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귀환 마교관
102화
사비강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누구요?”
“그러는 자네야말로 무도하군! 통성명을 하고자 하면 본인의 이름부터 말해야 할 것이 아닌가!”
가득삼으로 변한 사비강이 잠시 아니꼬운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난 자랑스러운 해천문(海天門)에서 온 가득삼이라고 하오!”
“해천문?”
들어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럴 수밖에.
사비강이 말한 해천문은 현 강호에서 가장 흔한 문파 이름이었다.
그러니 드넓은 강호 어느 시골구석에 해천문이라는 소문파가 하나쯤 있을지 없을지 어찌 알랴?
“이제 당신이 말할 차례요!”
일승을 올린 가득삼이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갈천성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나는 이곳을 관리하는 주인장일세. 변변찮은 이름까지야 알 필요 없을 테고. 그대는 어째서 패배를 시인한 무인에게 그런 무례를 저지르는가?”
“사파에 대한 원한이 있어서 그랬소!”
“그렇다고 아무 관련도 없는 자를 그렇게 구타를 한단 말인가?”
“뭐 어떻소? 어차피 사파 놈들이야 다 똑같지. 힘도 없으면서 뒤통수나 치는!”
“부상 입은 자의 뒤통수를 치는 건 정파의 법도인가?”
그 말에 사비강이 발끈한 척 소리쳤다.
“지금 우리 정파를 모욕하는 거요!”
“나는 자네에게 묻는 걸세. 정파인들에게 묻는 게 아니라.”
“시끄럽소! 저자는 사파고, 나는 정파요! 그러니 내가 곧 정의가 아니고 뭐겠소?”
“허참, 앞뒤가 꽉 막힌 친구로군!”
“앞뒤가 막힌 건 바로 당신이오! 여기 정파인들에게 물어보시오!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이가 얼마나 있을지! 안 그렇소? 여러분!”
사비강이 관중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대꾸하는 자가 없었다.
같은 정파인이 보더라도 가득삼은 그야말로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진상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득삼으로 변한 사비강은 연신 기세등등한 표정이었다.
마치 비무에서 한 번 이긴 걸로 세상 누구든 이길 수 있을 것처럼.
‘정말이지 어디서 제대로 멍청한 녀석이 굴러왔군.’
갈천성이 미간을 푹 구기고는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비무가 끝났으니 저 철부지를 끌어내라!”
흑천회 무인들이 비무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사비강이 손을 뻗으며 외쳤다.
“잠깐!”
“뭔가?”
“난 내려가지 않겠소.”
“뭣이?”
“연참을 하게 되면 내려가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었소?”
“호오? 연참을 하시겠다?”
“그렇소.”
“난이도는? 알고 있겠지만 같은 난이도를 두 번 선택할 수는 없네.”
“흥,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소.”
“그럼 ‘중’으로 하시겠나? 잘 생각하시게. 운이 좋아서 한 번 이겼다고….”
“닥치시오! 누가 운으로 이겼다는 거요? 나는 당당히 내 실력으로 이겼소!”
‘어느 집안 자식인지 참 답이 없군.’
갈천성이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관중들 사이에서 하나둘 불만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애송아! 그만 내려와라! 더 이상 못 봐주겠다!”
“그래, 운이 좋아서 겨우 이긴 주제에 말이 많구나!”
상황이 이리되자 사비강은 더욱 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도령이나 할 말을 뱉어냈다.
“다들 시끄럽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사파 녀석들은 누구든 이길 수 있소!”
이쯤 되자 갈천성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젓고는 말했다.
“아아, 알겠네. 그래서 난이도는?”
“최상으로 하겠소!”
그 말에 관중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저놈이 제대로 미쳤군!”
“최상이라니? 뭘 잘못 먹은 거 아냐?”
“확실히 알겠군. 저 녀석이 얼마나 철부지인지 말이야.”
사비강에게 돈을 걸어서 이익을 본 자들도 이번만큼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이지 이번에는 운이 좋아 돈을 딴 것이리라 여겼다.
가득삼의 저런 성격을 진작 알았더라면 애초에 그에게 돈을 걸지도 않았으리라.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며 철없는 소리를 이어갔다.
“솔직히 난이도 ‘하’는 너무 시시했소. 겨우 일격에 나가떨어질 줄이야. 난이도 최상은 되어야 내 상대가 될 것 같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정파의 희망이니까!”
가득삼으로 변한 사비강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팡팡 쳤다.
관중들 사이에서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이번에는 갈천성도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농이라도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정말로 최상 난이도에 도전하려는 모양이었다.
지금껏 최상 난이도에 도전한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그조차도 최상의 난이도에서는 패배하고 말았다.
난이도 최상에 도전할 정도면 무공이 굉장히 고강한 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강한 사람이 고작 돈 몇 푼 때문에 이런 비무장에 나와 철창 안의 원숭이 노릇을 할 리는 거의 없다.
‘하여튼 어린 것들이란….’
혀를 끌끌 차던 갈천성이 손을 슬쩍 들었다.
마침 사내 한 명이 그의 등 뒤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회주님.”
“패왕(霸王)을 준비시키게.”
“정말… 저 도전을 받아들이실 생각입니까?”
“뭐, 모처럼 분위기도 조성할 겸.”
“알겠습니다.”
사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나갔다.
난이도 최상의 무인.
유일하게 상대가 명확히 정해진 최상 난이도.
호투장에서 ‘패왕’이라 불리는 그는 초절정 수준의 고수다.
그렇잖아도 요즘 호투장을 방문하는 무인들이 흑천회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한 번쯤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어쩔 생각이죠?”
마침 곁에서 아리따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이미 한 번 호되게 당한 갈천성이었기에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춰 대답했다.
“저런 녀석들을 적당히 상대하게 되면 호투장이 다른 이들에게 우습게 여겨질 것이오.”
“해서?”
“이 호투장이 우습게 보이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소?”
갈천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 방에 죽인다.
단 일격.
그걸로 충분하다.
저런 애송이 같은 녀석들이 자꾸 나타나면 물만 흐려진다.
흑천회가 그리 만만하고 질 낮은 곳이 아니란 걸 보여 줄 생각이다.
“하지만 좀 이상하군요.”
“무슨 소리요?”
“저 가득삼이라는 자. 이상하리만치 여유가 있어요.”
“흥, 원래 무공도 삼 년 익힌 자가 제일 무섭다고 하지 않소? 운 좋게 한 번 이겼다고 기고만장해진 게지. 그 한 번의 승리가 제 명줄을 죄여 오는 줄도 모르고.”
말에 뼈가 있었다.
사실 중의적인 의미로, 홍묘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했다.
홍묘 서래향이 배시시 웃었다.
“그런가요? 하지만 그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니까 문제겠죠.”
“클클. 그런 일은 없을 거요. 두고 보시오.”
“좋아요. 그런 자신감은.”
그때 마침 사내가 돌아와서 보고를 올렸다.
“패왕 준비 끝났습니다. 판돈도 모두 받았습니다.”
마침 서래향이 불쑥 끼어들며 질문을 던졌다.
“그 여자 아이는 이번에도 돈을 걸었나요?
가연옥으로 변한 매설란을 두고 한 말이었다.
사내가 회주를 바라보자, 갈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가 대답했다.
“예, 가득삼에게 걸었습니다.”
“얼마나?”
“삼십만 냥입니다.”
“삼십!”
갈천성과 서래향이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앞서 가득삼이 승리하면서 얻은 배당금을 모두 다시 건 것이다.
갈천성이 가연옥을 보며 조소를 지었다.
‘클클, 제 오라비가 죽을 줄도 모르고. 순진하기는.’
보아하니 얼굴은 고만고만하지만 몸매가 제법이었다.
이대로 가득삼이 죽으면 가연옥을 잘 만져서 좋은 상품으로 만들 수 있을 듯했다.
반면 서래향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창밖의 비무장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이상해. 저건 객기나 허세가 아니야.’
그녀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근거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어렵다.
그냥 기분이다.
여자의 직감.
마침 사람들 사이에서 열렬한 환호성이 들려왔다.
“오오, 패왕이다!”
“정말로 패왕이 나왔다!”
“하룻강아지가 물려 죽게 생겼구먼!”
“패왕! 저 강호 무서운 줄 모르는 꼬마를 혼내 주시오!”
산발한 머리카락, 정돈되지 않아 거친 수염들, 부리부리한 눈매. 형형하게 빛나는 안광.
그야말로 한 마리의 맹수를 떠올리게 만드는 남자.
무공 실력으로만 따진다면 흑천회에서 회주 다음으로 강한 자였다.
또한 회주의 친동생이기도 했다.
그가 철창 안으로 들어오자 호투장의 열기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 방에 보내 버리시오! 패왕!”
“우리 모두 그대에게 돈을 걸었소!”
아닌 게 아니라 이번 비무의 배당률은 서른 배나 차이가 났다.
물론 그보다 더 큰 차이가 날 법도 하지만, 생각보다는 사람들이 돈을 걸지 않았다.
대다수가 패왕의 승리를 예견했기에.
그러니 배당금을 받아도 푼돈에 불과할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그래서 상당수의 사람들은 도박을 하지 않고 그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매설란은 손에 땀이 맺힐 정도로 긴장했다.
패왕이 무시무시해서?
아니다.
분명 그는 강하다.
자신보다도 강하다.
하지만 사비강보다는?
왠지 모르겠지만 사비강이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긴장하는 이유는 바로 배당금 때문이다.
무려 서른 배!
‘하루아침에 구백만 냥을… 아니, 우승 상금까지 포함하면 천만 냥이다. 천만 냥!’
물론 그런 게 바로 도박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걸 오차 없이 실현해낸다는 게 놀라웠다.
‘도대체 저 남자는 자기 자신을 어디까지 믿는 거지?’
사비강이 이기면 정말로 천만 냥이 생긴다.
태어나서 한 번도 그렇게 큰돈을 구경한 적이 없었기에 왠지 모르게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가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사람보다 돈이 무섭다니….’
하긴 어쩌면 그 말이 정답일지도.
그러는 사이 비무대 위에서는 싸움이 시작됐다.
패왕이라 불린 사내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꼬마야, 죽기 전에 남길 유언이라도 있다면 말해라.”
“나의 천지개벽무적권(天地開闢無敵拳)으로 널 단숨에 때려눕히겠다!”
사비강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패왕이 눈살을 슬쩍 구기더니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그 요란한 권법은 뭐란 말이냐? 재미있는 녀석이군. 내 특별히 네놈을 일격에 고통 없이 보내 주마.”
“허세가 심하군!”
“허세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 테지.”
그러자 사비강이 사뭇 달라진 표정으로 패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경천동지할 만한 발언이 튀어나왔다.
“좋다. 그렇다면 선공을 양보하지. 어디 한 번 일격에 날 때려눕혀 봐!”
“뭐?”
“열 초식을 먼저 받아 주지. 그동안 나는 일절 공격하지 않겠다.”
순간 장내가 침묵에 휩싸였다.
이제 사람들은 웃을 여력마저 잃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패왕 역시 황당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미쳤군. 진짜로 미친놈이었어. 오냐, 그렇게 원한다면 선공을 해주마. 하지만 열 초식까지 받아낼 필요는 없다. 어차피 너는 일격에 죽을 테니까.”
“하하. 또 허세군! 하지만 나의 천지개벽무적권은….”
“개소리 작작하고 그만 죽어라!”
찰나, 패왕이 단숨에 사비강을 향해 날아들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에 이어 사비강의 몸이 부웅 날아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콰당탕탕!
거칠게 튕겨 나간 사비강이 철창에 부딪치며 축 늘어졌다.
하마터면 매설란도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일권을 내지른 패왕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저만치 쓰러진 사비강을 보고는 히죽 웃었다.
“크크… 그래도 고통 없이 보냈으니 감사한 줄….”
말을 뱉던 패왕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잘못 봤나?’
아니다.
쓰러진 사비강이 분명 움찔 움직였다.
잠시 후.
“크으으! 아프다. 아파!”
사비강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뺨을 어루만지며 앓는 소리를 내는 게 아닌가?
관람자들 모두가 이젠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매설란도 몸에 힘이 탁 풀렸다.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패왕.
그는 욱신거리는 오른 주먹을 매만지며 눈매를 파르르 떨었다.
‘어떻게…?’
분명 온힘을 다해 일권을 내질렀다.
한데 녀석이 멀쩡해도 너무 멀쩡하지 않은가?
사비강이 패왕을 향해 소리쳤다.
“과, 과연 대단한 주먹이군! 하지만 어림없다!”
“이익…!”
패왕이 발끈해서 이를 갈다가 심호흡을 했다.
흥분할 필요 없다.
생각보다 녀석의 내공이 심후한 것 같긴 하지만, 충격을 받은 건 분명해 보인다.
‘좋아, 그 주둥이도 더 이상 털지 못하도록 해주마!’
패왕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크크크. 네놈을 우습게 본 걸 인정하지. 이제 제대로 상대해 주마!”
“얼마든지! 나의 천지개벽무적권이라면 어떠한 공격도….”
“시끄럽군! 나머지는 저승에서 떠들어라!”
타앗!
패왕이 다시 한 번 바닥을 차고 날아올랐다.
후우우웅!
그의 주먹에 강기가 맺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