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113화 (113/670)

# 113

귀환 마교관

113화

적하성이 함락된 지 사흘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성내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성내 곳곳에서 약탈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심지어 여인이나 어린 소녀를 강간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전리품은 상자에 차곡차곡 담아서 옮겨지는 실정이었으나, 그 중에서 몇몇은 반지나 귀고리 등의 보화를 슬쩍 주머니에 챙기는 자도 심심찮게 보였다.

복리추로 위장한 사비강은 마차에서 내려 성내를 거닐었다.

우선은 성내 구조를 눈에 익혀 두기 위해서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그의 양 옆으로는 수위대의 대주와 부대주로 위장한 조문탁과 단리정이 함께였다.

여러 채의 전각을 지날 때마다 조문탁과 단리정은 구겨지는 표정을 관리하기가 힘들었다.

해당 건물의 수장으로 짐작되는 무인들의 머리가 전각 곳곳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정말 잔인한 놈들이군요.”

조문탁이 나직이 중얼거리자, 사비강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잘 봐 둬. 이 모든 것이 수업의 일환이니. 앞으로는 이보다 더한 광경도 보게 될 거야.”

실제로 환희공자가 이끄는 멸살단은 혈사련에서도 잔악무도하기로 소문난 조직이었다.

때문에 성내 곳곳에는 세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한 광경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둘러보았을까?

갑자기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치솟았다.

무척 가까운 거리였기에 사비강 일행이 멈칫하고는 돌아보았다.

마침 건물 모퉁이를 돌아 한 소녀가 헐레벌떡 뛰어나오더니 조문탁과 부딪치면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앗!”

소녀가 얼른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겁간을 당하다가 달아나던 중이었는지, 옷고름이 풀어헤쳐져 가슴께가 드러나 보였다.

갑작스런 상황에 조문탁이 어쩔 줄을 모르는데.

“대협! 저 좀 살려주세요! 제발요! 네? 저 좀 살려주세요!”

소녀가 조문탁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애절하게 외치는 것이 아닌가?

마침 소녀를 쫓아 건물을 돌아 나온 한 사내가 욕지거리를 버럭 쏟아냈다.

“이런 육시랄 년이! 감히 내 손목을 물어? 이 개 같은 년! 이리 안 와?”

검은 무복을 입은 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조문탁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내디디며 그 앞을 막아섰다.

순간 사비강의 전음이 조문탁에게 날아들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넌 지금 조문탁이 아니라, 황하물상에서 온 육기주다.]

[하지만 교관님! 이건 정말 아니지 않습니까?]

[일어나야 할 일만 일어나는 법은 없어. 그게 강호다. 그게 세상이다.]

[하지만….]

조문탁은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질끈 깨물고 주먹만 말아 쥐었다.

마침 조문탁 앞으로 다가온 무인이 시선을 위아래로 훑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뭐요? 황하물상에서 온 손님인가?”

조문탁은 대답 대신 그를 빤히 노려보았다.

사내는 대수롭지 않게 히죽 웃어 보이고는 소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럼, 가던 길 가쇼. 넌 이리 와, 이년아!”

“아악! 살려주세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앳된 소녀가 사내에게 매달리며 사정했지만, 사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조문탁이 손을 불쑥 내밀어 사내의 손목을 잡았다.

“으음?”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조문탁을 돌아보았다.

“뭐요?”

일촉즉발의 상황.

사비강이 다시 한 번 조문탁에게 전음을 날렸다.

[의심 살 만한 행동을 하지 마라.]

결국 내적 갈등을 잠시 겪은 조문탁이 손목을 놔주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거 아직 어린 아이 같은데… 살살 다루시오.”

“크크크. 왜? 혹시 그쪽도 생각이 있소? 그럼 순서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크크크.”

사내가 비릿한 웃음을 던지더니 소녀를 이끌고 건물을 돌아갔다.

다시 사비강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잘 참았다.]

[정말 잘한… 건가요?]

[명심해라.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는 오로지 임무만 생각해야 한다. 잡생각이 끼어들어 감정적으로 나서면 임무를 그르치기 십상이지.]

[하지만… 하지만…!]

조문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불의를 눈앞에서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고 초라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들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건물 뒤편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의 그 소녀이리라.

‘제길…!’

문득 남자에게 끌려가면서 자신을 바라보던 소녀의 눈빛이 떠올랐다.

절망과 원망, 슬픔과 분노를 담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슬픈 눈빛이었다.

“젠장! 죄송합니다!”

돌연 조문탁이 몸을 휙 돌리더니 건물 뒤로 달려갔다.

“엇?”

단리정이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문… 아니, 대주님!”

하지만 이미 조문탁은 건물 모퉁이를 돌아간 뒤였다.

사비강이 혀를 끌끌 찼다.

‘내 이럴 줄 알았어.’

**

“아아악! 제발 그만하세요! 제발…!”

퍼억!

사내는 소녀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홧김에 공력까지 실었더니 소녀는 기절해 버렸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축 늘어진 소녀를 엎어놓고는 휘파람을 불며 아랫도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어이, 거기 수퇘지.”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사내가 엉거주춤 일어나서는 돌아보았다.

“수퇘지? 설마 날 두고 말하는 거냐?”

“그럼, 길바닥에서 발정 나서 아랫도리 돌려대는 수퇘지가 너 말고 여기에 또 있냐?”

“그러고 보니, 네놈은 조금 전에 보았던 황하물상?”

“그래. 수퇘지 주제에 잘 기억하는구나.”

육기주로 변한 조문탁이 차가운 눈초리로 대꾸했다.

사내가 미간을 팍 구겼다.

“이건 뭔 병신 같은 상황이야? 지금 나한테 시비를 거는 거냐?”

“그걸 꼭 말로 해줘야 알아들어 처먹냐!”

탓!

순간 조문탁이 바닥을 차고 쏘아져 나갔다.

갑작스런 상황에 사내는 방어할 준비조차 하지 못한 상황.

게다가 바지가 반쯤 내려간 상황이다 보니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조문탁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내 앞으로 미끄러졌다.

그가 신은 질풍화 때문에 경공에 있어서만큼은 웬만한 절정 고수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헛!”

사내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나려는데.

쉬컥!

서늘한 감각이 아랫도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툭.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

곧이어 뻗어 오는 일장을 막기 위해 사내가 얼른 양팔을 교차했다.

펑!

타다닷!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난 그가 양팔을 털어냈다.

그런데….

‘피?’

물러난 자리를 보니 피가 한가득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그 가운데에 떨어진 물건은….

‘설, 설마…?’

자신의 가랑이를 내려다본 사내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지며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아악! 내 조옺! 제기랄! 네놈이 감히 내 거시기를!”

하지만 이미 눈이 뒤집힌 조문탁은 상대의 발작 같은 외침에 이죽거릴 뿐이었다.

“흥! 저것도 좆이라고 달고 다녔냐? 어차피 있으나 마나한 것 같으니 차라리 잘라낸 게 잘 된 거겠군.”

“뭐, 뭐라? 이 개새끼! 죽여 버린다!”

상황이 이쯤 되자 혈사련 무인들이 소란을 듣고 몰려왔다.

그들은 거시기가 잘려 나간 사내와 양손에 단검을 쥐고 있는 조문탁을 번갈아보며 어찌 된 상황인지 몰라 눈만 끔뻑였다.

사내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저 개새끼가 내 거시기를 잘랐어! 내 거시기를! 저 미친놈이!”

그제야 무인들은 상대가 황하물상의 무복을 착용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일제히 도검을 뽑아 들었다.

차차앙!

“넌, 웬 놈이냐?”

몰려든 무인 중 한 명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조문탁이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황하물상 육기주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지만, 지금이라도 수습을 잘 해야만 했다.

“황하물상이 어째서 우리 무인을 공격한 것인가?”

“…….”

조문탁이 바로 답하지 못하자, 혈사련 무인들의 표정이 슬쩍 일그러졌다.

“다시 묻겠다. 왜 우리 무인을 공격했나?”

“…….”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자, 조문탁은 슬그머니 단검을 고쳐 잡았다.

그 모습을 본 혈사련 무인들이 날카롭게 기를 다듬었다.

“아무래도 말로 통할 상황이 아니구나! 놈을 쳐라!”

명이 떨어지자 혈사련 무인들이 일제히 바닥을 차며 달려 나갔다.

그 순간.

“멈춰라!”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조문탁을 향해 쇄도하던 무인들이 움찔거리고는 멈춰 섰다.

마침 건물 모퉁이를 돌아 까칠한 인상의 남자가 뒷짐을 진 채 나타났다.

바로 복리추로 위장한 사비강이었다.

마침 혈사련 무인 중 그를 알아보는 자가 있었다.

“복 대인?”

“이게 무슨 일인가?”

그러자 조문탁의 습격을 받은 사내가 다시 버럭 소리 질렀다.

“무슨 일이긴! 저 미친 작자가 내 거시기를 잘라 버렸소! 갑자기 나타나서 말이오!”

“흥, 자업자득이다.”

복리추의 냉랭한 반응에 사내는 물론 혈사련 무인들도 흠칫거렸다.

대신 사비강은 곁에 있던 단리정에게 턱짓을 했다.

단리정이 그 뜻을 알아듣고 얼른 달려가 쓰러진 소녀의 맥을 짚었다.

“죽었습니다.”

단리정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그러는 사이 혈사련 무인 중 한 명이 성큼 나서더니 소리쳤다.

“복 대인께서는 이 상황을 설명해 주시겠소?”

“흥! 저놈의 거시기를 잘라 버리라고 한 건 바로 나다!”

“뭐요? 어째서!”

복리추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혈사련 무인들을 둘러보았다.

“지금 네놈들이 내 상품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이곳의 전리품은 모두 황하물상을 통해 현금화 될 것이었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이든! 죽어 있는 것이든! 이 복리추의 손에 의해 돈으로 탈바꿈할 거란 말이다.”

“…….”

“적하성의 전리품 하나하나가 곧 돈이란 말이다. 방금 죽은 저년은 향후 십년간, 은자 만 냥 아니, 십만 냥 이상을 벌어들일 수 있는 고급 상품이었다. 한데 저 멍청한 놈이 훼손시킨 것도 모자라 아예 폐기시켰지.”

복리추가 삿대질을 하며 사내를 가리켰다.

상황이 묘하게 흐르자 사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혈사련 무인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황하물상에서 온 감정사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사비강은 그 여세를 몰아 더욱 매몰차게 질문을 던졌다.

“자! 저년이 앞으로 벌어야 할 십만 냥을 누가 책임질 것이냐! 그 돈의 상당 부분은 혈사련을 위해서도 쓰였을 터인데, 이 손실을 누가 대납하겠느냐?”

이쯤 되자 혈사련 무인들이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사비강이 손가락을 뻗어 가며 무인 하나하나를 가리켰다.

“네놈이 책임지겠느냐? 아니면, 네놈이? 그도 아니면 네놈이냐?”

지목당한 무인들이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그들을 날카롭게 훑어보던 사비강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금을 책임질 자신이 없다면, 지금부터 절대로 전리품에 손을 대지 말도록. 알겠나? 누구라도 소중한 전리품을 훼손시키는 행위를 했다간, 나 복리추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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