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99화 (99/670)

# 99

귀환 마교관

99화

정도맹의 총군사 구윤.

지금으로부터 이 년 후, 그는 본인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차기 정도맹주인 등왕패를 주인으로 섬기게 된다.

애초에 등왕패가 맹주의 자리에 오르면 제 발로 맹을 떠나려던 그였다.

하지만 등왕패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를 압박해 군사 직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실권은 천안각주 이사흠이 쥐게 되고, 구윤은 그의 꼭두각시 노릇만 하게 된다.

그의 지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조력자가 없는 곳에서는 지력으로만 만사를 해결할 수 없는 법.

그러나 그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정도맹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노력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등왕패가 그를 중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바로 마왕의 침공이 시작된 후.

위기에 빠진 중원을 구하기 위해 등왕패는 그제야 구윤에게 손을 내민다.

하지만 제아무리 뛰어난 지략가라지도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마계의 마수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을 짠다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썩어서 악취가 날 정도인 정도맹은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구윤은 사망한다.

생전 열망했던 것들을 단 하나도 이루지 못한 채 죽어 버린 불운의 천재.

시대가 외면해 버린 기재.

그가 바로 구윤이다.

하지만….

‘당신이 날 찾아온 이 순간, 그 미래는 바뀌었다.’

사비강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도박, 내가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 드리겠소.”

구윤의 표정이 흔들렸다.

별 것 아닌 말이었다.

그 정도 말 한 마디야 누가 못하랴?

하지만 사비강의 말에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정말 별 것 아닌 말 한 마디에 이상하리만치 그의 심장이 격동하고 있었다.

구윤이 사비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내가 뭘 바라는지 압니까?”

‘당연히 알지, 이 사람아.’

그 평생 염원했던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미래를 겪어 본 사비강은 그러한 내심을 숨기고는 대꾸했다.

“뭘 바라오?”

마치 그게 뭐든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랬기에 구윤은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아까 내게 물었지요? 외부의 적이냐, 내부의 적이냐. 나는 둘 다라고 대답했고. 하나, 내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아마도 내부의 적 때문이겠지.”

“…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외부의 적을 어찌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실 테니까.”

구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사비강이 이번에 외부의 적을 막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우긴 했다.

비밀 분타를 섬멸하고도 부당한 처분을 받고 있긴 하지만.

하나 거기까지다.

제아무리 뛰어난 고수일지라도 하나의 거대 조직을 혈혈단신으로 쳐부술 수는 없는 법.

천안각 보고에 따르면 혈사련의 규모는 이미 주의 단계를 넘어섰다.

정도맹이 나름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천랑단주는 멋대로 설치고 있지….’

다시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전투 규모가 제법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세운 전략은 단 한 건도 없다.

대부분 이사흠의 조언을 직접 듣고 등왕패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힘없는 정도맹주는 그저 등왕패의 뜻에 따르기만 할 뿐.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까지 천랑단이 패배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일전에 가천 분타는 확실히 섬멸했고, 어제도 일개 대를 궤멸시켰다는 보고를 받았다.

“다행히 이대로라면 외부의 적은 곧 정리가 될 테니….”

“크크크.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사비강이 불쑥 물었다.

구윤이 눈살을 슬쩍 구기며 보았다.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할 말 없지만.”

“내게 뭘 묻고 싶은 겁니까?”

“솔직하게 말해 봅시다. 군사께서는 천랑단이 얼마나 더 승전보를 이어 갈 것 같소? 내 생각에는 앞으로 두어 번이면 끝일 것 같은데.”

“……!”

구윤이 움찔거리고는 사비강을 보았다.

화가 나서가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들여다 본 것처럼 똑같이 말하고 있어서다.

사실 구윤도 그리 생각했다.

천랑단주 석지평은 단순한 자다.

거기에 욕망은 크다.

지금쯤 그는 연이은 승리로 한껏 자신감이 붙은 상태다.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하지만, 그는 그 반대 성격을 타고난 자다.

그리고 분명 그의 방심을 혈사련이 놓치지 않고 반격할 것이다.

이때 천랑단주에게 직언을 해 줄 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천안각주 이사흠도 지금 잔뜩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다는 게 문제지.’

자고로 군사는 감정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

사부가 항상 했던 말이다.

“군사의 자신감은 경험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매번 도출되는 계산에서 나오는 것이다.”

구윤은 그 말을 백번 공감했다.

오늘 이겼으니, 내일도 이길 수 있다는 건 무인이 가져야 할 태도다.

군사는 다르다.

그런데 그 부분을 사비강이 짚은 것이다.

물론, 사비강은 이미 겪어서 알고 있었다.

‘미래는 바뀌었어도 사람의 성격까지 바뀌는 건 아닐 테니까. 석지평의 경거망동이 조만간 화를 부를 것이다.’

사건이 달라도 상황이 비슷한 만큼 반드시 사달이 벌어지리라.

지난 생에서도 석지평은 자만심을 가지고 경거망동하다가 대패했었기에.

사비강이 말을 이었다.

“군사께선 이 싸움이 언제쯤 결말을 볼 것 같소?”

구윤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 년에서 오 년입니다.”

“헉.”

헛바람을 삼킨 건 매설란이었다.

천하의 정도맹이 이제 막 탄생한 사파 하나 때문에 사오 년을 허비한단 말인가?

혹시 계산을 잘못한 게 아닐까?

하지만 맹의 군사다.

그럴 리가 없다.

“어째서 그렇게나….”

매설란이 희미한 음성을 흘렸다.

구윤이 쓴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지요. 이건 단순한 싸움이 아닙니다. 혈사련은 많은 것들을 준비했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천안각에서 올리는 보고를 분석만 해도 그런 사실들이 보입니다.”

물론, 아무나 볼 수 없다.

올라오는 보고들의 행간을 읽어내고 추리해야만 보이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이 싸움은 정사대전으로 번질 겁니다.”

“아….”

매설란이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구윤의 말이 계속 됐다.

“하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다면, 이 전쟁은 이 년까지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부의 고름을 짜내야 한다.”

사비강이 말을 받았다.

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실로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오 년 걸릴 전쟁을 삼 년이나 단축시킬 수 있다는 계산.

누가 보면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오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비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 자신이 겪은 바로는 이 정사대전이 정확히 오 년 걸렸으니까.

오히려 구윤을 보며 은근히 감탄했다.

‘과연 기재는 기재로군. 겪어 보지도 않고 그 정도까지 계산을 해내다니.’

하지만 내부의 고름을 짜는 것은 그보다 까다로운 문제다.

“후후. 그래서 군사가 내게 하실 말씀은?”

“맹으로 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매설란은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사비강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맹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이오?”

“곪은 부위를 터뜨리고 짜내는 역할이지요.”

역시 짐작대로다.

하지만 사비강은 고개를 저었다.

“크크. 재미는 있을 것 같지만, 역시 사양하겠소.”

“어째서입니까?”

한 번쯤 거절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기에 구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다만 이어진 사비강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군사께서 너무 조급하기 때문이오.”

“내가 조급하다?”

“그렇소. 군사의 말씀대로 이제 막 전쟁이 시작된 마당이오. 강호의 모든 이목이 정도맹과 혈사련에 집중되어 있소. 그럴 때 갑자기 내부 감찰을 시작하시겠다면….”

“반발을 사겠지요.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리하겠다는 거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으니까요.”

전쟁이 끝난 오 년 뒤에는 이미 등왕패가 맹주의 자리에 앉아 있으리라.

사비강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감찰단 자체가 조직되지 않을 거요. 이미 곪을 대로 곪아 버린 곳에서 나 같은 녀석을 감찰단으로 인정하지도 않을 테니까.”

사실 그것도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어떻게든 우겨 본다면….

입술을 꾹 씹고 생각하던 구윤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어떻게든 우겨 본다니….

이게 군사가 생각할 수준인가?

‘과연 내가 급하긴 급했구나.’

쓴 웃음을 베어 무는데.

“뭐,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크크크.”

사비강의 음산한 웃음이 귓가에 날아들었다.

구윤이 고개를 들고 보았다.

“그건 무슨 말입니까?”

“군사께서는 생에 처음으로 감을 믿고 내게 도박을 걸었다고 하셨소. 그렇다면 정말로 날 믿고 제대로 걸어 보시오.”

“무슨…?”

“이 전쟁을 내가 일 년 안에 끝내드리겠소.”

“……!”

구윤은 물론 매설란도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구윤이 얼른 말을 붙였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현재 혈사련의 규모로 보나….”

“난 그들을 섬멸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저 이 전쟁을 끝내겠다고 말했을 뿐.”

“그 말은 공존을 하겠다는?”

“크크. 역시 이해가 빠르시군. 그렇소. 서로간의 맹약이 성립된다면 굳이 싸울 필요가 없지 않겠소?”

사파의 무리를 모두 섬멸해서는 안 된다.

마계의 침공이 시작되면 고수 한 명이 아쉽다.

그게 정파의 고수든, 사파의 고수든.

‘이것들이 미래에 어떤 일이 닥칠지도 모르고 말이야. 쯧.’

지금이야 정사가 나뉘어 칼을 겨누지만, 그때가 되면 하나가 되어 마계를 향해 칼을 겨누어야 한다.

‘물론, 그럼에도 사파 놈들 중에는 반드시 제거해야만 할 쓰레기들이 꽤 되지만.’

어쨌거나 전쟁을 중단시킬 수만 있다면, 구윤의 입장에서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그로서는 정도맹의 진짜 위기는 바로 썩어 가는 내부에 있다고 보았기에.

대외 세력을 잠재울 수만 있다면, 그것이 꼭 궤멸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무슨 수로….”

“거기까지 설명하기엔 너무 복잡하고. 어떻소? 도박해 보시겠소?”

“흐음. 그러나 사파가 공존하는 한 감찰단을 조직하기는 쉽지 않을….”

“아니. 그땐 그들이 날 먼저 찾도록 만들어야지. 크크크.”

구윤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부패한 세력들이 먼저 찾게 만들겠다고?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지금껏 그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현상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하나, 지금은 도저히 사비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비강이 내심 웃었다.

‘크크크. 너무 머리 굴리지 마. 어차피 당신이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니까.’

사비강이 말을 이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조건이라니? 난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구윤이 그리 생각하면서도 물어보았다.

“뭐지요?”

“일 년 후, 내가 감찰 업무로 가게 되면 조직은 내가 구성하겠소.”

“조직원을 어떻게 구성하려고….”

“현재 특목반 생도들이오. 그들을 감찰 조직으로 활용할 거요.”

구윤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생도들이라니요? 겨우 생도들로 구성해서는….”

“어차피 감찰 조직의 세가 약해 보이면 부패 세력들이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거부감이 덜하지 않겠소?”

“그야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는 감찰 조직이 너무 형편없어도….”

“그건 걱정 마시오. 그때까지 나는 내 아이들을 모두 절정 이상으로 만들어 놓을 테니까.”

“혹시 지금 나랑 농담하시는 겁니까?”

구윤이 진심으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비강이 진지하게 대화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자신이 보고 받은 바에 의하면, 특목반 생도들은 비약적인 무공 상승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제 일류 정도의 수준.

그런데 일 년 만에 절정으로?

‘내가 사람을 제대로 찾아온 건지 모르겠군.’

구윤이 피곤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사비강이 씩 웃었다.

“생도들 입장에서도 현장 실습이 될 테니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오. 그리고 부패 세력의 방심을 유도하기에도 좋을 테고.”

“끄음.”

구윤이 침음을 흘렸다.

그러다가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일 년 후에 정말로 전쟁이 끝날지 안 끝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이자의 말대로 될 거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이상하게 대화를 하다 보면 정말 이 사람의 말대로 흘러갈 것만 같다.

어떠한 논리도 계산도 결여되어 있는데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 년 후, 감찰 조직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니.

‘뭐, 이자의 말대로만 된다면야 내가 보지 못한 뭔가를 본 거겠지.’

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후후후. 잘 생각하셨소.”

사비강이 활짝 웃었다.

이제 판은 깔렸다.

다시 한바탕 설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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