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귀환 마교관
126화
살막(殺幕).
강호의 수많은 신비 조직 중 한 곳이다.
청부 살인만 도맡아 처리하는 살수집단.
강호에서는 살막의 표적이 되느니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게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살막의 살수들은 오로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어려서부터 단련된 자들이다.
그들은 매우 은밀한 방법으로 청부 의뢰를 받는다.
보통은 그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몰라서 청부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살막이 모든 청부를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아무리 돈을 많이 주더라도 살막에서 청부를 거절할 수도 있다.
그때는 방법이 없다.
강호에서 유일하게 청부 대상을 가려서 받는 살수 조직.
그들이 의뢰를 거절하는 이유는 주로 한 가지다.
너무 쉬운 상대이기 때문에.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하더라도 암살 대상의 난이도가 쉽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움직이지 않는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들의 자존심이다.
정말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살막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 죽이기 어렵다고 판단될 때.
그럴 경우에만 움직인다.
그들의 특징은 또 있다.
대게의 살수 조직은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신분을 숨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살막의 살수들은 암살 대상에게 신분을 고의적으로 노출한다.
그들이 착용하는 무복의 가슴과 등에는 검은색으로 ‘살(殺)’이라는 글씨가 수놓아져 있다.
표적이 된 자는 그 글귀를 본 순간 살막에서 노린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운이 좋아 암살 위기에서 살아남았더라도, 진정한 공포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살막이 노리는 자.
그것은 시한부를 선고 받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살막은 한 번 표적이 된 자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기에.
그러니 운 좋게 암살의 고비를 넘겼더라도, 그날 이후로 표적이 된 자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한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도 독은 없는지, 뒷간을 갈 때도 은신한 자가 없는지, 잠을 잘 때도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지….
오죽하면 살막의 표적이 된 것을 깨닫는 순간, 죽기 전에 미쳐 버린다는 말이 떠돌까?
또각.
서래향의 앞니에 살짝 물려 있던 엄지손톱이 부러져 나갔다.
‘사비강….’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창밖을 보았다.
그날 객잔에서 자신에게 치욕을 안겼던 사비강의 얼굴이 다시금 뇌리에 떠올랐다.
최근 혈사련은 이곳 적하성에 이어 정후문까지 궤멸시켰다.
무서운 속도로 성장 중이다.
거기에 정체되어 있는 건 자신 뿐.
이럴 때 사비강을 처리해야 한다.
‘살막이… 의뢰를 받아만 준다면…!’
서래향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부러진 손톱을 매만지는데.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곧 환살단주 요신이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섰다.
서래향이 눈을 빛내며 그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됐죠?”
“그들이 의뢰를 받아들였습니다.”
요신의 입매가 치켜 올라갔다.
“확실한가요?”
“예, 저자거리에 그 꼽추 노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됐구나!’
서래향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요신이 만난 꼽추 노인.
그는 바로 살막의 접선책이었다.
만약 의뢰를 거절했다면, 그 꼽추 노인은 여전히 저자거리에 나와서 잡동사니를 팔고 있었을 터다.
즉 좌판을 벌이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의뢰 승낙의 뜻.
서래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됐군요. 이제 그들은 사비강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요청해 올 거예요. 최대한 준비를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 기회에 그자를 확실히 없애 버려야 합니다.”
서래향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기다려, 사비강. 네놈의 잘난 콧대를 꺾어 줄 테니까.’
**
“흐아아암!”
사비강이 특목각을 향해 걷다 말고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가 귀를 파며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내 욕을 하나? 귀가 간지럽네.”
마침 뒤를 따라오던 매설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일로 귀가 간지러울 정도면 지금쯤 귓병이 났어야 할 것 같은데요?”
“뭐? 이렇게 고귀한 성품을 가진 몸에게 누가 감히 욕을 한다는 거야? 감사만 해도 모자랄 판에.”
“물론,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원한을 가지고 욕할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네요.”
“무슨 소리야? 이 세상에 나처럼 착하고 순수하고 인자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다고? 이래봬도 난 어엿한 교관이란 말이지. 크크크.”
“그 음산한 웃음부터 글러먹었어요.”
“흐음, 잠깐. 혹시 나 몰래 내 욕을 하고 다니는 거야?”
사비강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매설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매설란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특목각 벽에 등이 닿아 멈췄다.
턱!
사비강이 벽을 한손으로 짚고 밀어붙이듯 따졌다.
“수상한데. 정말 내 욕을 하고 다녔나?”
“갑, 갑자기 왜 화살이 나한테 날아와요?”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일까?
매설란의 뺨이 저도 모르게 화끈 달아올랐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럴 때, 사비강이 사람들 앞에서 동침 고백을 한 일이 떠올랐다.
사비강이 더욱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이젠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진 두 사람.
‘이 남자 뭐, 뭐야? 갑자기!’
사비강이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수상한데.”
“뭐가요?”
“왜 내 눈을 똑바로 못 보지? 얼굴도 빨개졌어. 역시 평소에 내 욕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설란인 거야?”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그런 일 없다고요! 비켜요.”
“하긴, 당신이 그럴 리가 없지.”
사비강이 순순히 수긍하자, 오히려 매설란이 발끈해서 물었다.
“왜 그렇게 확신하죠?”
사비강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뭘 그렇게 빤히 보는 거야?’
단지 눈을 마주친 것뿐인데 심장은 왜 이렇게 주책없이 뛰는 건지.
매설란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데, 사비강이 그녀의 턱을 손끝으로 쓸었다.
“그야 나는 당신과 많은 것을 나눴잖아? 이 옷 안에….”
“무, 무슨 또 변태 같은 소리를!”
매설란이 저도 모르게 일장을 뻗었다.
퍼억!
가슴을 얻어맞은 사비강이 한 걸음 물러나더니 소리를 질렀다.
“아윽! 갑자기 뭔 짓이야? 나나 되니까 끄떡도 없지!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이거 살인미수라고!”
“닥쳐요! 변태 같은 소릴 한 게 누군데!”
“변태 같다니? 내가 나눠 준 게 사실이잖아! 그 옷 안에 입은 용린갑도 내가 준 거 아냐?”
“이 옷 안에…! 응? 그런 뜻…?”
“그럼, 무슨 뜻?”
“그러니까… 그게….”
이제 매설란의 뺨은 터져 나간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쯤 되니 정말로 상대의 순수함을 오해한 건지, 노련한 엉큼함에 당하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
사비강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매설란을 보고 있었다.
‘저 능청스런 얼굴이 더 화나!’
그때였다.
사비강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을 휙 돌리며 손을 내젓는 것이 아닌가?
휘리릭!
사비강의 손에는 어디서 날아든 것인지 비수처럼 뾰족하게 말린 종이가 들려 있었다.
매설란의 미간이 팍 좁혀졌다.
“누가!”
그녀가 바닥을 차고 날아가려는데, 사비강이 제지했다.
“그럴 필요 없어.”
“네?”
“우리 편이야.”
“우리 편… 이라니? 그건 뭐예요?”
사비강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려 있는 종이를 펼쳐보았다.
짤막한 글귀가 나타났다.
나흘 후. 주하(柱下) 호작곡(浩昨谷), 자시초(子時初)
시간과 장소였다.
다음 순간.
팟!
화르륵!
사비강의 손바닥에서 불꽃이 일어나더니 종이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가 매설란을 돌아보더니 씨익 웃었다.
“평온하던 일상이 이렇게 또 끝나는군.”
“이번엔 또 무슨 일을….”
하지만 사비강은 대답하는 대신 특목각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마침 연무실에 모여 있던 생도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사비강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짝 마주쳤다.
“자! 다들 떠날 준비해라!”
“예?”
“오늘부터 관외 수업이다. 앞으로 보름 동안 진행될 거다.”
“예에? 또요?”
느닷없는 발언에 생도들이 술렁거리며 서로를 보았다.
생도 하나가 불쑥 소리쳤다.
“갑자기 왜요?”
“인생은 원래 갑자기라 즐거운 법이야. 잔말 말고 준비나 하도록.”
사비강은 히죽 웃기만 했다.
**
쾅!
“잔말 말고 준비나 하라니!”
악천괴가 탁자를 거칠게 내려치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가 당장이라도 씹어 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마주 앉은 류여중을 노려보았다.
류여중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온화한 표정이었다.
“왜 그리 화를 내십니까?”
“왜냐고? 몰라서 묻소? 각주께서 주하 분타까지 친히 왔다기에 나 역시 일부러 호작곡에서 예까지 왔소. 한데 기껏 한다는 소리가 나더러 위험을 자초하라는 거 아니오?”
“잘 알아들으시는군요.”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요?”
“지금 정도맹에 주작당주에 대한 소문이 어찌 나 있는지 아십니까?”
“나도 귀가 있소!”
악천괴가 더욱 분해서 소리쳤다.
류여중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시겠군요. 정도맹이 당주님에 대해 알기를, 무예는 뛰어나나 성정이 잔인하고 급하며 생각이 단순하다. 전략보다는 전력을 믿는 편이고, 자존심이 강해 고집이 세다.”
“이제 보니 군사는 나와 장난을 하자는 게 아니라, 싸움을 하자는 거군.”
“하하하. 그럴 리가요. 이 소문… 사실입니까?”
“…….”
“아니잖아요? 제가 누구보다 주작당주님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악 당주님은 결코 그렇게 단순한 분이 아닙니다.”
“하려는 말이 뭐요?”
“한데 왜 이런 소문이 났을까요? 누가 이런 소문을 퍼트렸을까요?”
“……!”
“예, 그렇습니다. 바로 접니다. 만통각에서 이 소문을 만들어 흘렸지요.”
“왜 그런?”
“이번 작전을 위해섭니다. 지금 정도맹은 군사가 없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천안각주가 제멋대로 군사 행세를 하며 설치고 있지요. 제가 말한 대로만 해주십시오. 그럼, 사흘 안에 반드시 놈들이 움직일 겁니다. 물론, 당주님이 이끄는 조직은 위험에 빠질 겁니다. 하지만 조금만 버텨 주신다면….”
“군사께서 지원하시겠다?”
“저는 할 일이 많아 오늘 바로 본련으로 복귀합니다만, 반드시 지원 인력을 보내 드릴 겁니다.”
잠시 생각하던 악천괴의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졌다.
“군사가 이곳에 온 건 본련에서도 아는 자가 극히 드물지. 한데 내가 어떻게 군사를 믿고?”
사실 이대로 악천괴가 패하게 된다면, 지금까지 혈사련을 키우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류여중이 단숨에 이인자로 올라설 것이다.
즉 류여중으로서는 악천괴를 누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류여중이 희미하게 웃었다.
“제가 왜 소탐대실하겠습니까? 언짢으실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혈사련에는 총군사가 필요합니다. 만약 제가 당주님이라면, 눈앞의 줄을 잡을 겁니다.”
협박까지는 아니지만 압력이었다.
결국 내가 더 우위에 설 테니, 지금부터라도 줄을 잘 서라는.
오히려 이렇게 나오니 류여중의 의중이 더 분명하게 파악되는 것 같았다.
악천괴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그 웃음의 의미를 아는 것인지 류여중은 그저 희미한 미소만 머금은 채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웃음을 그친 악천괴가 달라진 눈빛으로 대꾸했다.
“좋소. 군사의 뜻에 따르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