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귀환 마교관
111화
혈사련에서 탈출한 포로들이 찾아온 것은 칠주야 전이었다.
적하성 정문에 다다른 그들은 목숨을 구해 달라고 소리쳤다.
자초지정을 들어보니 이러했다.
그들은 정도맹 맹호대(猛虎隊) 소속 무인인데, 이번 혈사련과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포로로 잡혔었다는 것.
온갖 고문을 당하던 끝에 기회가 생겨 그 생지옥을 탈출했는데,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적하성에 다다랐다고 했다.
실제로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적하성 무인들은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평소 온정이 많고, 의협심이 남다른 적하성주는 당장 문을 열어 그들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하지만 양화린이 반대했다.
“신중해야 해요. 지금은 민감한 시기입니다. 무턱대고 믿었다간 우리가 위험해질 수 있어요.”
“하나, 만약 저들이 진짜라면 어쩌겠소? 우리는 정도맹 무인들을 보고도 매몰차게 박대한 것이 아니오?”
“하지만 여보. 그 반대도 생각해야지요. 만약 저들이 혈사련 무인이라면요? 우리는 큰 실수를 하게 되는 거예요.”
부부가 옥신각신하는 사이, 수하들이 양화린 편에 섰다.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인 만큼 신중하자는 입장이었다.
결국 왕패웅은 도피자들을 우선 성문 밖에서 쉬도록 해주었다.
대신 그들의 용모파기와 이름을 함께 적어 정도맹에 전서구를 날렸다.
그들이 진짜 맹호대 무인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정도맹으로부터 답변을 받았다.
보내준 이름과 용모파기만을 본다면 그들이 맹호대 무인이 틀림없으며, 실제로 며칠 전 혈사련에서 탈출했다는 정보도 있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성문을 걸어 잠그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그럼에도 끝내 반대했던 사람이 바로 양화린이었다.
왕패웅이 ‘도대체 이유가 뭐요?’라고 물으면 그저 여자의 감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감은 틀리지 않았다.
성문을 열어 준 다음날 새벽, 그들은 악귀로 변해 버렸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들은 포로로 잡혔던 맹호대 무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얼굴 가죽을 벗겨 인피면구를 쓴 것이었다.
‘그 비열한 방식에 속지만 않았어도…!’
양화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의 표독스러운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척기량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뭐하지? 벗으라고 했다. 태어날 때 너의 모습으로 돌아가라.”
“이익!”
양화린이 다시 맨손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보이지 않는 막에 튕겨 나가고 말았다.
터엉!
“악!”
이미 중상을 입은 몸이었기에 그녀는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가 이를 빠드득 갈며 척기량을 올려다보았다.
죽은 남편의 머리를 보게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광경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옷을 벗게 하다니.
“천벌을 받을 놈!”
“하하하!”
척기량이 돌연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한참이나 고개를 꺾어 들고 웃더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양화린을 보았다.
“천벌을 받아? 그 천벌은 어떤 거지? 머리가 잘려서 내가 살던 집 마당에 내걸리는 건가? 아니면, 잘린 내 아내의 머리를 보면서 옷을 벗는 걸까? 큭큭큭.”
“네가 사람이더냐!”
짜악!
척기량이 손을 휘젓자, 양화린의 뺨이 휙 돌아갔다.
그녀의 입가에서 한 줄기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닥치고 벗어라. 내 앞에서 가랑이를 벌리도록.”
“흥! 차라리 죽겠다!”
그녀가 혀를 깨물려는 순간.
후웅!
척기량이 손을 젓자, 방 한쪽의 침상에 쳐져 있던 천이 활짝 젖혀졌다.
그곳을 본 양화린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리… 림아!”
그녀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이제 열 살 정도나 되었을까?
침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앳된 소년.
바로 그녀의 외동아들, 왕의림(王義臨)이었다.
온몸이 멍투성인 의림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마도 마혈에 제압당한 것이리라.
“이 비열한 자식! 악귀 같은 놈! 아아악!”
양화린이 가슴을 뜯으며 소리 질렀다.
척기량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아, 벗어라. 그리고 나신이 되어 가랑이를 벌려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어린 아들이 내손에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 갈 것이다. 치욕을 선택하겠느냐? 아들의 고통을 선택하겠느냐? 하하하하.”
**
일단의 무리가 적하성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한 대의 마차를 비롯해 여러 대의 수레차가 이동했는데, 누런 깃발에 물이 흐르는 듯 새겨진 ‘하(河)’라는 글자가 그들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그랬다.
그들은 황하를 끼고 교역하는 모든 상업 행위를 통제하는 곳.
바로 황하물상이었다.
강호 십대 상단에 속하는 황하물상은 상단 중에서도 가장 악질로 평판이 나 있었는데, 이들이 애초에 고리대금업부터 시작해서 그 규모를 키워 왔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빌려 준 돈을 갚지 못하면 사람을 납치해서 노예로 팔아넘기곤 했다.
돈만 되면 무엇이든 하는 곳.
황하물상은 바로 그런 상단이었다.
그러니 혈사련으로서는 황하물상이 욕심날 수밖에.
본래 정당한 것보다는 부당한 것들이 더 많은 돈을 불러오는 법.
황하물상 역시 혈사련과 손을 잡은 이유가, 그들이 주로 부당함을 추구하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오늘 그들이 적하성으로 향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전리품 처리.
적하성을 궤멸시키면서 얻은 금은보화나 신병이기, 각종 영약과 무공 비급서 등을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돈이 되는 전리품은 황하물상이 수레에 실어 나르면서 암암리에 높은 가격으로 팔아넘긴다.
특히 황하물상에서 온갖 물건들을 감정하는 복리추(卜利追)는 강호에서 누구보다도 진품과 가품을 잘 구별해 내는 눈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만해안(萬解眼)’이라는 별호까지 생길 정도였다.
때문에 무공 한 줌도 없는 그가 홀로 휘황한 마차에 편안하게 타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덜컹.
마차가 돌부리에 걸리며 살짝 움직였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복리추가 움찔 놀라고는 눈을 떴다.
그는 곧 기분 나쁜 표정으로 마차 창문을 벌컥 열고는 소리쳤다.
“육 대주!”
그러자 말을 타고 마차 곁을 나란히 걷던 육기주(陸忌朱)가 얼른 옆으로 붙어 왔다.
그는 복리추의 호위를 책임지는 무인으로, 복리추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 나서는 인물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대인.”
“적하성에 도착할 때쯤엔 내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네!”
“산길이 계속되다 보니 아무래도 좀 불편하실 것 같습니다. 우선 마부에게 주의를 주겠습니다.”
복리추는 그래도 못마땅한 듯 혀를 차고는 먼발치를 바라보았다.
마침 저 숲 너머로 붉은 성채가 언뜻언뜻 드러나고 있었다.
‘거의 다 온 것 같군.’
곧 이 지루한 여정도 끝나겠다는 생각에 조금 기분이 좋아진 그가 육기주에게 물었다.
“별다른 문제는 없는가?”
“예, 아직까지 아무 이상 없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복리추가 창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고 앞서 가는 다섯 무인과 뒤에서 따라오는 다섯 무인을 확인했다.
이들 외에도 은신한 채 따르는 열 명의 무인이 더 있었다.
총 스물 한 명의 호위대.
복리추만을 위해 구성된 호위대였다.
통상적으로 문파 하나를 궤멸시켰을 때는 대략 백여 명의 호위무사들을 대동한다.
그만큼 금은보화나 값비싼 물건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하성주는 예로부터 검소하기로 유명한 자였다.
때문에 자신을 지키는 스물한 명의 호위대만 대동한 것이다.
언뜻 적은 숫자라고 우습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호위대를 이끄는 육기주는 초절정에 이른 고수였고, 그 외에 세 명의 절정 고수와 열일곱 명의 일류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본전은 뽑아야 할 터인데….”
아무리 검소하다지만, 막상 도착해서 살펴보면 진귀한 물건이 수도 없이 나오는 경우를 허다하게 봤다.
대부분의 문파가 대외적으로는 검소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실리를 챙기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한데… 적하성주는 왠지 진짜로 검소할 것 같단 말이지.’
그렇다면 오며 가며 쓴 비용만 더 드는 수가 있다.
‘하긴, 정 안 되면 양 부인이라도 팔면 될 일이 아닌가?’
적하성주의 부인 양화린의 미모는 강호에서도 유명했다.
때문에 몰락한 그녀를 잘 상품화 해서 팔아먹는다면 제법 돈이 될 터였다.
“흐흐흐. 그전에 내가 맛 한 번 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렇게 실없는 웃음을 흘리는데.
끼익. 덜컹.
마차가 갑자기 멈추면서 그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이런 젠장! 마부 모가지를 치든지 해야지!’
화가 잔뜩 난 복리추가 창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육 대주! 대체…!”
날카롭게 외치던 복리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을 눈치 채고는 육기주를 바라보았다.
육기주가 전방을 빤히 응시한 채 말했다.
“나오지 마십시오.”
“무슨 일인가?”
복리추가 창밖으로 고개를 빼곡 내밀자, 산길 복판에 우뚝 선 남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뭐지? 저놈은?’
숲길 복판에서 팔짱을 낀 채 당당하게 서 있는 인물.
그는 바로 사비강이었다.
‘적하성에서 마중 나올 사람을 보낸 건가?’
복리추가 마차 문을 열고 내려서려는데.
“안에 계십시오.”
육기주가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었다.
그는 두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사비강을 노려보기만 했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놈은 위험하다고.
무엇보다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게 그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반박귀진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초절정에 이른 자신이 이처럼 아예 모를 수는 없었기에.
그 말은 상대가 자신보다 월등히 강할 수도 있다는 뜻.
안타깝게도 복리추는 육기주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그가 마차에서 내려서더니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서 소리쳤다.
“웬 놈이냐?”
사비강이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네 얼굴 좀 빌리자.”
“뭣이?”
찰나.
쒜에에엑!
허공을 가르며 화살 한 대가 매서운 속도로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탓!
까앙!
눈 깜빡할 사이에 육기주가 몸을 날려 복리추를 노린 화살을 쳐냈다.
그제야 깜짝 놀란 복리추가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네, 네 이놈!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잔말이 많군.”
사비강이 싸늘하게 웃더니 허리춤에서 베르타스를 스르릉 뽑아 들었다.
육기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사사삭! 사삭!
어느새 그의 주변으로 그림자들이 생겨났다.
복리추의 호위대 스무 명이었다.
사비강이 개의치 않고 저벅저벅 걸어왔다.
“황하물상. 너희들은 쓰레기 같은 녀석들이지. 마계의 침공이 시작됐을 때도 네놈들은 그들에게 동족을 팔아넘긴 악질이었다. 특히 복리추 네놈은 악질 중에서도 악질이었지. 오늘 내가 널 처단하겠다.”
“도대체 뭔 개소리를…? 뭐, 뭣들 하느냐! 저놈을 죽여 버려!”
복리추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육기주가 바닥을 차고는 쏘아져 나갔다.
사비강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너희들은 저 악질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죄악이다.”
찰나.
타닷!
사비강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