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귀환 마교관
127화
주하현의 호작곡은 독특한 지형이다.
넓게 펼쳐진 땅은 완만하게 솟은 언덕과 움푹 파인 분지로 가득하다.
하나의 언덕 위에 오르면 그 아래로 펼쳐진 분지가 보이지만, 그 다음의 언덕 너머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사막의 모래 언덕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모습과 어딘지 닮았다고나 할까.
단, 모래 대신 풀숲으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멀찍이 산맥이 보인다는 점이 달랐다.
주로 양떼를 방목하는 곳이지만, 오늘은 단 한 마리의 양도 찾아볼 수 없었다.
며칠 전부터 이곳은 정사대전의 격전지가 되고 있었기에.
그리고 호작곡의 수많은 언덕 중 한 곳.
언덕 위에 우뚝 선 자는 저만치 아래의 분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천안각주 이사흠이었다.
마침 그의 곁으로 한 인영이 내려섰다.
“보고 드립니다. 현재 모든 적들이 저곳 막사에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인원은 대략 오백여 명. 평소처럼 해시 초에 잠자리에 들 것 같습니다. 번을 서는 무인은 대략 오십여 명으로 파악됩니다.”
“수고했네.”
이사흠의 말에 인영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잠시 후, 그 자리에 다른 남자가 다가섰다.
천랑단주 석지평이었다.
“어떻습니까?”
“계획은 완벽하오. 실수 없이 진행해 주시기 바라오.”
“후후후. 걱정 마십시오.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호협당주(豪俠堂主)께서는?”
“수하들과 함께 동쪽 언덕 너머로 가셨습니다. 해시 초가 다가오고 있으니, 슬슬 준비해야지요.”
“정검단(正劍團)과 추의단(追義團)도 떠났겠지요?”
“예, 말씀하신대로 정검단은 북쪽으로, 추의단은 남쪽 언덕에 대기하기로 했습니다.”
이사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혹시 ‘사비강’이라는 자에 대해 알고 계시오?”
“사비강? 그자가 누구… 아, 혹시 용천관 교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그자를 갑자기 왜….”
이사흠이 대답 대신 가만히 석지평을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는 마치 ‘그런 것까지 내가 알려야 하겠느냐’는 은근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석지평이 실수를 깨닫고 얼른 말을 붙였다.
“제 기억에 아주 교만한 자입니다. 안하무인하며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성격이지요. 그런 자가 어찌 용천관 교관이 된 것인지….”
석지평은 혀를 끌끌 찼다.
지난 번 용천관에서 출정식을 가졌을 때가 떠올랐던 것이다.
위엄을 갖추고 품위 있게 출정식을 하던 그날, 느닷없이 사비강이 나타나 찬물을 끼얹지 않았던가?
그것도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뭐, 결국 용천관에 압박을 넣어 녀석을 징계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다.
이사흠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최근 총군사가 그자를 만나고 있다더군.”
“총군사가요? 왜 하필 그런 놈을… 무슨 꿍꿍이일까요?”
“글쎄, 알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이유가 뭐든 어차피 이번 작전만 성공하면 끝이다.
제아무리 구윤이라도 이후에는 뒤안길로 밀려날 터.
이사흠의 속 깊은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석지평이 여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쩌면 권력에서 점점 밀려나는 구 군사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발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각주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아닐 듯합니다.”
이사흠이 석지평을 돌아보았다.
‘마음에 드는 말을 퍽 잘하는군.’
그가 흡족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석지평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하! 단주의 안목도 가히 나쁘진 않소. 그럼, 슬슬 석 단주도 준비해 주시오. 이번 작전만 성공한다면 그대 역시 맹에서는 누구도 함부로 볼 수 없는 위치에 올라서게 될 거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석지평이 들뜬 표정으로 포권을 취했다.
이번에 큰 공을 세운다면, 한낱 교관에 불과한 사비강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못할 위치에 올라서리라.
석지평이 돌아가자 이사흠은 고개를 들고 별자리를 살폈다.
해시 초를 앞두고 있었다.
언덕 아래 분지에는 아직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현재 혈사련의 핵심 조직을 이끄는 자는 악천괴였다.
그는 이번 정사대전에서 요주의 인물로 단숨에 등극했다.
수많은 정도 문파가 그의 손에 궤멸 당했기에.
한데 그에게도 문제점은 있었다.
고강한 능력에 비해 성정이 거칠고 단순하며, 고집이 세다는 것.
물론, 초절정의 신공에 오른 고수인 만큼 그 정도의 오만함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자는 조직을 이끄는 수장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과연 악천괴는 그 소문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호작곡에서 전투가 벌어진지 닷새가 지났음에도 그는 항상 같은 방식으로 움직였다.
아마도 본인의 무공 실력을 지나치게 믿는 탓이리라.
그래도 혹시 몰라서 지금까지 지켜보았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악천괴는 자신을 지나치게 믿었다.
물론, 전투에서는 자신을 믿어야 한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수하들을 믿어야 한다.
‘이걸로 됐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전투에서 대승할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렸다.
총군사 구윤은 자신의 전략에 허점이 너무 많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신중한 게 문제다.
군사의 힘은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다.
행동하는 데서 나온다.
돌다리도 두드려라?
돌다리를 두드리는 건 멍청한 짓이다.
두드린다고 무너질 다리도 아니다.
돌다리라는 게 확실한 이상 건너고 봐야 한다.
‘그렇게 겁이 많으니… 여태껏 맹에서 허수아비 노릇이나 하는 것 아니겠소? 후후후.’
**
차앙! 까앙!
“크아악!”
“죽여랏!”
“아악!”
곳곳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기합성, 비명이 마구 울렸다.
분지에 진을 친 막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 악천괴가 미간을 팍 구겼다.
‘제기랄!’
마침 그의 뒤통수를 향해 누군가 검을 후려쳐 갔다.
쒸에에엑!
하지만 검신이 닿기도 전에 악천괴는 몸을 휘리릭 돌리더니 날아드는 검신을 손가락으로 튕겨 내는 것이 아닌가?
따앙!
“크웃!”
당황한 적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순간.
부웅!
악천괴가 단숨에 몸을 날려 그의 앞에 섰다.
콰팍!
다음 순간 악천괴의 손이 그대로 무인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크우웁!”
무인은 눈을 부릅뜬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악천괴를 보았다.
그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하필이면 적의 수장에게 검을 휘두른 것일 줄이야.
부아악!
“크아아악!”
무인은 심장이 뽑혀 나온 채 그대로 몸을 뒤틀며 절명하고 말았다.
“흥!”
악천괴는 뽑아낸 심장을 아무렇게나 부려버리고는 다시 바닥을 차고 날아갔다.
마침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또 다른 무인이 그의 손에 걸렸다.
퍽!
“크욱!”
튕겨 나가듯 날아간 무인은 그대로 핏덩이를 토한 채 고꾸라지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순식간에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간 악천괴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주눅 들지 말고 싸워라! 놈들은 겁쟁이다! 닥치는 대로 죽여라!”
하지만 상황이 녹록치만은 않았다.
정도맹이 막사로 쳐들어 온 것은 정확히 자시 초였다.
악천괴는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군사의 지시였기에.
해시 초가 되었을 때, 수하들에게 잠자리에 들 것을 지시했다.
예정대로 오십 명 정도만 번을 서게 했다.
수하들에게 어떠한 귀띔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군사인 류여중의 지시였다.
적을 속이기 이전에 아군을 먼저 속여야 하는 것.
그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 때문에 적하성을 함락시켰을 때도, 악천괴는 정말로 포로들을 놓친 줄만 알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완벽한 무방비 상태에서 정도맹은 기다렸다는 듯이 쳐들어왔다.
가장 깊이 잠에 빠져 있을 시각인 자시 초.
느닷없이 사방의 언덕에서 북소리가 울리더니 정도맹 무인들이 일시에 쳐들어왔다.
피해는 컸다.
진짜로 어떤 대비도 하지 않은 탓에 정도맹의 기습은 대성공이었다.
순식간에 오십여 명이 죽어 나갔고, 다시 한 식경이 흘렀을 때는 총 백여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반 시진이 흐른 지금.
“당주님! 피해가 큽니다! 사망자 백오십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수하 한 명이 악천괴에게 다가와 소리쳤다.
악천괴가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버텨라. 우리가 이긴다.”
“하지만…! 이대로는 정말 위험합니다. 당주님이라도 여기서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사방에서 적들이 밀려든 상황이라 수하들을 모두 살릴 수는 없었다.
악천괴가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벌써 적의 기습이 시작된 지 반 시진이 넘었다.
이대로 반 시진만 더 지나간다면 아군이 모두 궤멸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물론, 자신은 여기서 어떻게든 몸을 빼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싸움에서 패하고 수하들을 대거 잃은 채 본련으로 복귀한다고 한들 누가 반길 것인가?
‘군사…!’
당한 걸까?
정녕 류여중은 자신의 실패를 발판으로 삼아 권력의 핵심으로 올라서려던 것일까?
슬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불신이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둥! 둥! 둥! 둥…!
사방의 언덕 위에서 다시 북소리가 울리는 게 아닌가?
잠시 후, 언덕마다 환한 횃불이 밝혀졌다.
악천괴는 물론, 뒤엉켜 싸우던 혈사련과 정도맹 무인들이 멈칫거리고는 언덕을 올려다보았다.
“저건…!”
거리낄 것 없이 적을 쓸어 가던 천랑단주 석지평이 눈살을 팍 구겼다.
횃불 옆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
그것은 혈사련을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잠시 후.
“궁(弓)!”
천여 명의 무인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니 천지가 진동하듯 쩌렁쩌렁 울렸다.
곧이어 불화살이 이쪽을 겨누는 것이 아닌가?
“발사!”
이번에도 천둥 같은 목소리가 울리면서 수백 발의 불화살이 막사를 빙 두르며 쏟아져 내렸다.
쒜에에엑! 쒜엑! 쒜엑! 쒜에엑!
화르르르르륵!
막사 주변으로 불의 장막이 형성되면서 화염이 솟아올랐다.
“크아아아악!”
“우아아악!”
정도맹 무인들이 불붙은 몸을 허우적거리며 아무렇게나 달렸다.
곧이어 다시 언덕 위에서 우렁찬 사자후가 쏟아졌다.
“주하 분타의 혈무단(血武團)이 군사님의 명에 따라 증원 왔습니다!”
“예교(銳橋) 분타의 수라단(修羅團)이 군사님의 명에 따라 증원 왔습니다!”
“협지(峽地) 분타의 흑골단(黑骨團)이 군사님의 명에 따라 증원 왔습니다!”
“총타 현무당에서 지원 왔소!”
각 분타에서 차출된 단이 각각 삼백 명에 현무당에서 오백 명.
모두 천사백 명의 지원군이 생긴 셈.
이에 궤멸까지 각오했던 악천괴와 수하들은 단숨에 사기가 치솟았다.
반면 정도맹으로서는 사면초가에 빠진 상황.
모든 언덕에 적들이 포진해 있으니 탈출구조차 없다.
석지평이 얼른 이사흠에게 달려갔다.
“각주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적들이 어째서…!”
하지만 이사흠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당황하고 있었다.
‘이, 이럴 리가 없을 텐데! 완벽했던 내 계획이…! 어째서!’
석지평은 하얗게 질린 이사흠의 얼굴을 보고는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치익!”
그가 혀를 차고는 적들을 향해 몸을 던져 갔다.
**
어슴푸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막사 주변에 시체들이 즐비했다.
마침 공진철에 결박을 당한 몇몇 무인들이 거칠게 끌려와 막사 앞에 강제로 무릎 꿇려졌다.
마침 막사 안에서 악천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결박당한 자들을 훑어보았다.
그들 모두 정도맹의 요인들.
왼쪽부터 천안각주 이사흠, 호협당주 장초신(張焦信), 정검단주 엽무강(燁武姜), 추의단주 사자룡(沙紫龍), 천랑단주 석지평이었다.
특히 호협당주 장초신은 정도맹의 실권자인 등왕패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무공도 이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자였다.
악천괴가 비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꼴좋군. 대단하신 정도맹 나리들이 아닌가?”
“그 더러운 주둥이 닥쳐라!”
장초신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그로서는 한낱 사파 무인에게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치욕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악천괴의 눈길이 장초신에게 향했다.
“흐음. 아무래도 네놈은 지금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시끄럽다! 네놈의 공진철에 구속만 당하지 않았어도 너 같은 건 일장에 때려죽일 수 있다!”
“클클클. 호협당주의 장초신이라고 했던가?”
“그렇다!”
다음 순간,
슈우우욱!
“커헙!”
장초신의 신형이 허공에 붕 떠오르더니 악천괴의 손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당주님!”
“그분을 놓아 드려라!”
깜짝 놀란 엽무강과 석지평이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악천괴의 손은 이미 장초신의 머리를 콱 움켜쥐고 있었다.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아무래도 너희들은 내가 무척 관대하게 보이나보군. 나에 대해 알려 줄 필요가 있겠어.”
다음 순간.
“크우우웁!”
퍼억!
장초신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가고 말았다.
악천괴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손을 털어내고는 남은 무인들을 훑어보았다.
정도맹 무인들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설마하니 저렇게 단숨에 죽여 버릴 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오래 살고 싶으면 눈치가 빨라야 하는 법. 이만하면 나에 대해 좀 알겠지.”
말을 마친 악천괴가 손을 젓자 수하들이 정도맹 무인들을 거칠게 끌고 가 버렸다.
**
사비강 일행이 넓은 강가에 다다랐다.
“흐음. 우선 여기서 좀 쉬고, 오늘 저녁까지 배를 구한 다음 건너도록 하지.”
“강을 건너서 간다고요?”
염자량이 불쑥 질문했다.
“그래, 문제 있냐?”
“하지만 강남 쪽은 현재 정사대전이 한창일 텐데요.”
“그럼 덕분에 관전도 할 수 있으니 좋잖아? 한창 배워야 할 시기에 멀리서 구경이라도 할 수 있으면 땡 잡은 거지. 안 그래?”
“그게… 그렇게 되나요?”
염자량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입매를 치켜 올렸다.
생도들이 수군거리는 동안에도 사비강은 말없이 강 너머를 바라보기만 했다.
‘뭐, 늦지는 않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