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110화 (110/670)

# 110

귀환 마교관

110화

쾅!

늘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주작당주 악천괴가 전에 없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탁자를 내리쳤다.

“아직도 찾지 못했단 말인가!”

그가 버럭 내지른 고함 소리에 보고를 올린 사내가 흠칫거리고는 고개만 푹 숙여 보였다.

후우우웅!

뱃속부터 들끓는 분노로 인해 체내의 기가 발산되면서 무복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도대체 만통각(萬通閣)에서 하는 일이 뭐란 말인가!”

그가 주먹을 쥐고 바들바들 떨었다.

혈살귀도 낙일립이 사라진 지 벌써 삼 개월이 흘렀다.

귀영부를 복속시키기 위해 파견했던 그날이다.

또한 홍묘가 부탁한 용모파기의 인물을 찾기 위해서 귀영부에 의뢰한 건에 대한 경과를 알아보려고 한 날이기도 했다.

한데 그날 그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놀랍게도 약속 장소였던 산수객잔은 시체 세 구가 나뒹굴었다.

숙수와 점소이로 위장했던 혈사련의 무인들이었다.

혈살귀도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귀영부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녀석들을 만나러 갔다가 종적을 감춘 것인 만큼.

한데 중원 어디에서도 귀영부와 접촉할 방법이 사라졌다.

한때 귀영부에 속해 있던 자들을 잡아다가 온갖 고문을 가해 보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몸까지 바친 홍묘는 계속해서 악천괴를 압박했다.

결국 만통각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만통각은 혈사련의 정보 조직이었다.

물론 혈사련이 구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정도맹의 천안각에 비할 정도로 정보 입수 능력이 빠르진 않았다.

그럼에도 제법 중요한 정보들을 곧잘 파악해내는 능력을 인정받아, 혈사련이 정식 출범한 후로는 단(團)에서 각(閣)으로 승격된 조직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아무런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니!’

악천괴가 이를 뿌드득 갈더니 벌떡 일어났다.

“내 직접 만통각주를 만나서 따져 물어봐야겠다.”

그는 수하가 말릴 틈도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문을 벌컥 열고 나섰다.

한창 기승을 부리던 더위는 이제 한풀 꺾여 있었다.

그가 장내를 성큼성큼 가로지르며 걷고 있는데, 마침 저만치 가을 단풍을 구경하고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준수한 외모를 가진 중년 남자였는데, 그가 바로 만통각주 류여중(柳旅中)이었다.

그를 본 악천괴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여유가 넘치시는 것 같소?”

“아, 주작당주님.”

“지금 단풍놀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정도맹과 한창 전쟁 중이라는 것을 깜빡하신 듯하오. 하긴, 그러니 얼마 전에는 포로도 놓쳐 버린 것이겠지!”

며칠 전, 포로가 탈출한 사건을 두고 일컬은 말이었다.

그 포로들의 관리를 직접 지시한 사람이 바로 류여중이었기에.

류여중이 겸연쩍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 가끔은 이렇게 머리를 식혀줘야 좋은 계책도 떠올라서 말이지요.”

“허! 한데도 어째 혈살귀도의 행방조차 여태 찾지 못하는 거요? 머리를 너무 식히다 보니 바람이 든 건 아니오?”

날 선 목소리에도 류여중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악천괴의 눈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웃어? 감히?’

혈사련이 정식 출범할 때까지만 해도 류여중은 자신과 감히 대작도 하지 못할 만큼 아래 급이었다.

한데 정사대전이 시작되면서 그의 비중이 점점 높아졌다.

정도맹과의 혈전은 엎치락뒤치락 하는 형국이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혈사련이 우세한 편이었다.

이제 강호에서 혈사련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사할 초반 대.

그들이 정식 출범하고 나서 반 년 남짓한 사이, 일 할에 가까운 성장을 이룬 것이다.

이는 놀라운 결과였다.

말이 일 할이지, 단순히 영역으로만 따지자면, 중원의 성도 하나를 더 차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보니 전쟁 중 작전을 총괄하는 만통각의 비중이 점점 올라갔고, 이제는 류여중을 혈사련의 총군사로 임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혈사련으로서는 총군사라는 직책을 따로 두지 않고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안건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공식적으로는 주작당주인 악천괴보다 만통각주인 류여중이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

즉 새로운 권력이 부상하는 것이다.

그러니 악천괴로서는 영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정도맹에 대해 온건적인 입장인 백호당주의 힘이 좀 약해졌나 싶었더니, 이젠 새파란 애송이가 머리 위에 서려고 하지 않나?

악천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데, 류여중이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혈살귀도의 행방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만통각 인원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인력을 혈살귀도의 행방에만 집중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는 은근히 만통각의 규모를 더 키워야 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악천괴는 그 내심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말을 이어 갔다.

“흥! 하면 귀영부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은 왜 여태껏 찾지 못하고 있소?”

“같은 이유입니다. 그들은 애초에 철저한 점조직 형태로 운용해 왔지요. 말 한 마디로 쉽게 찾을 것 같으면 누가 귀영부에게 의뢰를 하겠습니까? 다만….”

“다만?”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귀영부는 그 후 어떠한 의뢰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그야말로 강호에서 깨끗하게 지워진 것처럼 사라졌지요.”

“설마 멸문지화라도 당했다는 거요?”

류여중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 정도의 사건이라면 만통각에서도 알았을 겁니다.”

“하면…? 혹시 정도맹으로 귀속?”

“하하. 그럴 리가요. 그들은 누가 뭐라 해도 사파에 속합니다. 정도맹에서 그런 자들을 거둘 리가 없지요.”

“그럼, 도대체 뭐란 말이오!”

“그래서 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은….”

“그게 뭐요?”

류여중이 눈을 가늘게 뜨다가 말을 이었다.

“그 가득삼이라는 가명을 쓴 청년입니다.”

“홍묘가 말했던 그 자 말이군.”

“그렇습니다. 이상하게 그자와 엮이면 우리 일이 요상하게 꼬여 갑니다. 단지 우연일까요?”

“하면, 혈살귀도가 사라지고 귀영부가 사라진 것도 그와 관련이 있다?”

“우선 연결고리가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크음.”

악천괴가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어느 정도 미심쩍은 부분은 있다.

하지만 가득삼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고?

도대체 정도맹과 가득삼은 무슨 관계란 말인가?

류여중이 나직이 말을 이어 갔다.

“어쩐지 이 싸움의 중심에 그가 있다는 기분입니다. ‘가득삼’이라는 가명을 쓴 청년. 그자가 어쩌면 이 전쟁의 결말을 뒤트는 유일한 변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각주의 지나친 해석일 가능성은?”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제 직감은 거의 틀렸던 적이 없습니다.”

류여중이 씨익 웃어 보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만약 그를 신경 쓰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혈사련은 강호의 오 할을 차지했을 겁니다.”

“강호의 절반을?”

악천괴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류여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애석하게도 제가 뛰어나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정도맹의 총군사가 현재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뿐이지요. 고인 물이 썩듯이, 정도맹도 지금 곳곳이 썩어 가고 있는 중이니까요.”

“한데 아직 절반을 차지하지 못한 이유가….”

“그렇습니다. 바로 그 ‘가득삼’이라는 인물 때문에. 그가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어 유별나게 신중해진 것이지요. 그만큼 진척도 더딘 것이고요.”

“크음.”

“아시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혈살귀도의 행방 따위를 찾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귀영부도 마찬가지지요. 그들과 엮였을 가능성이 높은 ‘가득삼’이라는 인물을 찾아내는 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그를 제거하는 것. 여기에 신경을 써야지요.”

담담하게 말을 뱉은 류여중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

구름 몇 점이 높은 하늘을 유유히 떠가고 있었다.

마침 사내 하나가 류여중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그는 만통각에서 일하는 자였다.

“멸살단주(滅殺團主)가 적하성(赤霞城)을 장악했다고 합니다.”

“호오? 역시 생각보다 빠르군.”

류여중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멸살단주는 ‘환희공자(歡喜公子)’라는 별호로 불리는 척기량(戚氣量)이었다.

그가 사람을 죽일 때면 늘 해맑게 웃는다고 하여 붙은 별호다.

그에게 적하성 공략을 명한 사람이 바로 류여중이었다.

그는 적하성을 차지하기 위해 유독 공을 들여 왔다.

“곧장 황하물상을 보내게.”

“알겠습니다.”

수하가 돌아가자, 류여중이 악천괴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무래도 전 일 때문에 다시 돌아 가봐야 할 것 같군요. 악 당주님도 너무 심려치 마시길.”

악천괴는 그저 냉랭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가득삼이라는 녀석이… 역시 문제였단 말인가?’

**

적하성은 과현산(果峴山)에 위치해 있다.

산중 절벽에 지어진 이 거대한 성은 온통 붉은 벽돌로 쌓아 올렸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강호인들 사이에서는 천의 요새로도 유명한 곳.

적하성의 후원에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낭떠러지가 있었고, 정면으로는 대여섯 장 높이의 성벽이 버티고 있었다.

때문에 정문을 열고 들어서지 않는 이상, 성내에 진입하기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적하성이 오늘 무너졌다.

성내 곳곳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고, 여기저기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와 신음 소리가 이어졌다.

적하성의 정문이 있는 남쪽 성벽 위에는 긴 창대에 사람의 머리가 내걸려 있었는데, 바로 적하성주 왕패웅(王覇雄)의 머리였다.

퀭하게 부릅뜬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는 왕패웅의 머리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울분이 죽어서도 스러지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왕패웅의 머리가 내려다보이는 내성의 최상층.

‘성주전(城主殿)’이라 불리는 그곳에는 백옥처럼 맑은 피부를 가진 남자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꼿꼿하게 서 있었다.

깎아 놓은 조각처럼 생긴 그는 흉흉한 성내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미미한 웃음마저 머금고 있었다.

그가 바로 멸살단주인 환희공자 척기량이었다.

마침 문이 열리면서 그의 수하 한 명이 여인을 끌고 들어왔다.

“단주님! 끌고 왔습니다.”

무인은 여인을 아무렇게나 부리듯 방 한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옷차림과 단정히 묶은 머리는 어딘지 중년의 취향에 가까웠지만, 무공을 익혀서인지 굴곡진 몸매는 매우 아름다웠고, 이목구비 또한 또렷한 것이 상당한 미인이었다.

척기량이 슬쩍 돌아보았다.

“수고했다. 나가봐라.”

수하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자,

“이 나쁜 놈!”

여인이 갑자기 품에서 비수를 꺼내들더니 척기량을 향해 단숨에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척기량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다가선 여인이 척기량의 가슴을 향해 비수를 내찌르는 순간이었다.

쒸이이잉!

카앙!

그녀가 내지른 비수는 보이지 않는 막에 튕겨 나가고 말았다.

동시에 척기량의 허리띠 장식이 철컥 풀리더니 두 자루의 암기로 화하면서 여인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피츗! 피츗!

“꺄악!”

여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여인 역시 상당한 무공을 익힌 상태였기에 즉사는 면했지만, 이번 암기의 기습 공격으로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녀를 베었던 두 자루의 암기는 빠른 속도로 다시 돌아와 허리띠 장식으로 변했다.

생전 처음 보는 신병이기인 만큼 놀랄 법도 했지만, 여인의 정신 상태가 그 정도로 여유롭진 못했다.

그저 복수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울분만 끓어오를 뿐.

“아악!”

어느새 다가선 척기량이 여인의 머리채를 휘어잡더니 난간이 있는 곳까지 질질 끌고 갔다.

“으윽! 이것 놔…!”

“저길 보아라. 네 남편의 머리가 보이는가?”

척기량이 맑은 목소리로 끔찍한 말을 내뱉었다.

“흐윽!”

여인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랬다.

그녀는 이번 전투에서 죽어 버린 적하성주의 아내 양화린(梁華麟)이었다.

사악!

순간 한 줄기 빛이 그녀의 뒤통수를 스치는가 싶더니, 단단하게 묶어 올린 머리카락이 풀어지며 허리춤까지 출렁 늘어졌다.

척기량이 히죽 웃었다.

“훨씬 낫군. 이제 벗어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