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귀환 마교관
101화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사비강을 보던 서래향이 눈을 가늘게 뜨자, 갈천성(渴泉省)이 입을 열었다.
“클클. 난이도 ‘하’를 신청한 애송이라더군. 어디서 소문을 듣고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쓰러져 가는 가문을 일으켜 세우려는 것 같다더군. 이름이 ‘가득삼’이라고 하던데.”
처음 듣는 이름이다.
사실, 그녀는 사비강의 지금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일전에 비밀 분타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 주둔해 있던 무인 중 하나였으니.
하지만 일개 무인들의 얼굴까지 하나하나 기억하기란 무리였다.
게다가 당이협이 고른 얼굴은 그야말로 특이점이 없는 외모였다.
어딘지 흔한 얼굴이랄까?
때문에 그녀는 낯설지 않은 그 느낌을 더 깊게 파고들진 않았다.
“혼자 온 건가요?”
“여동생과 함께 온 모양이더군. 무려 십만 냥이나 들고 말이지. 클클. 하여튼 요즘 것들은 대담하다니까.”
말을 뱉는 갈천성의 시선이 서래향의 찢어진 옆단으로 드러난 허벅지에 꽂혀 있었다.
“배당률이 어떻게 되나요?”
“저 청년에게 걸면 세 배를 받을 수 있지.”
즉 상당수의 사람들이 사비강의 패배를 예상했다는 뜻이다.
그나마 사비강에게 이만큼이라도 돈이 걸린 것은 도전 난이도가 ‘하’이기 때문이다.
갈천성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서래향에게 다가가 허리로 손을 뻗었다.
“어떤가? 한 번 걸어 보겠나? 원한다면 내 작업을 걸어 줄 수도 있는데. 클클.”
작업을 건다는 것은 승부 조작을 하겠다는 뜻.
분위기 전환이나 수수료 이익을 위해 종종 흑천회가 사용하는 꼼수였다.
이제 갈천성의 손길이 서래향의 잘록한 허리를 지나 부드럽게 솟은 엉덩이로 향했다.
서래향이 고개를 저었다.
“전 도박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가? 그거 참 아쉽군. 그래도 이게 따먹을 때는 참 짜릿하거든.”
다음 순간, 그의 손이 서래향의 둔부를 슬그머니 움켜쥐었다.
찰나.
스스스스슷.
‘크읏!’
매서운 기운을 느낀 갈천성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아니, 떼려고 했다.
한데 어찌 된 것인지 서래향의 엉덩이에 딱 붙은 손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등에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오더니 피부가 거무죽죽하게 변해 가는 것이 아닌가.
‘크익!’
갈천성이 얼른 다른 손으로 자신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그건 최악의 행동이었다.
이제는 양손이 시커멓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독, 독공!’
검은 기운은 어깨까지 빠른 속도로 뻗어 왔다.
갈천성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갔다.
마침내 양팔이 어깨까지 거무죽죽하게 물들고 나자, 그의 손이 엉덩이에서 떨어졌다.
“크윽!”
갈천성이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서래향이 매혹적인 자태로 돌아서며 배시시 웃었다.
“회주께서는 도박을 정말 좋아하시나보군요.”
갈천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표정이 분노와 공포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도박은 정말 위험하답니다. 회주님 말씀대로 따먹으면 그보다 짜릿할 수도 없겠지만….”
서래향의 고운 손길이 갈천성의 주름진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일순 목을 콱 움켜쥐었다.
“컥!”
“실패하면 패가망신하고 인생을 종치는 것도 도박이지요.”
“컥, 커억.”
“감히 흑룡의 꽃을 꺾으려고 하는 걸 보면 회주께선 정말 도박을 좋아하긴 하시는군요.”
‘흑룡’이라 함은 혈사련주를 칭하는 말.
갈천성이 겨우 말을 꺼냈다.
“컥, 내 실, 실수… 했네….”
서래향이 곱게 눈웃음을 지었다.
혼이 나가 버릴 만큼 매혹적인 미소였지만, 갈천성에게는 더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도박에서는 무르기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
“뭐, 아직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은 걸로 해두죠.”
싱긋 웃은 그녀가 혓바닥으로 뭔가를 내밀었다.
둥근 단환이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그걸 집어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창가로 돌아섰다.
“어서 복용하지 않으면 그 팔, 영영 못 쓰게 될 지도.”
갈천성이 그대로 무릎을 꿇고는 개처럼 엎드려 바닥에 떨어진 해독제를 입으로 물었다.
양팔에 감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런 비참한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 비무대에서는 이제 막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크윽! 이런 바보 같은…!”
흑천회 소속 무인인 백성락(白聖樂)은 울컥 피를 토하고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가득삼’이라고 했던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애송이가 나타나서 적당히 상대해 주려고 했다.
호투장 분위기를 더욱 닳아 오르게 하려고 일부러 아슬아슬한 승부를 이어갔다.
사실, 난이도에 따라 출전 선수가 명확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 모를 초절정 고수가 나타나서 난이도 ‘하’와 승부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흑천회에서는 도전자의 역량과 기도를 대략적으로 가늠한 다음에 그에 맞는 상대를 출전시킨다.
어쩔 때는 정말로 형편없는 실력의 무인을 출전시키기도 하고, 또 어쩔 때는 초절정 고수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즉 진짜 실력이 ‘하’ 수준이 아니라, ‘하’ 수준으로 보이게끔 연기만 할 뿐이다.
그러니 흑천회 입장에서는 비무가 그저 하나의 공연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싸움을 두고 승자를 맞추는 도박이었기에.
이번에 흑천회에서 내보낸 자는 바로 절정 고수인 백성락.
적당히 분위기를 끌어올린 다음, 백성락이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흐름으로 이어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십 수 정도를 겨루었을 때였다.
사비강이 느닷없이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마치 초식이고 뭐고 없는 듯 단순무식한 움직임.
마치 시정잡배처럼 절도도 품위도 없는 공격이었다.
‘결국 여기까지인가?’
백성락이 코웃음을 치고는 사비강을 향해 일장을 마주 뻗어 가는데.
퍼엉!
백성락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 뭐 개 같은…!’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그는 자신의 배를 보았다.
상대의 일장이 정확히 자신의 복부에 명중됐다.
옷자락이 터져 나갔고, 상복부에는 시뻘건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운.
그야말로 운이었다.
자신에게 달려오던 상대가 제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엉겁결에 장력을 뻗은 것이다.
그 바람에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튀어나온 장력을 받아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겨우 이 따위 공격에 내가…!’
순간 울분이 치솟자 내기가 뒤엉켰다.
“읍. 쿠웨에엑!”
입 밖으로 분수처럼 피가 터져 나왔다.
내상이 깊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일장을 허용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제길…!’
백성락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차라리 검을 뽑아 들고 베어 버렸어야 한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적어도 그랬다면 이렇게 형편없는 장력을 얻어맞고 피를 토하진 않았으리라.
철창 밖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환호와 탄식을 터뜨렸다.
환호하는 자는 사비강에게 돈을 걸었던 자들이고, 탄식을 내뱉는 자는 백성락에 돈을 건 자들이었다.
“뭐야? 정말 저대로 끝이야?”
“백성락! 장난치지 마라! 너한테 오만 냥을 걸었다고!”
“크하하하! 가득삼 최고다! 아예 죽여 버려라!”
뒤엉킨 응원의 목소리.
한편, 사비강은 스스로도 놀란 듯 자신의 오른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론, 연기였다.
다른 이가 보기에는 사비강의 발이 뒤엉켜 넘어지다가 일장을 내지른 것처럼 보였겠지만, 이는 모두 계산된 행동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운으로 이긴 남자.
그렇게 보이는 것이 이번 비무의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기는 방식도 중요하지만, 이긴 후의 행동도 중요하다.
때문에 사비강은 활짝 웃음 지으며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우와! 이겼다!”
그야말로 철부지 소가주가 할 만한 행동이었다.
상대에 대한 예의는 안중에도 없이 철창 안 비무대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그저 해맑게 웃었다.
“이겼다! 내가 이겼다! 으하하하!”
“흥, 애송이!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걸 잊지 마라!”
백성락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러자 마구 날뛰던 사비강이 그를 스윽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백성락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뻐억!
“크억!”
쿠당탕탕! 철컹!
철창까지 튕겨 나간 백성락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비강의 행동은 비열하기보단 철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비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엄지로 자신을 척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대는 나에게 패배나 선언해라! 나는 자비가 많은 사람이 아니다!”
사비강이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더라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쳐대는 하룻강아지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백성락의 두 눈에 울분이 들어찼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상이 깊어 더 이상 무리하면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었기에.
“패배를… 인정한다.”
“하하하하! 나의 승리다!”
사비강은 포권도 취하지 않은 채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자연히 상당수의 관람자들이 비난이 담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돈을 딴 사람들은 사비강에게 환호의 박수를 보냈다.
사비강은 그 박수에 취한 사람 마냥 싱글벙글 웃더니 몸을 추스르며 일어나는 백성락에게 다가갔다.
손이라도 내밀어 주려는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사비강이 다짜고짜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그대는 정도인인가?”
“아니다.”
“흥! 더러운 사파 놈이었군! 내 생각을 잘못했다. 쓰레기 같은 녀석은 살려 둘 가치가 없지!”
그러더니 사비강이 몸을 부웅 날려 다시 일권을 내지르는 것이 아닌가?
그의 주먹이 그대로 백성락의 안면에 날아가 꽂혔다.
퍼억!
“커억!”
백성락이 뒤로 날아가 나뒹굴자, 사비강이 얼른 쫓아가 발길질을 퍼부었다.
퍽!퍽!퍽!퍼퍽!
“큭! 억! 아악!”
백성락이 몸을 웅크리고 비명을 내질렀다.
“너희 사파 새끼들은 이렇게 정정당당하게 싸우면 전부 약해빠진 것들이지! 하지만 너희들은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않아! 늘 뒤통수만 치는 것들이지! 네놈들은 살 가치가 없다! 죽어라! 죽어! 죽어!”
퍽!퍽!퍽!퍽!
이쯤 되자 지켜보는 관람자들 역시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사비강을 응원하던 자들조차도 이미 승패가 가려졌기 때문인지 더 이상 환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곱지 않은 눈길로 사비강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만둬라!”
“무인으로서의 예를 차려라!”
하지만 사비강은 철저하게 철부지 도련님 역할에 충실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큰 그림을 위해서는.
사실 이곳에서 돈을 따는 것은 소기의 목적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 큰 그림을 위해서는 이곳 사람들의 심리를 들쑤셔 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들의 뇌리에 어떻게든 가득삼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것.
사비강이 철부지처럼 소리쳤다.
“시끄럽소! 사파 새끼들은 다 맞아죽어도 싸오! 우리 부모님이 그들에게 빚만 지지 않았어도…!”
말을 내뱉던 사비강이 입술을 질끈 씹고는 다시 백성락에게 분풀이를 하려는데,
“멈춰라!”
공동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워낙 웅혼한 내공이 담겨 있었기에, 몇몇 사람들은 그 자리에 쓰러져 비명을 질렀다.
사비강이 고개를 들어 보니 이 층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노인 하나가 보였다.
바로 흑천회주 갈천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