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귀환 마교관
119화
“이천 냥이라….”
사비강이 턱을 괴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정도의 후기지수를 양성하고자 하는 취지로 설립된 학관치고는 꽤나 많은 돈을 받는군.”
“그만한 결과에는 그만한 투자가 있어야 하는 법이오.”
천세명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사비강은 가만히 눈살을 찌푸리기만 할 뿐.
천세명이 입매를 치켜 올렸다.
“자, 그런 관계로 단리정 생도는 내일 퇴관 처리 될 거요. 그 사실을 알리러 왔소.”
그러자 단리정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 합니다.”
“닥쳐라.”
불쑥 튀어나온 사비강의 목소리.
“예?”
“함부로 사과하지 마라. 그것도 습관이다.”
“…….”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그건… 제가 학비를 내지 못해서 물의를….”
“그게 정녕 네 잘못이냐?”
“…….”
“아니면 동정을 얻으려고 죄송하다고 한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혹여 그렇다고 해도 아무도 널 동정하지 않는다.”
사비강의 싸늘한 시선이 이번에는 천세명에게 향했다.
그의 강렬한 눈빛을 마주한 천세명이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사비강이 나직이 말을 이어 갔다.
“네가 지금 해야 할 것은 사과가 아니라 분노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이 구조의 불합리함에 대해 분노하고 대항할 때다.”
“사 교관. 지금 생도한테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천세명이 눈살을 구기며 물었지만, 사비강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단리정에게 건네는 말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줄곧 천세명을 응시하고 있었기에 마치 천세명이 들으라는 듯했다.
“부딪치고, 또 부딪쳐서 어른들이 만든 잘못된 구조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고 몸부림치는 게 네가 할 일이다. 함부로 사과하지 마라. 네 잘못이 아니다.”
“교관님….”
“사 교관!”
쾅!
사비강이 탁자를 거칠게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버럭 소리치던 천세명이 화들짝 놀라면서 성큼 물러났다.
사비강의 시선이 여전히 천세명을 향한 채 단리정에게 말했다.
“한 번만 더 그런 시답잖은 사과를 지껄이면 네놈 주둥이에 내 주먹을 꽂아 넣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교관님.”
단리정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천세명은 그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
“이 무슨….”
“잠시 기다리시오.”
“기다리라니… 뭘…?”
천세명이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사비강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다른 방으로 건너갔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천세명이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흥! 뜻대로 풀리지 않으니 약이 바짝 올랐나 보군. 고민 좀 되겠지. 내일 아침까지 무려 이천 냥을 마련할 방안이 없을 테니.’
그럴 일 없겠지만, 혹시나 배후자를 두고 있어 부탁을 한다고 해도 내일 이후에나 돈이 마련될 터.
그땐 이미 퇴관 조치가 취해진 후다.
때문에 단리정은 다시 심사를 거친 후 내년에 다른 반으로 편성될 것이다.
‘크크크. 이 통쾌함이란…!’
천세명은 모처럼 승리감에 도취되어 몸을 가늘게 떨었다.
저벅저벅.
마침, 사비강이 돌아왔다.
천세명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 교관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오. 하지만 관칙이 그런 것을 어찌….”
“오늘까지요?”
“음? 뭐가 말이오?”
“학비를 내야 하는 게 말이오.”
“뭐, 정확히는 내일 아침까지요.”
“그럼, 됐군.”
“되다니… 뭐가…?”
턱!
사비강이 탁자 위에 전표 한 장을 내려놓았다.
액수를 확인한 천세명의 눈동자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찢어질 것처럼 부풀었다.
“이, 이게… 대체 어디서…?”
“오천 냥짜리 전표요. 언제든 전장을 찾아 바로 현금화할 수 있소. 단리정이 수료할 때까지의 학비를 모두 포함시켰소. 가지고 가시오.”
언어는 정중했지만, 말투는 먹고 꺼지라는 투였다.
천세명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가늘게 떠는 손으로 전표를 들어보았다.
‘위조가 아닐까?’
하지만 그런 거라면 금방 들킬 것이다.
오히려 단리정에게 불리할 뿐.
정말 오천 냥짜리 전표라니.
게다가 아무리 아끼는 생도라지만 그 오천 냥을 이리도 아무렇지 않게 투척한다?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한편, 단리정은 그 나름대로 놀라서 입을 척 벌리고 있었다.
이제 꼼짝없이 내일 아침이면 짐을 싸게 됐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한데 사비강이 학비를 대신 내줄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교, 교관님….”
“넌 닥치고 있어라.”
“…….”
사비강이 천세명을 빤히 노려보았다.
“왜 그러고 있소? 금액이 부족하오?”
“그, 그건 아니오만….”
“하면?”
“대체 이 많은 돈을 어디서 구했소?”
사비강의 이마가 슬쩍 일그러졌다.
화가 났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천세명은 사비강의 무공이 고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심 긴장했다.
‘제길! 그 예전의 애송이가 언제 이렇게나…!’
과거를 떠올리면 자존심이 상할 일이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사비강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내가 천 부장께 그런 것까지 미주알고주알 얘기해야 하오?”
“그건 아니지만….”
“그럼, 천 부장께서는 내가 가진 재물에 관심이 많은 거요?”
“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면 왜 묻는 거요? 다 해결된 것 아니오?”
전표를 쥔 천세명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오냐.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하긴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보통 사이가 아닐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둘의 연분이 그토록 깊었던 모양이군.
생각을 마친 천세명이 곧 싸늘한 표정으로 전표를 갈무리했다.
“알겠소. 일이 좋게 해결되었으니 나로서도 안심하게 됐소. 사 교관의 희생에 감탄했소.”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희생이 아니오.”
“그럼?”
“투자지.”
천세명이 입매를 씰룩였다.
‘이것들이 아주 연분이 제대로 났구나!’
그가 내심을 감추며 답했다.
“단리정 생도를 특별히 아.끼.는. 그 마음 잘 보고 돌아가오.”
“그럼, 살펴가시오.”
천세명이 휙 몸을 돌렸다.
‘흥, 이렇게 나온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다. 각오해야 할 거다. 사비강!’
**
그날 밤, 단리정은 사비강을 따라 용자림으로 향했다.
학관에서 퇴관당할 위기에 있었던 단리정은 내내 가슴이 먹먹하여 사비강에게 쉽게 말을 건네지도 못했다.
마침내 사비강이 커다란 나무 위에서 멈추자, 곁으로 다가선 단리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잊어라.”
“예?”
“나도 잊을 것이니, 너도 잊어라. 빚을 지고 의무감에 살지 말고, 네 자유로운 선택으로 살아라.”
“교관님….”
단리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훌륭한 교관을 사람들은 왜 그렇게도 미워하는지.
물론, 겉으로만 보이는 그의 단순한 행동들은 오해를 살만한 요지가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겪어 보면 속이 깊으신 분이라는 걸 알게 될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비강이 덥석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잡는 게 아닌가?
“어디 좀 보자.”
“예?”
“아까 그 꼰대가 들어오는 바람에 제대로 못 봤잖아. 네 안구와 렌즈가 잘 흡착되었는지 좀 보자고.”
“아, 예….”
그러더니 사비강은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는 단리정의 한쪽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달빛에 비친 단리정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 살짝 검붉은 빛으로 반짝였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집중을 해야만 볼 수 있는 눈빛이었다.
사비강이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잘 부착된 것 같구나.”
“다, 다행이군요.”
“자, 저쪽이다.”
척!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뽑아 들고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단리정이 돌아서자.
“이 검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대해서 보고 내게 아주 상세히 말해 보도록.”
단리정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천세명은 집무실 지붕 위에 몸을 납작하게 엎드린 채 천리경(千里鏡)을 눈에 대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경악에 찬 표정을 지으며 천리경에서 눈을 뗐다.
“저, 저,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것들!”
그는 진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소를 짓고 있었다.
사비강의 집무실에서 오천 냥을 받고 물러난 그는 곧장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와 특목각 쪽에 주의를 기울였다.
아니나 다를까 늦은 밤이 되자 사비강은 단리정과 함께 용자림 쪽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미행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곧 포기했다.
사비강이 자신보다 훨씬 무공이 뛰어난 고수라는 것을 이젠 알고 있었기에.
대신 천리경을 이용해서 관찰하기로 한 것.
그렇게 자신의 집무실 지붕 위에 올라와 천리경으로 두 사람을 끈질기게 쫓았다.
달빛 아래인데다 숲을 지나가기에 자칫 놓칠 뻔했지만, 다행히 두 사람이 멈춰선 곳은 달빛이 훤히 내리쬐는 나뭇가지 위였다.
처음부터 둘의 분위기는 뭔가 요상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먼저 행동을 보인 것은 역시 사비강이었다.
그가 돌연 단리정의 양 뺨을 잡더니 얼굴을 들이미는 게 아닌가?
결국 천세명은 망측한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천세명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노옴. 이번에는 어찌 빠져나갈지 두고 보자!’
그의 입가에 야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침 천리경으로 다시 확인해 보니 두 사람이 이쪽으로 돌아서는 듯했다.
정확히 자신을 보는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학관 건물이 밀집한 곳을 보는 것 같았다.
‘돌다리도 두드려야지. 조심조심.’
천세명은 관찰을 멈추고 곧장 집무실로 돌아갔다.
대신 그는 전서구에 묶어 보낼 서신을 적기 시작했다.
**
단리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에서 학관 건물까지는 엄청 먼 거리였다.
특히 밤에는 건물의 불빛만 겨우 보일 정도.
한데 그곳을 자세히 보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자, 한쪽 시야가 저절로 확대되는 것이 아닌가?
특목각을 비롯해서 용천관 구석구석의 광경이 또렷하게 보였다.
더 놀라운 것은 어두운 밤인데도 불구하고 대낮처럼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침 집무실로 들어가는 천세명도 보였다.
물론, 사비강은 건물 구경이나 하라고 그에게 그곳을 가리킨 것이 아니었다.
어찌 알았는지 그는 단리정에게 ‘그곳 말고 그 옆’이라며 위치까지 자세히 지적해 주었다.
그렇게 단리정은 사비강이 지적한 장소를 자세히 염탐했다.
그리고 사비강의 뜻대로 보고를 이어 갔다.
“… 머리를 빗고 계십니다. 아, 지금 막 옆으로 이동하셔서 보이지 않습니다. 저어, 그런데… 교관님?”
“뭐냐?”
“언제까지 계속 이렇게….”
“닥치고 계속해.”
“하지만 이건 매 교관님 숙소를 염탐하는 행위인데….”
“쓰읏. 너 아까 내 은혜를 잊는다고 하지 않았냐?”
“잊으라면서요….”
“그래도 너무 빨리 잊잖아! 닥치고 빨리 보고를 이어 가도록.”
단리정이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그곳을 응시했다.
사비강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시킨 것이 바로 매설란의 방을 훔쳐보는 것.
조금 전까지 그를 태산 같이 우러러본 자신이 우습게 여겨질 정도였다.
“아, 다시 돌아와서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빗질을 끝내시고… 헉!”
“뭐, 뭐야? 왜 그래?”
“상, 상의를 풀어헤치기 시작하시는데….”
“꿀꺽. 계속. 계속해.”
“그, 그것이… 아직은 속곳 차림이지만….”
“그리고?”
“아아…!”
어느새 단리정도 집중해 버렸는지 나직이 탄성까지 흘려냈다.
“뭐야? 인마! 혼자만 보지 말고 말을 해라!”
“끝났습니다.”
“끝나다니. 뭘?”
“창문을 닫아 버리셨어요.”
“뭐야? 쳇!”
사비강이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그가 곧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