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귀환 마교관
98화
“또 저 여자군요.”
매설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랜만에 용천관으로 돌아온 사비강을 이웃 마을 주루에서 만났다.
그런데 또 사비강은 한눈을 팔고 있었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지?’
매설란은 내심 불만이 샘솟았다.
자신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 한눈을 파는 남자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지금 사비강이 바라보는 저 여인은 아름다웠다.
죽립을 벗은 얼굴은 백옥처럼 희고 매끄러웠으며, 굴곡진 몸매는 검은 경장으로도 가릴 수 없을 만큼 빼어났다.
어디서 본 것 같더라니, 방금 기억이 났다.
음양쌍환사에게 가던 날, 그곳 인근 객점에서 본 여인이었다.
그날도 사비강은 어딘지 음흉한 시선으로 저 여인의 몸매를 훑었다.
하지만.
‘내가 더 예쁘지 않아?’
솔직한 그녀의 심정이었다.
실제로 주루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 다수가 그 여인보다는 매설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 남성들은 벌써 그녀에게 은근 슬쩍 다가와 말을 걸다가 퇴짜를 맞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음흉한 눈으로 저 여자만 보고 있잖아! 게다가 하룻밤을 같이 보낸 사이면서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매설란은 묘한 굴욕감을 느끼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뭐… 단순한 사고일 뿐이었지만. 그래, 그건 사고였을 뿐이지.’
마침 사비강이 불쑥 물었다.
“좀 어때? 상당히 괜찮은 것 같은데.”
매설란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어떠냐고요? 지금 그걸 저한테 묻는 거예요? 사 교관님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일부로 ‘교관님’이라는 호칭까지 붙이며 거리를 두었다.
사비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누구한테 물어봐?”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알아?”
“모르죠, 저도. 그렇게 궁금하면 저 여자에게 가서 직접 물어보시지 그러세요?”
사비강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
그제야 매설란은 뭔가 대화가 엇나갔다는 것을 눈치 챘다.
‘뭐야? 저 여자가 어떠냐고 물어본 게 아니었어?’
그녀의 머릿속에 질투심이 가득한 가운데 불쑥 질문이 들어와서 오해를 한 것이다.
“뱀탕을 먹은 것도 당신이고, 장신구를 착용한 것도 당신인데 그 효과를 왜 저 여자에게 물어봐야 하지?”
비로소 대략의 상황을 파악하자, 매설란은 얼굴이 홍시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비강이 말을 이었다.
“도움은 꽤 된 모양이군. 기도가 바뀐 것을 보면.”
역시 사비강은 자신의 무공 수위를 한눈에 파악했다.
그의 말이 틀림없었다.
한 달도 되지 않는 사이에 그녀의 무공은 놀랍도록 성장했다.
애초에 절정을 넘어선 실력이었지만, 그 절정에서도 한 단계 나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또 한 번 탄력을 받으면 무섭게 성장할 수도 있는 게 무공이다.
그야말로 일취월장(日就月將).
그 기반에는 사비강이 말하는 ‘뱀탕’과 장신구의 효능이 톡톡히 한몫을 하고 있었다.
특히 음양쌍환사는 음기와 양기를 대표하는 영물이다.
때문에 음양쌍환사를 달여 복용한 후로는 하루가 다르게 내공이 지속적으로 증강하고 있었다.
매설란이 먼 산을 응시하듯 고개를 돌리고는 툭 던지듯 말했다.
“뭐, 그건 좀… 고맙게 생각해요. 그렇다고 그걸로 계속 생색을 내면…!”
“생색내지 않았어. 잘 소화하고 있어서 대견하다고 생각했을 뿐.”
사비강의 말에 매설란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정말이지 하루 동안에도 수십 번 분위기가 바뀌는 남자다.
이럴 때는 꼭 오라버니 같다.
‘나 참.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매설란이 고개를 젓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저 여자 알아요?”
“대답하기 애매하군.”
아까부터 사비강은 검은 경장의 여자를 힐끔거리며 보았다.
분명 장신구를 구하러 갈 때, 객점에서 한 번 만났던 그녀였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다.
매설란은 분명 저 여자와 사비강 사이에서 뭔가가 있다고 짐작했다.
그리고 그 짐작은 맞다는 것을 사비강의 다음 말로 확신했다.
“저 여자는 내게 볼일이 있어.”
“그런데 왜 저러고 있는 거죠? 혹시 나를 의식해서?”
“크크. 그녀가 왜 당신을 의식해야하지?”
“그야….”
‘내가 너무 예쁘니까? 날 애인으로 생각할 테니까?’
막상 대답이 궁해진 매설란이 은근히 사비강을 노려보았다.
참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도 잘 던지는 남자다.
사비강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을 의식한 건 아냐. 그저… 날 주시하는 거겠지.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보려고.”
“도대체 저 여자가 누군데요?”
“궁금하면 가서 물어보자고.”
사비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매설란이 ‘어어?’ 하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런데 마침 사비강보다 한 발 앞서서 세 명의 남자가 그 여인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저자들?’
매설란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보았다.
‘철검방(鐵劍幇)’이라고 했던가?
철검방은 용천관에서도 그리 먼 지역이 아니었기에 그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 보았다.
정도맹에 속한 가문으로 강호 무인들 사이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방파였다.
그들은 조금 전 자신에게도 다가와 추파를 던지던 자들이었다.
물론, 매설란은 완곡한 사양으로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면서도 내심은 사비강에게 섭섭했다.
자신이 곤란한 처지에 놓였는데도 그는.
“인기가 많아서 좋겠군.”
이라는 말만 덜렁 던지는 게 아닌가?
적어도 대신 나서서 돌려보내 주지는 못할망정 비꼬듯이 말하다니!
어쨌거나 그런 철검방의 제자들이 이제는 검은 경장의 여인에게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사비강보다 한 발 앞서서.
마침 여인 앞에 다다른 무인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안녕하시오. 난 철검방의 대제자 풍운검(風雲劍) 호정곤(胡定坤)이라고 하오. 실례지만 여협의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소?”
“실례인줄 알면 묻지 마시길.”
물을 마시던 매설란이 하마터면 뿜어 버릴 뻔했다.
‘와, 세다.’
저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이야.
두 번이나 거절을 당해서일까?
아니면 여인의 태도가 너무 안하무인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결국 호정곤 옆에 선 무인이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말이 심하군! 대형께서 정중히 통성명을 하자는데 굳이 이럴 것까지 없진 않소!”
“두 번 말하지 않아. 꺼져.”
여인의 말투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결국 참고 있던 호정곤 역시 눈을 부라렸다.
“아무래도 내가 우스운 모양이군! 반반한 얼굴만 믿고 겁을 상실했구나!”
그가 다짜고짜 소리쳤다.
매설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저 찌질이들은? 곱게 술이나 처먹고 돌아갈 것이지.’
그때였다.
자신이 당할 때는 지켜만 보고 있던 사비강이 이번에는 호정곤의 어깨를 툭 치더니 한 마디 하는 것이 아닌가?
“좀 비키지?”
“넌, 뭐냐?”
“어이, 너도 철검방의 제자를 무시하는 것이냐?”
“여협께서 싫다고 하잖아.”
“이 자식이 아까부터 꼬박꼬박 반말을…!”
퍼억!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비강의 주먹에 얻어맞은 사내가 주루 이 층 난간을 넘어 밖으로 떨어졌다.
호정곤과 사제가 깜짝 놀라서 돌아보는데.
퍼퍽!
눈앞이 번쩍였다.
두 사람은 곧 주루 한쪽에 쓰러져 나뒹굴었다.
코와 입을 부여잡은 그들은 다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끙끙거렸다.
사람들이 모두 경악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다만 상황이 그 지경인데도 여인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마침 그 술잔을 사비강이 불쑥 잡았다.
‘헉, 저 남자 지금 뭐하는 거야?’
자리에 앉아 지켜보던 매설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제야 여인이 고개를 들어 사비강을 보았다.
사비강이 술잔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더니 씨익 웃었다.
“이만하면 시험에 통과한 것 아니오?”
여인의 표정이 일순 흔들렸다.
그녀의 눈길이 바닥에 쓰러진 두 무인에게 향했다.
“간도 크군요. 철검방의 제자들을 상대로.”
“후후후. 저들이 철검방의 제자가 아니라는 건 나보다 그쪽이 더 잘 알 텐데.”
일부러 사비강이 큰 소리로 말했다.
매설란 역시 영문을 몰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저들은 분명 철검방이라고 했는데.’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대화 내용은 거리가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사비강이 여전히 웃음을 띤 얼굴로 말했다.
“이제, 그만하고 가지.”
한참 입을 다물고 바라보는 여인.
그녀가 마침내 물었다.
“어떻게 알았죠?”
“내가 당신을 본 적이 있거든.”
“단지 그 이유로?”
“당신이 어디 소속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지.”
이번에는 여인이 정말 놀랐다.
사비강은 그 반응을 즐기듯 말했다.
“이래봬도 정보력이 좀 되어서 말이야.”
사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사비강은 이미 지난 생에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총군사 구윤의 호신위 비령.
바로 그녀였다.
음양쌍환사를 찾으러 갈 때는 비령을 보고 혹시나, 했다.
한데 이번에 보고 확신했다.
‘구윤이 나를 살피는구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다만 어렴풋이 짐작은 된다.
구윤이 자신을 직접 만나보려고 한다면, 자신이 겪었던 미래가 상당히 바뀌었다는 뜻이리라.
하긴.
혈사련의 비밀분타를 궤멸까지 시켰으니 호기심을 끌기엔 충분했으리라.
게다가 지금은 그 스스로 정도맹의 부패에 환멸을 느끼고 있을 테고.
비령이 죽립을 주워 들고 일어섰다.
“따라오시죠.”
“그전에 같이 갈 사람이 있는데.”
사비강의 시선이 한쪽에 앉아 있는 매설란에게 향했다.
**
‘이 사람이 정도맹의 총군사.’
매설란은 마주 앉은 사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곱상한 외모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내.
구윤에 대해서 말은 들어보았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사비강은 자신을 데리고 ‘비령’이라는 여인을 뒤따라왔다.
마을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객잔이었는데, 총군사가 이런 곳에 기거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만남이 은밀하다는 뜻이리라.
구윤은 그 나름대로 사비강을 보면서 뜻밖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고만 받았을 때는 상당히 괴짜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아닌가?
구윤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내가 사 교관님을 만나 뵙고자 한 것은….”
“외부의 적이요? 내부의 적이요?”
불쑥 말을 꺼낸 사비강.
구윤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단번에 사비강이 핵심을 간파한 것이다.
‘이자… 뭐지?’
비령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찾아올 것을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고 했다.
구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올 것을 알았습니까?”
“짐작만 했을 뿐. 그래도 그렇게 어설픈 시험을 할 줄은 몰랐소.”
철검방 제자들에 관한 말이었다.
사실, 그들은 철검방의 제자들이 아니었다.
사비강의 의협심을 시험해 보기 위해 구윤이 심어 놓은 자들이었다.
적어도 불의를 보고 참지 않는 자라는 게 확실해야 손을 뻗어 볼 만한 상대라고 여긴 것이다.
한데 사비강은 그 사실까지 간파하고 있었던 것.
‘과연 쉽지 않은 자구나.’
구윤이 피식 웃었다.
“때론 단순한 방법이 가장 효율적일 때도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내 의협심은 통과되었소?”
“이미 의도를 알고 있었으니, 그 시험은 무효겠지요. 다만 사 교관님과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둘 다입니다.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
구윤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솔직하게 말했다.
“뭐, 지금으로서는 총체적 난국이지요.”
“그런데 잘 알지도 못하는 내게 와서 하소연을 하신다?”
“내 인생 최초지요. 머리가 아닌 가슴에 따라 도박을 건 게 말입니다.”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그 도박, 성공하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