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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마교관-125화 (125/670)

# 125

귀환 마교관

125화

서래향이 미간을 구겼다.

일단 사비강이 중독당한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태연하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사비강이 씨익 웃으며 품에서 단환을 꺼내고는 흔들어 보였다.

서래향이 움찔 떨었다.

“피독주(避毒珠)!”

“역시 독공이 특기여서 그런지 바로 알아보는군.”

피독주는 말 그대로 독에 당하지 않도록 일시적인 면역성을 갖추게 하는 단약이다.

“하지만 웬만한 피독주로는….”

“웬만한 피독주가 아니지. 당이협이 만든 거니까.”

‘당이협…!’

그제야 서래향은 전후 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독공에 관해서만큼은 사천당문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그런 그들이 만든 피독주라면 과장 좀 보태서 ‘만독불침’이라 봐도 될 터.

사비강이 저 피독주를 이미 복용한 상태라면 자신의 독이 아무런 소용도 없으리라.

‘그렇다면…!’

타앗!

찰나, 서래향의 신형이 번쩍이면서 사비강을 향해 쇄도해 갔다.

순식간에 사비강 앞에 나타난 그녀가 곧바로 비수를 내찔렀다.

쉬이이이잇!

그런데.

콰직!

“커윽!”

어느새 불쑥 튀어나온 사비강의 손이 그녀의 턱을 강하게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어딜 어떻게 한 것인지 그녀는 곧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말았다.

그저 사비강의 손에 턱이 붙잡힌 채 축 늘어져서 들어 올려졌다.

사비강의 손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으윽…!’

그렇게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헉!’

마치 귀신의 눈을 마주한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심연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눈동자.

사실 사비강은 당이협을 만난 이후 늘 피독주를 입안에 넣고 있었다.

여차하면 독공을 막아내기 위함이었다.

이곳에 들어선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사비강은 정신이 혼곤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곧바로 경각심을 가졌다.

그리고 당이협으로부터 받아 두었던 피독주를 깨물어 삼킨 것이다.

사비강이 싸늘하게 읊조렸다.

“오늘은 죽이지 않겠다. 조용히 돌아가라.”

휘익!

쿠당탕탕!

실내 한쪽으로 날아간 서래향이 아무렇게나 처박히며 구겨졌다.

서래향은 향후 마계의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의외로 중원인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던 존재다.

지금은 비록 적으로 조우했지만, 훗날에는 유용한 인재가 될 수 있을 터.

‘죽여 버리기엔 아깝지. 그리고 또 어쩌면 내가 원하는 걸 갖다 줄 지도 모르고.’

그가 실내를 나가고 나서도 서래향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

“왜 이렇게 늦은 거예요?”

매설란이 눈을 곱게 흘기며 따졌다.

사비강이 싱글싱글 웃으며 대꾸했다.

“미안, 미안. 생각보다 이야기가 좀 길어져서.”

“얘기는 잘 끝났나요?”

“뭐, 그럭저럭. 앞으로 내게도 도움이 될 사람이니까 잘 구슬렸지.”

“구슬려요?”

“뭐, 그런 일이 있어. 아무튼 술이나 하지?”

사비강의 말에 매설란이 술잔을 불쑥 내밀었다.

“우선 나부터 한 잔 주세요. 오늘 따질 일이 많으니까.”

“그러지.”

사비강이 술병을 들었다.

두 사람은 모처럼 이 층 창가에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이어 갔다.

마침 계단 위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서래향이었다.

그녀는 사비강이 있는 쪽을 흘낏 보고는 입술을 꾹 씹었다.

‘저 여자는…!’

같은 여인이 봐도 반할 만큼 아름다웠다.

‘쳇, 미인계가 통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어.’

괜히 더 분한 생각이 들었다.

‘사비강… 오늘 날 이렇게 보낸 걸 후회할 것이다!’

서래향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한편, 매설란과 술잔을 기울이던 사비강은 마침 객잔을 나서는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날 위해서 좀 더 분발해 보라고.’

그때 매설란이 불쑥 끼어들었다.

“뭘 그렇게 빤히 보세요? 네에?”

그녀는 이미 술이 꽤 얼큰하게 오른 탓인지 혀가 살짝 꼬이고 있었다.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내게 신비 조직 하나를 바칠 사람.”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있어. 그런 게.”

사비강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다시 술잔을 채웠다.

**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천고마비의 계절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며칠만 더 지나면 거짓말처럼 혹독한 겨울이 찾아들 터였다.

용천관에서 머지않은 도시인 상천(上川)에는 제법 너른 호수가 있었다.

호숫가로는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고, 곳곳에 앉아 쉴 수 있는 바위와 나무 의자도 많았다.

상천 현령이 직접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하느라 공을 많이 들인 탓이다.

하지만 쌀쌀한 날씨 탓에 단풍은 모두 지고 낙엽만 굴러다녔다.

그럼에도 풍광이 좋아서인지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호수의 수면을 고요히 미끄러지는 나룻배들.

그 중, 한 배에 사비강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죽립을 깊이 눌러 쓴 남자가 앉아 있었다.

피부가 무척 고와 얼핏 보면 여성으로 착각할 만큼 호리호리한 체구의 사내.

그는 바로 정도맹의 총군사 구윤이었다.

사비강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호숫가에 뒹구는 낙엽을 보았다.

“남자하고 이런 뱃놀이는 내 취향이 아닌데….”

“나도 마찬가집니다.”

구윤이 살짝 눈살을 구기고는 대꾸했다.

그러더니 곧바로 말을 붙였다.

“사 교관께서 확신을 주었다면 내가 왜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만난 지 벌써 팔 개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사 교관께서 말한 일 년의 시간이 이젠 삼사 개월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군. 세월 참 빠르군.”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하자, 구윤이 미간을 더욱 좁혔다.

“잊은 건 아니겠지요? 일 년 안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

“물론이오.”

“정녕 이대로 괜찮은 겁니까? 강호에서 혈사련이 차지한 비중이 이제 너무 많습니다. 자칫 오 할에 달할 지경입니다. 그럼, 장기전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구윤의 말대로 혈사련은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정도맹은 실세인 등왕패를 중심으로 분투하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작은 전쟁에서는 여러 번 승전보를 울렸지만, 큰 틀에서 보면 분명히 정도맹이 밀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잖아도 슬슬 때가 됐다고 생각했소.”

“무슨 말입니까?”

“적하성에 이어 최근 정후문(正厚門)이 궤멸당하지 않았소?”

“그건 어떻게…?”

“지금쯤 천안각에서는 새로운 작전을 계획하고 있을 거요.”

사비강의 말에 구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단 말인가?

물론, 사비강은 이 모든 사실을 겪어서 알고 있는 것이었다.

지난 생에도 그랬다.

적하성에 이어 정후문이 당했고, 그 이후 위기감을 느낀 정도맹은 제법 규모가 큰 작전을 세운다.

‘물론, 그 작전은 실패하고 말지만….’

미래가 다소 바뀌긴 했지만, 굵직한 사건의 진행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귀영단을 통해서 알아보기도 했지만.’

사비강이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천안각에서 아마 야심차게 세운 계획일 거요. 하지만 보나마나 대패하겠지.”

“뭐요? 사 교관께서는 본맹이 혈사련에게 대패하길 바라는 겁니까?”

구윤이 이맛살을 팍 구기며 모처럼 날 선 목소리를 뱉어냈다.

그러자 사비강이 구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럼, 반대로 물어봅시다.”

“뭐, 뭘 말이오?”

“군사께서는 그딴 형편없는 작전이 통할 거라고 보시오? 그 작전으로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오?”

“그건…!”

구윤이 발끈하면서도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그 역시 사비강과 같은 생각이었기에.

그는 이미 천안각에서 세운 작전을 면밀히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커다란 흠이 있음을 발견했고, 이를 분명히 알렸다.

하지만 그 작전을 지지하는 등왕패는 구윤의 의견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종의 기 싸움이었다.

사실, 구윤이 이즈음 사비강을 찾아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대로라면 혈사련이 너무 비대해질 것 같기에.

구윤이 침울한 음성을 흘렸다.

“이번 작전을 패하게 되면 정도맹은 정말로 위기에 처할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아니. 그 작전은 그대로 두시오.”

“뭐라고요? 그 작전에 구멍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게 다 생각이 있소.”

사비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노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대신 그 작전이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실행되는지만 내게 알려 주시면 고맙겠소.”

**

마차 창밖으로 풍광이 스쳐 지나갔다.

낙엽을 떨어뜨리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보고 있자니, 마차를 타고 가는 구윤의 마음도 더욱 시린 듯했다.

“내가 헛된 꿈을 꾸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문득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자신이 사비강을 믿은 게 무엇 때문인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비강은 그저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고 했다.

도박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애초에 자신을 찾아와 도박을 걸기로 했다면, 이제부터는 아무 생각 말고 믿기만 하란다.

그게 어디 쉬운가?

군사란 끊임없이 생각을 거듭해야 하는 위치이거늘.

‘하긴, 내가 군사로서 일을 한 적이 언제 적이던가?’

썩어 가는 정도맹에서 자신의 생각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과 같을 뿐이었다.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자 허공에서 비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난해 보이십니다.”

“그를 정말로 믿어도 될지 모르겠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내가 뭔가에 홀렸던 것 같다.”

도대체 뭘 보고 그를 믿기로 한 걸까?

돌아온 비령의 대답은 더욱 현실적이었다.

“이미 주사위를 던지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요. 생각을 깊이 한다고 주사위의 눈이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요.”

“그래. 그렇구나. 네 말이 정답이다.”

구윤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강이 한 말이 바로 그런 뜻이리라.

이미 주사위를 던졌다면, 그저 믿고 기다리는 것.

그게 도박이라는 것.

나머지는 속임수를 쓰든, 무슨 짓을 하든 사비강에 달려 있으리라.

구윤이 피식 웃었다.

“그래. 팔 개월 전에 던진 주사위는 아직 구르는 중이지. 주사위의 눈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직 끝난 게 아니겠지.”

구윤의 눈동자가 다시금 깊어졌다.

**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저자거리.

큰 소리로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과 물건 값을 두고 흥정하며 실랑이하는 손객들.

해가 질 녘이지만 저자거리는 낮보다 더욱 분주한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저자거리 한쪽 골목 귀퉁이.

등이 구부정한 늙은이가 좌판을 벌여 놓고 각종 잡동사니를 팔고 있었다.

마침 석양을 등지고 죽립을 깊이 눌러 쓴 사내가 그 앞에 멈춰 섰다.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그는 좌판의 물건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는 동안에도 꼽추 노인은 사내에게 눈길 한 번 던지지 않았다.

마치 상대가 무엇을 사든 말든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이윽고 사내가 물건을 하나씩 가리켰다.

“저기 저 금붕어 모양의 귀고리, 여기 묵주 하나, 그리고 저쪽의 비단향낭, 마지막으로 여기 비수 하나 주시오.”

그야말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

노인이 무심히 물건을 챙기다가 멈칫거리고는 죽립의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처음으로 보인 이색적인 반응.

죽립인은 여전히 담담하게 서 있었다.

꼽추 노인이 어울리지 않는 네 개의 물건을 담으며 물었다.

“누구에게 선물하시는 겁니까?”

“용천관 일년생 교관 사비강.”

“누가 선물하시는 겁니까?”

“혈사련 홍묘, 서래향.”

“선불입니다.”

사내가 천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꼽추 노인이 주머니 안에 든 돈을 확인했다.

십만 냥짜리 전표가 다섯 장.

분명 노리개 몇 가지와 비수를 구입한 돈 치고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액수.

하지만 꼽추 노인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돈주머니를 품에 갈무리했다.

죽립인이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선물이 잘 전달되면 같은 액수를 더 드릴 것이오.”

꼽추 노인이 꾸벅 머리를 숙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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