쉬잇! 쉬이잇! 쉬이잇!
사비강의 주변으로 물보라가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얼음 화살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쯤 되자 살수들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사술?’
달리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물을 갑자기 얼려 버리다니?
북해빙궁에서나 사용할 법한 무공이 아닌가?
이건 분명 그들이 받아들인 정보와 달랐다.
상대는 극음의 환경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어 가야만 했다.
한데 오히려 태연하게 그 환경을 이용해서 무공을 사용하다니!
사비강의 입매가 사악하게 찢어졌다.
‘크크크. 실컷 당황하다가 죽어 가라.’
차가운 물속에 있으니 냉기 속성 마법을 사용하기가 무척 수월했다.
아이스 계열의 마법이 발동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대폭 단축됐다.
마침내.
슈슈슈슉!
날카롭게 다듬어진 얼음 화살이 일제히 살수들을 향해 쏘아지듯 나아갔다.
슈루루루루룻!
‘크웃!’
살수들이 얼른 칼을 막아 세우며 날아드는 얼음덩어리를 쳐냈다.
쿠작! 쿠자작!
하지만 사비강의 주변에서는 여전히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얼음 화살들이 생성되고 있었다.
결국 두 명의 살수가 얼음 화살에 맞아 어깨에서 피를 흘렸다.
상황이 뜻대로 흐르지 않자, 능소소를 인질로 잡았던 무인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쓸모없어진 인질을 베어 버릴 참이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깔끔하게 죽이는 게 낫다.
그런데.
슈리리리리릿!
‘헛!’
능소소의 목을 베려던 살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갑자기 자신의 주변으로 물보라가 세차게 일어나더니 물의 흐름이 요동치는 것이 아닌가?
마치 물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자신과 능소소를 동시에 흔들어대고 있었다.
‘이게 뭔…!’
이를 뿌득 간 살수가 어쩔 수 없이 능소소를 놓아 버리고는 중심을 잡기 위해 유영을 펼쳤다.
반면 살수로부터 떨어져 나온 능소소는 편안한 모습으로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치잇!’
살수가 품에서 비수 세 자루를 꺼내 곧장 능소소를 향해 던졌다.
그런데.
슈루루루루루!
능소소를 향해 날아가던 비수가 수중에서 갑자기 회오리치는 물살에 휩쓸리더니 도리어 이쪽으로 튕겨 나오는 것이 아닌가?
슈슈슉!
‘이게 뭔 개 같은…!’
살수가 눈을 부릅뜨고는 얼른 칼을 휘둘러 날아드는 비수를 쳐냈다.
하지만 마지막 한 자루의 비수가 순식간에 방향을 틀었다.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을 낚아챈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크익…!’
사실 이는 물의 하급 정령인 운디네가 한 짓이었지만, 살수가 그러한 사실을 알 방법이 없었다.
푹!
“크억!”
결국 마지막 비수가 살수의 목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살수의 입에서 거품이 뿜어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시뻘건 핏물이 퍼져나갔다.
몇 차례 몸을 꿈틀거리던 그는 결국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하고 말았다.
동료가 어이없게 죽음을 맞이하자 나머지 살수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게다가 인질마저 잃었으니 이제는 동귀어진을 감수하고서라도 목표물을 제거해야 했다.
다섯 명의 살수들이 눈짓을 빠르게 주고받았다.
잠시 후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손가락을 펼치며 수신호를 보냈다.
다른 살수들이 비장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수신호가 의미하는 바는 수중자폭.
마침내 다섯 명의 살수들이 오로지 사비강에게 접근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빠르게 나아갔다.
그들 모두 공력을 이용해 최대한의 속도로 전진했다.
그런데….
스스스스스슷!
사비강과 그들 사이에 다시금 두터운 얼음벽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쩌적!
아이스 월 마법이었다.
역시나 지상에서 펼칠 때보다 훨씬 빠르게 발동됐다.
퉁! 투웅! 퉁!
살수들이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들고 얼음벽을 두드렸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기 위해 몸을 상승시켰다.
하지만 그대로 놓아 줄 사비강이 아니었다.
‘어딜.’
순간 사비강이 위로 솟구쳐 오르면서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역시 아이스 월을 이용해서 수면을 아예 얼려 버렸다.
스스스슷. 쩌저저적! 쩌적!
투웅! 퉁!
살수들의 머리 위로 두터운 얼음장이 형성됐다.
졸지에 얼음 덩어리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만 것.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살수들은 주변의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유영하는 공간이 통째로 얼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점점 몸이 굳어 갔다.
마침내 그들의 표정에 공포가 떠올랐다.
사비강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한 차례 응시한 뒤 몸을 돌렸다.
저만치 물속에 떠 있는 능소소가 보였다.
기절한 모양이었다.
갑작스런 살해 위협과 급격한 마나 소모 때문에 기력이 다한 것이리라.
그래도 운디네까지 소환해냈으니 할 만큼 해주었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사비강이 재빨리 능소소를 향해 헤엄쳐 갔다.
**
쩌적. 쩌저적.
흐르던 강의 수면이 얼어 가고 있었다.
휘이이잉!
얼음장 위로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다.
강가에 선 생도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연신 끔뻑였다.
“저기… 지금 얼고 있는 것 맞지?”
조문탁이 저만치 얼어 가는 수면을 보며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염자량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은데. 보통 얼음이 저렇게 눈에 보이도록 얼 수도 있나?”
“나도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 걸.”
아까부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초겨울 날씨이긴 하지만, 분명 강물이 얼 정도는 아니었다.
한데 지금 수면이 꽁꽁 얼어붙고 있었다.
게다가 강 속에 뛰어든 사비강과 물에 빠진 능소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매설란이 손톱을 살짝 물었다.
오한이 스며들면서 잔뜩 젖은 몸이 바르르 떨렸다.
급하게 생도들을 구해내느라 모든 내공을 쏟아 부었다.
그 바람에 몸을 따뜻하게 할 만큼의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돌발 상황에 지나치게 흥분한 것도 영향이 컸다.
‘이래서야 생도들의 기량을 탓하기 전에 나부터 정진해야겠어.’
내심 자책하며 뭍으로 올라온 생도들을 훑어보았다.
다행히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는 듯했다.
문제는 능소소다.
물속에 가라앉은 지 너무 오래 지났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라면 벌써 익사하고도 남을 시간.
‘제발…!’
하필 자신이 타고 있던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자책감은 더욱 컸다.
당이협이 곁으로 다가와 장삼으로 어깨를 덮어 주었다.
내공을 주입해서 몸을 데워 줄 수도 있지만, 그건 매설란이 거절할 것 같아서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생도 한 명의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태연히 내공이나 주입 받고 있을 그녀가 아니었기에.
“좀 늦는군요.”
당이협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반드시 사비강이 돌아오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또깍.
매설란의 이에 물린 손톱이 마침내 부러지고 말았다.
그녀가 장삼을 벗어던지며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안 되겠어요. 들어가 봐야겠어요.”
“안 됩니다. 그 몸으로는 무립니다.”
당이협이 얼른 매설란을 제지했다.
매설란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럼, 저 대신 당 교관님이 들어가시면….”
당이협이 말을 자르듯 고개를 저었다.
“적이 누군지 모르지만 분명한 건 이쪽을 공격했다는 겁니다. 제가 들어가면 생도들의 안전이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주군을 믿고 기다려 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매설란이 어쩔 수 없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다시 강을 돌아보았다.
눈앞에 흐르는 강물은 요상한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만치 건너편까지는 얼음이 꽁꽁 얼어 있었고, 이쪽으로는 여느 때처럼 강물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혹시 북해빙궁에서 암습을 가한 걸까요?”
얼음을 보니 자연히 떠오른 의문이었다.
당이협이 고개를 저었다.
“북해빙궁이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어쩌면 혈사련과 손을 잡은 건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표적은 우리가 아니라 정도맹이 되어야겠지요.”
“그건 그렇지만….”
“저는 오히려 저 얼음 덩어리가 주군의 영향 때문일 것 같군요.”
“아…!”
매설란이 탄성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비강은 그만큼 독특한 무공을 사용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아직 낙담할 단계는 아니다.
그때였다.
츄아아아아아!
저만치 물보라가 솟구치더니 한 인영이 불쑥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강 쪽을 바라보던 생도들 모두가 고개를 꺾어 들고 솟아오른 사람을 쳐다보았다.
사비강이었다.
그의 품에는 능소소가 안겨 있었다.
탓!
길게 호선을 그리며 떨어진 사비강이 수상비를 펼치며 단숨에 뭍으로 달려왔다.
“우와! 교관님이시다!”
“소소도 같이 있어!”
강변에 다다른 사비강이 쓰러질 듯 능소소를 바닥에 눕혔다.
능소소의 안색이 죽은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