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귀환 마교관
124화
뜻밖의 상황에 사비강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어… 누구세요?”
서래향이 풋, 웃음을 흘렸다.
그 미소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사비강은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려도 좋을 지경이었다.
“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오셨나요?”
“하하… 하… 소저에 대해서는 금시초문….”
“설마요. 만나서 반가워요. 청옥파의 진소미예요.”
살가운 미소에 사비강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 버렸다.
한참이나 멍하니 있던 사비강이 그제야 대략의 상황을 눈치 채고는 물었다.
“하면… 그쪽이 오늘 면담을 신청한 진 장로…?”
“네, 저랍니다.”
순간 사비강이 서래향의 곱디고운 손을 콱 움켜잡았다.
“진 소저, 아니, 진 장로. 그대의 면담을 격하게 환영하오! 무엇이든 내게 말씀해 보시오. 힘닿는 대로 돕겠소!”
“호호호. 우선 앉으시지요. 많이 부족하지만 교관님을 위해 제가 준비해 두었답니다.”
서래향이 만찬이 차려진 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사비강의 눈은 여전히 서래향의 굴곡진 몸매에 꽂혀 떠날 줄을 몰랐다.
그가 눈 뜬 봉사마냥 더듬더듬 자리를 찾아 앉자, 서래향이 다시 입을 가리고 살며시 웃었다.
“거기에 앉으시려고요?”
“그, 그럼?”
“마주보는 것도 좋지만… 저는 좀 더 가까이 앉는 걸 좋아해서요. 제 옆자리는 어떠세요?”
“옆자리를!”
“사람 사이는 가까울수록 좋다고 하지 않나요?”
“물론이오. 격하게 동감하오.”
“그럼, 여기에 앉으세요.”
“좋소!”
사비강이 호탕하게 웃으며 서래향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한편, 서래향은 내심 조소를 지으면서도 거침없는 사비강의 행동에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좀 웃긴 남자군.’
이렇게 야한 차림을 하고 있을 때, 보통 남자들의 반응은 대부분 똑같다.
속으로는 좋으면서도 겉으로는 체통을 지키는 척하며 먼 산을 응시한다.
그러면서 힐끔힐끔 훔쳐본다.
정도를 지향하는 무인들일수록 더 그렇다.
한데 사비강은 좀 다르다.
우선,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 자체에 놀란 듯하다.
청옥파의 진소미가 여자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확실히 의외다.
‘생각보다 엄청 허술한 인간이군.’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남자는 체통을 지키면서 힐끔거리지 않는다.
그냥….
‘대놓고 보는군.’
아주 뚫어지듯이.
지그시. 그윽하면서도 빤히.
오히려 이쪽에서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먼저 말을 꺼낼 정도다.
“교관님도 참. 그렇게 빤히 보시면 제가 부끄럽답니다.”
“아, 그렇소?”
사비강이 뻔뻔하게도 되물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거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뭐야? 이 남자. ‘그렇소?’라니.’
도대체 어떻게 대화를 이끌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허술해서 쉬워 보이는데, 또 전형적이지 않으니까 어디로 튈지 모를 사람이다.
“물, 물론이죠. 저 역시 여자인지라… 남자의 그런 노골적인 시선은 왠지 부끄러워져서….”
서래향이 얼굴까지 발그레 붉히며 대답했다.
사비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렇게 속이 비치는 옷을 입고 날 기다렸다는 것은 내가 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소?”
의외로 정곡을 찌르는 말에 서래향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아, 그건… 아, 우선 술부터 한 잔 드시지요.”
“아, 그래야지. 고맙소.”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나 역시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기쁘기 그지없소.”
사비강이 헤벌쭉 웃으며 잔을 받았다.
두 사람이 잔을 부딪치고는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쉽잖아?’
서래향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가득삼’이라는 가명의 청년을 잡지 못해 허송세월을 보낸 시간들이 억울할 정도였다.
이런 모지리 때문에 그동안 혈사련이 얼마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단 말인가?
사비강은 연신 따라주는 술을 넙죽넙죽 잘도 받아 마셨다.
게다가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서래향은 거기에 맞춰 이런저런 이야기로 화제를 이어 갔다.
대부분 사비강에 대한 칭찬 일색이었다.
정도의 무인들이 칭찬에 약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게다가 사비강은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유정향(誘精香)에 취한 상태였다.
유정향은 서래향이 개발한 독의 일종이었다.
중독성이 강한 유정향은 특유의 달콤한 향이 나는데, 처음에는 심신이 편안해지면서 방심을 유도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경계심을 풀게 되고, 혈맥이 서서히 굳어지면서 운기조차도 할 수 없게 된다.
이 과정이 무척 편안하면서도 더디게 다가오기 때문에, 중독자는 본인이 중독된 사실을 자각하기가 매우 어렵다.
게다가 사비강이 마신 술.
거기에는 망혼독(亡魂毒)이 들어 있었다.
무색무취의 망혼독은 한 번 음복하게 되면, 한 식경 안에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워진다.
심할 경우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한다.
그리고 대화를 하는 동안, 서래향이 지속적으로 뿜어낸 독기(毒氣).
그것은 쇄혼독(碎魂毒)이었다.
쇄혼독은 살짝 단내가 나는 것이 특징인데, 상대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홀리게 만들기에 적격이었다.
물론, 이 쇄혼독 역시 반 시진 가까이 흡입하게 되면 온전한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어지고 미쳐 버리게 된다.
이렇게 세 가지 독을 한꺼번에 덮어 쓴 몸이니, 서래향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희희낙락 웃어대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이미 사비강은 그녀에 대한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훗, 멍청한 녀석. 그래도 행복한 줄 알아라. 죽기 직전까지 너는 웃을 수 있을 테니까.’
서래향이 그러한 내심을 숨기며 사비강의 술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그런데 조절을 잘못한 것인지 술잔이 넘쳐 버렸다.
“어머나. 제가 실수를. 죄송해요.”
“하하! 괜찮소.”
서래향이 얼른 사비강의 젖은 손을 두 손으로 받쳐 들더니 입술로 가져갔다.
“아까운 술을 버리면 안 되니까요.”
“아… 진 장로….”
“네, 사비강 교관님.”
서래향이 그윽한 눈으로 사비강을 올려다보았다.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에서 달콤한 향이 올라왔다.
사비강의 뺨이 붉어졌다.
꿀꺽.
마른 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서래향은 가만히 가녀린 손을 뻗어 사비강의 탄탄한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사비강 교관님은 정말 몸이 탄탄하시네요.”
“진 장로…!”
사비강이 서래향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앗, 이러시면…!”
서래향이 차마 사비강을 보기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사비강이 그녀의 손을 잡아들어 올리고는 망사 안에 비친 백옥 같은 나신을 들여다보았다.
“그대의 몸은 아주 멋지구려.”
“부, 부끄러워요.”
“이 탐스러운 가슴과 개미처럼 가는 허리, 봉숭아를 연상시키듯 풍만한 둔부와 미끈하게 뻗은 다리.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소.”
노골적인 칭찬에 서래향의 뺨이 정말로 발갛게 물들었다.
‘이 남자 도대체 뭐야?’
하지만 내심 이제 끝이 다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남자가 입술을 덮치면 중독될 것이다.
아니, 이미 남자는 상당히 중독됐다.
자신의 손을 잡은 그 순간, 그녀는 이미 사비강에게 독기를 한껏 불어넣고 있었다.
흑혈마독(黑血魔毒).
일전에 갈천성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댔다가 중독되었던 그 독이다.
유정향과 망혼독, 거기에 쇄혼독까지 흡수한 상태이기에 사비강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리라.
아니, 눈치를 챘다고 하더라도 이젠 어쩔 수 없다.
이미 그는 중독됐다.
곧 그 증상이 나타날 것이다.
사비강이 불쑥 손을 뻗더니 서래향의 가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하윽.”
서래향이 자극적인 신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사비강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동시에 그의 이마에 핏대가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의 손등에도 툭툭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핏줄은 시커멓게 물들어 가고 있었지만, 사비강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서래향이 내심 비소를 지었다.
‘후후후. 이제 끝이구나. 욕정에 미쳐서 허덕이다가 가거라.’
그녀는 더욱 흑혈마독을 끌어올려 독기를 발산했다.
그녀의 독공이 사비강의 피부를 타고 점점 스며들어 갔다.
이미 세 가지 독에 중복으로 취해 버린 사비강은 그러한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는 듯 정신없이 서래향의 신체를 더듬어 갔다.
“아음. 아아아.”
서래향이 간드러진 신음을 연신 흘리며 몸을 꿈틀거렸다.
그런데….
‘아아, 이러다가 자칫하면 내가 흥분을…! 이쯤이면 쓰러질 때가 됐는데….’
이상하게 사비강의 손놀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사비강의 손이 잘록한 허리를 미끄러지며 둔부를 콱 움켜쥐었다.
“아흑!”
서래향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사비강이 정복자가 된 듯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 서래향은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흑혈마독에 중독된 자가 저런 웃음을 흘려서는 안 된다.
지금쯤이면 고통에 겨워 바닥을 기어 다녀야 할 터!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분명 사비강의 손과 팔은 거무죽죽하게 물들어 있어야 했다.
눈은 붉게 충혈 되고, 이마의 핏대는 터질 듯 불거져 나와야만 했다.
지금쯤이면 색욕에 미쳐 반쯤 광인이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멀쩡하다!
도대체 어떻게?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왜 그러시오?”
사비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씨익 웃었다.
“당신 어떻게…?”
“뭐가 말이오?”
이상하다!
서래향은 이해할 수 없는 위화감에 얼른 몸을 추스르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사비강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내 기술이 영 별론가 보군. 하긴… 이런 식으로 놀아 본 것도 워낙 오래 됐으니. 크크.”
서래향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전혀 중독되지 않았어!’
뿐만 아니라 상대는 별로 흥분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놀림에 신음을 흘리며 허덕거린 것은 자신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참을 수 없는 치욕이 치밀어 올랐다.
그때.
“아, 생각보다 시간이 좀 지났군. 이거 미안하게 됐소. 내가 약속이 있어서.”
사비강이 주섬주섬 먹을 것을 몇 가지 챙기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가 자리를 떠나기 직전.
“어딜!”
서래향이 재빨리 붉은 침 두 자루를 날렸다.
쉭쉭!
푹푹!
두 자루의 침이 사비강의 어깨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마침내 사비강이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집착하는 성격인가?”
“뭐?”
“미안하지만 그쪽은… 썩 내 취향이 아냐.”
사비강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순간 서래향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태어나서 이런 대우는 처음 받아 봤다.
자신을 보고 침을 흘리지 않는 사내가 없었다.
한데, 뭐? 취향이 아니라고?
서래향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소리쳤다.
“내 정체를 알고 있나?”
“글쎄, 혈사련의 홍묘… 이려나?”
사비강의 무심한 듯 대답한 목소리에 서래향이 흠칫거렸다.
‘날 알고 있어!’
서래향이 차갑게 웃었다.
“흥, 그걸 안다면 넌 더 조심했어야 했다. 너는 이제 적살 독침에 당했으니….”
“이거?”
사비강이 어깨에 박힌 침 두 자루를 뽑아냈다.
“그래. 그거다. 앞으로 네놈이 반 시진 내로 해독제를….”
“어디 그뿐이겠어? 유정향과 망혼독, 그리고 쇄혼독. 거기에 흑혈마독까지 당했겠지.”
“그걸 어떻게…!”
서래향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