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귀환 마교관
120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서래향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멸살단이 전멸했다.
적하성을 함락시켰던 그들이다.
지나치게 잔악무도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활용도가 뛰어나고 타격대로서의 임무도 제법 수준 높게 이행하고 있던 조직이 바로 멸살단이다.
한데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전멸 당할 줄이야!
게다가 자신들이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이들의 전멸 소식은 일절 듣지도 못했다.
한데 도착해서 보니 다수 시신의 상태로 보아서는 죽은 지가 꽤나 지난 듯했다.
그렇다면, 정도맹 쪽에서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들이 적하성 같은 요새를 가만히 비워 두지 않을 테니.
하면 도대체 멸살단은 누구에게 당했단 말인가?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혹시 적하성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양패구상을 한 것일까?’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혈사련에 적하성을 궤멸시켰다는 보고 따위는 애초에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서래향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성주전으로 들어갔다.
그는 빈 방 탁자에 걸터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멸살단의 전멸은 류여중에게 치명적인 실수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마냥 기뻐할 입장이 아니다.
만통각주 류여중은 이미 혈사련의 중요한 인재다.
그가 무너지면 혈사련이 무너질 수 있다.
상대의 실수로 올라서는 것은 위태로운 탑이다.
상대도 건재하면서 스스로도 업적을 이루어야 한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환살단주 요신이 찾아왔다.
“여기 계셨군요.”
“어떻게 됐나요?”
서래향의 질문에 요신이 문밖에 선 무인을 향해 턱짓을 했다.
곧 무인 한 명이 후줄근한 차림의 사내 한 명을 끌고 들어오더니 아무렇게나 부렸다.
“흐익! 살, 살려만 주십시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서래향이 이맛살을 곱게 구기며 요신을 보았다.
설명을 바라는 얼굴이었다.
“저놈은 황하물상의 일꾼이었습니다. 인근 마을에서 어물쩍거리던 것을 잡았습니다.”
과연 환살단의 행동력 역시 멸살단 못지않게 빠르다.
그 사이에 벌써 인근 마을까지 수색을 했다니.
서래향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사내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이곳의 일을 아는 대로 말해라.”
“제발 살려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퓨퓩!
사내는 손이 따끔한 것을 느끼고는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날아든 붉은 침 두 자루가 사내의 손등에 나란히 박혀 있는 게 아닌가?
“흐이이익!”
“호들갑 떨지 말고 잘 들어라. 그건 ‘적살독침(赤殺毒針)’이라는 거야. 반 시진 내로 해독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넌 온몸에 열꽃이 핀 채로 죽게 될 거야. 그러니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야 한다.”
“명, 명심하겠습니다요! 무, 무엇이든 말만 하십시오! 아는 건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요!”
“좋은 자세구나. 그럼, 다시 묻지. 여기에서 일어난 일을 아는 대로 최대한 소상하게 말해라.”
“여기라 하면… 이곳 적하성 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놈이 아무래도 여유가 많은가 보군. 같은 말을 다시 하게 하다니.”
“히익!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인은 그저 정확한 장소를 여쭙고자… 적하성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소인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른다?”
뜻밖의 대답에 서래향의 목소리가 저절로 날카로워졌다.
“그, 그렇습니다. 진짜로 모릅니다! 믿어 주십시오!”
사내의 눈은 이미 공포로 질려 있었다.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 자의 눈빛은 아니었다.
“어째서 아무것도 모르는 거지? 너희들은 적하성으로 오기로 되어 있지 않았나?”
“그, 그렇습니다만… 그전에 누군가를 만났습니다!”
“누군가를 만나? 그게 누구지?”
“그건 저도 모릅니다. 다만 그자가 황하물상의 무인들을 전부….”
사내가 몸서리를 쳤다.
그의 손등에 열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사내의 말이 더욱 빨라졌다.
그는 자신이 보고 겪은 것들에 대해서 자세히 보고했다.
한참을 들은 서래향의 시선이 요신과 마주쳤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사람이 떠올랐기에.
서래향이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으로 손을 넣더니, 곱게 접힌 종이를 펼쳐 들었다.
용모파기였다.
“자, 봐라. 혹시 그 남자가 이렇게 생겼나?”
용모파기를 확인한 사내의 눈동자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틀림없습니다! 그자가 확실합니다!”
“역시…!”
서래향이 입술을 질끈 씹었다.
사내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사정했다.
“더, 더 질문하실 건 없으십니까?”
“없어.”
“그, 그럼 해독제를….”
하지만 서래향은 대답 대신 무인을 향해 눈짓을 했다.
곧 무인이 다가와 절규하는 남자를 끌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비강의 짓이 분명합니다.”
“알수록 놀라운 자군요. 사비강이 혈혈단신으로 멸살단을 궤멸시키다니.”
“그건 알 수 없지요. 더구나 저자가 하는 말을 전부 믿을 수도 없습니다. 갑자기 불기둥이 치솟았다는 둥 너무 허황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하긴. 공포에 질린 상황이었다면, 양기를 이용해 약간의 불꽃만 일어도 화염처럼 비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더구나 적하성 내에서 일어난 일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사비강은 혼자가 아니라 여러 조직을 이끌고 이곳을 쳤을 수도 있습니다. 곳곳에 불에 탄 흔적도 상당합니다. 화공을 퍼부었을 수도 있고요.”
“화공이라…. 그게 아니어도 사비강이라는 자가 극양의 신공을 익혔다는 것만은 분명하군요.”
“저자의 불기둥 이야기를 너무 신경쓰시는 것은….”
“아니, 난 직접 봤으니까.”
“예?”
“그날 호숫가에서 그가 흑사귀를 불태워 죽이는 모습을 봤죠.”
“끄음. 그렇다면 홍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비강은 극양의 신공을 익혔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우선 혈사련에 보고를 올리도록 하고, 흉수에 대해서는 우리끼리만 우선 알고 있도록 하죠.”
“동의합니다.”
요신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서래향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선, 그 사비강에게 접근할 방법이 필요하겠어요.”
“최대한 알아보겠습니다.”
**
용천관 정문을 지키는 무인 두 명이 저만치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를 예의주시했다.
죽립을 눌러 쓴 사내는 먼 길을 온 것인지 비교적 남루한 차림새였다.
게다가 여행 내내 수염을 정리하지 못한 탓인지 얼굴은 온통 까칠한 수염으로 덥수룩했다.
사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학관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은 출입자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한데 이 후줄근한 중년 사내가 죽립을 들고 용천관 정문을 올려다보았을 때는 두 사람도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잔뜩 화가 난 표정의 사내가 금방이라도 무슨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았기에.
“멈추시오. 대협께선 어떤 일로 용천관을 방문하셨소?”
“썩 비키시게!”
다짜고짜 까칠하게 내뱉는 말에 두 문지기는 역시나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쉬컥, 쉬컥!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두 줄기 빛이 허공을 갈랐고, 문지기들의 아랫도리가 툭 풀리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졸지에 하반신을 드러낸 문지기들이 황급히 바지를 챙겨 입는 동안, 사내는 코웃음을 치고는 성큼성큼 용천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바지춤을 잡고 따라 들어오려는 문지기들을 향해 던지듯 말했다.
“일성검문의 단리추(段里秋)다.”
그제야 문지기들이 서로를 잠시 바라보다가 걸음을 멈췄다.
**
접객실에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단리추와 마주 앉은 천세명은 내심 조소를 지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였다.
단리추는 서신을 받아들고 한 달음에 달려왔으리라.
직접 본 단리추의 성격도 그가 짐작한 대로였다.
성급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의심이 많다.
보통 가난한 자들의 특징이다.
돈에 쫓기며 살다 보니 마음이 늘 급하고 말투가 거칠다.
거기에 타인의 행동이 조금만 거슬려도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해 자존심을 쓸데없이 내세운다.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호의를 항상 경계한다.
단리추는 정확히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에게 서신을 보내 불을 지폈으니 오죽하랴.
천세명이 가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사실 그런 서신을 보내어 마음이 한동안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것을 단 문주님께 직접 아뢰는 것이 도리라고 여겼습니다.”
“잘 하셨소. 내 그 서신을 받고 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심장이 벌컥거리는 것 같소. 아니, 남색이라니!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이 미친놈을 내 당장…!”
“고정하십시오. 단 문주님.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저는 제가 보고 겪은 사실들을 적은 것에 지나지 않기에. 다만, 제가 본 단리정은 절대로 자기 의지로 남색을 할 아이가 아닙니다.”
탕!
단리추가 탁자를 거칠게 내려쳤다.
“당연하지! 더 알아볼 것도 없소! 그 담임 교관이라는 작자가 단리정의 학비까지 다 내주었다고 하지 않았소?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란 없는 법! 그놈이 필시 내 아이를 노리고 술수를 쓴 것이겠지! 담임이었다니 내 아이의 형편도 잘 알았을 테고….”
말을 쏟아내면서도 단리추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다고 느꼈는지 눈시울이 불거졌다.
울분이었다.
가지지 못한 부모로서 아들을 그 지경까지 내몰았다는 것에 대한.
천세명은 내심 웃음을 감추며 말을 이어 갔다.
“혹시라도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사 교관이 단리정을 순수하게 아끼는 마음으로 후원해 주었을 수도 있지요. 다만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명색이 일성검문의 장남인데….”
“그 말은 꺼내지도 마시오!”
이윽고 단리추가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천세명도 황급히 따라 일어나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거 정말로 죄송합니다. 교관부장으로서 저 역시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말 잘 하셨소! 어찌 그런 자를 교관으로 두고 있단 말이오? 교관부장이라면 교관들을 관리하는 것이 그쪽 임무가 아니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뭐? 검을 내려 놔? 이 미친 작자가…. 감히 누구 대를 끊어 놓으려고! 우리 가문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용천관은 결코 일성검문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천하에서 발검 능력만큼은 일성검문을 따를 문파가 없지 않습니까?”
“커험.”
아부가 마음에 들었는지 단리추가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물론, 그 말은 상당히 과장한 것이었다.
오래전 과거에는 일성검문이 발검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지금의 일성검문은 그저 그런 문파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을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중소 문파.
발검 역시 다른 문파에서 더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장문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어디 그런 사실을 인정하기 쉬울까?
천세명이 그런 자존심에 다시 슬쩍 불을 지폈다.
“물론, 단리정이 활에 소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뭐, 잘 풀린다면 황궁에서 궁수로도….”
“듣기 싫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오! 그 녀석은 일성검문의 장남이오! 한데 뭐? 궁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내 천 부장의 발언은 문제 삼지 않겠소. 하지만 그자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소! 당장 그자를 만나 내가 직접 따지리다! 지금 바로 그자에게 날 안내해 주시오!”
결국 천세명이 마지못한 듯 일어났다.
“우선 안내는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보다 냉철히….”
“글쎄, 그건 내 몫이고!”
천세명이 말을 끊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개 숙인 그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