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귀환 마교관
94화
“출정이 취소됐다고요?”
정도맹의 총군사, 구윤(具倫)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잖아도 곱상해 보이는 외모가 그 바람에 더욱 앳되어 보였다.
천안각주 이사흠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정식을 가지던 날 사비강 교관이 용천관으로 복귀했다고 합니다.”
“다른 이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모두 구출됐다고 합니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구윤은 내심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구출단을 보내지도 않았는데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복귀했다니.
‘도대체 사비강이라는 그 자는….’
전부터 그에 대한 보고를 천안각으로부터 받고는 있었다.
하지만 천안각도, 구윤도 그에 대해 별로 집중한 적이 없었다.
그저 독특한 교관 하나가 용천관에 나타났구나, 하는 정도였다.
한데 지금 보니 가볍게 넘길 자가 아니다.
물론 천안각주인 이사흠의 생각은 달랐다.
‘당이협의 무공이 그만큼 대단한 거겠지.’
게다가 자신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귀야채 무인들과 생도들이 함께 급습한 것이었다.
운도 따랐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 사비강에 대해 별로 비중을 두지 않았다.
한편, 보고서를 살피던 구윤이 이사흠을 보며 물었다.
“현재 사비강 교관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몸은 이상 없습니다. 다만, 근신 처분을 받고 쉬는 상태입니다.”
“근신 처분을 내렸다고요? 무슨 이유로?”
“춘향제 도중 생도들에게 살상용 무기를 지급한 것과 담당한 생도들을 지키지 않고 독단 행동을 함으로써 납치까지 당한 것, 그리고 관칙을 어긴 생도들과 당이협, 매설란 교관 역시 근신 처분을 받았습니다.”
“흐음.”
구윤이 침음을 흘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저런 죄목을 갖다 붙이긴 했지만, 사실 천랑단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리라.
‘그토록 화려한 출정식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니….’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사흠의 시선을 의식해서 얼른 정색을 했지만 내심 고소하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사실 천랑단은 정도맹에서 완전히 독립적인 조직이었지만, 현재 차기 맹주로 주목받고 있는 벽력당주(霹靂堂主) 등왕패(藤王覇)의 손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디 그뿐이랴.
지금 자신에게 와서 보고하는 천안각 역시 등왕패가 쥐락펴락 하는 실정이니, 실상 정도맹의 실권은 벽력당주 등왕패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삼 년 전, 구윤이 스승으로부터 군사 직을 물려받고 나서 지금까지 줄곧 그랬다.
처음에는 이 부조리함을 바꾸고 곳곳에 썩은 부패를 청산해 보겠노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등왕패의 권세는 상상 이상이었다.
오랜 평화로 정도맹 내부는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어려서부터 ‘기재(奇才)’라고 칭송받은 그 역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감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앞에서는 웃어 보이고, 뒤에서는 칼을 가는 인간의 간사함은 그의 지식으로도 극복해내기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이제는 구윤 역시 타성에 젖어 흘러가는 대로 두고만 보는 실정이 된 것이다.
“혈사련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분타를 잃었으니 곧 보복 조치를 취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워낙 뜻밖의 사건이어서 곧바로 행동에 나서긴 어려울 텐데요.”
구윤이 정곡을 찔렀지만, 이사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사파 녀석들의 특징이 물불 가리지 않고 저지르고 보는 거지요. 아마 지금쯤 길길이 날뛰고 있을 겁니다. 이럴 때일수록….”
“지켜보는 것이 좋겠지요.”
구윤이 얼른 말을 가로질렀다.
이사흠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군사께서 아직 젊으시니 잘 모르시겠지만, 사파 잡종 놈들은 그리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탁!
구윤이 섭선을 접어 탁자를 내리쳤다.
그의 눈빛이 오랜만에 분노로 일렁였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젊어서 잘 모르는 게 뭔지 이 각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실언을 했습니다.”
이사흠이 고개를 숙였다.
구윤이 정색을 유지하며 말했다.
“천랑단을 귀환시키세요.”
“하나, 현재로서는 용천관에서 곧바로 혈사련의 또 다른 분타를 치려고 계획 중입니다.”
“그 계획은 대체 누가 세운다는 겁니까?”
원칙대로 하자면, 웬만큼 규모가 큰 작전은 군사의 직속 기관인 혜성각(慧星閣)에서 세워야 한다.
다만 규모가 크다는 기준이 애매모호한지라 정도맹에서는 그때그때 판단 하에 처리하고 있었다.
물론, 과거 정마대전이 펼쳐지던 시기였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만, 지금은 평화가 넘쳐흐르는 시기가 아니던가?
마침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등장했다.
하얗게 샌 머리카락에 강인한 표정, 얇은 입술과 길게 늘어진 수염이 인상적인 노인.
바로 정도맹의 공식 이 인자이자, 차기 맹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벽력당주 등왕패였다.
“내가 세운 계획이오.”
“등 당주….”
“그렇잖아도 군사의 허락을 받으려던 참이었소. 어떻소? 군사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아쉽지만 이대로 천랑단을 물리겠소.”
구윤이 등왕패를 바라보다가 체념한 듯 물었다.
“어딜 칠 생각이십니까?”
“가천(加川) 분타를 칠 생각이오. 그곳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천랑단만으로 충분히 피해를 줄 수 있다고 보고 있소.”
구윤의 시선을 받은 이사흠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가천 분타에 주둔한 혈사련 무인들은 이백도 채 안 됩니다.”
“어떻소? 허락해 주시겠소?”
등왕패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그 미소 이면에는 ‘네까짓 게 허락하지 않으면 어쩔 거냐? 이 등왕패와 패권 다툼이라도 해보겠다는 거냐?’라는 속셈이 숨어 있는 듯했다.
결국 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시지요.”
“하하하! 역시 군사께서는 알아봐 주실 거라 생각했소!”
잠시 대화를 더 나누던 이사흠과 등왕패가 돌아가고 나자, 구윤은 어두운 방에 홀로 남아 한숨을 지었다.
‘이미 등 당주의 세가 너무 깊어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이 단단한 부패 덩어리를 어찌 상대해야 할까?’
아서라.
또 헛된 망상을.
어차피 이 년 후 차기 맹주로 등왕패가 선출되면 자신은 쫓겨나거나 이사흠의 꼭두각시 신세가 되리라.
그렇잖아도 이사흠은 한참이나 어린 자신이 군사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 마음 편히 먹고 포기하자. 포기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어서는데 문득 한 사람의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사비강.
‘혹시 그자라면…?’
이 단단한 벽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비령(秘靈).”
불쑥 그의 입이 열렸다.
마침 허공에서 아리따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군사님.”
“사비강 교관에 대해 조사 좀 해봐.”
그의 말이 떨어지자 그녀의 기척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
탕!
매설란이 거칠게 탁자를 짚으며 일어났다.
“이게 정말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날선 목소리에 객잔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사비강이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자자, 진정하라고.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근신이라니! 하! 어이가 없어서! 우리에게 상을 줘도 모자랄 지경이라고요! 우린 혈사련의 분타 하나를 박살냈잖아요!”
“뭐, 어쨌든 관칙을 어긴 것도 사실이고…, 생도들이 위험했을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해요! 이게 다 그 뺀질거리는 천랑단주 때문이라고요! 석지평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우릴 제대로 물 먹인 거라고요!”
“뭐 어쨌든 덕분에 석 달간 푹 쉬면되니까 좋잖아?”
“참, 마음도 편해서 좋겠어요.”
매설란이 부루퉁하게 말하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이번에 받은 징계를 도저히 납득하지 못했다.
“그 뺀질이 녀석은 당신을 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요. 알기나 해요? 그 녀석 머릿속에는 온통….”
“어떻게든 줄을 잘 대서 정도맹의 요직을 얻어 보겠다는 생각밖에 없겠지.”
“바로 그거예요! 그런데도 그냥 참고만 있을 거예요?”
“안 참으면?”
“그야….”
“정도맹을 찾아가서 확 엎어버릴까? 크크.”
“그건 좀….”
이번에는 매설란이 얼른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왠지 사비강이 그렇게 말하면 진짜 말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았기에.
“정말 속상하다고요.”
매설란이 다시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워 근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아예 입을 헤 벌리고 쳐다보았다.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오히려 잘 된 거야. 자유 시간을 얻었으니까.”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예요?”
“물론이지. 사실 이런 자유 시간이 한 번쯤 필요했거든. 그리고….”
사비강이 말끝을 흐리며 한곳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곳에서는 죽립을 깊이 눌러 쓴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매설란 역시 그 시선을 쫓아 객잔을 나서는 여인을 본 뒤에 속삭였다.
“왜요? 아는 사람인가요?”
“아니. 그냥… 몸매가 좋아서. 크크크.”
“뭐라고요?”
매설란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객잔을 나선 죽립의 여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어디론가 걸어갔다.
“하던 말이나 계속 해보세요.”
매설란이 재촉하자 사비강이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았다.
“아까 말했잖아요. 자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다음.”
“아, 이제는 큰 그림을 그려야지.”
사비강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여인이 앉았던 자리로 향했다.
매설란이 미간을 팍 좁혔다.
“그 여자 몸이 그렇게 예뻤나요? 떠나고 난 빈자리까지 신경 쓸 만큼?”
“아, 뭐….”
매설란이 다시 한 마디 하려는데.
“그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이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매설란이 미간을 곱게 찡그렸다.
“뭐, 일단 그런 게 있어. 나중에 알게 될 거야.”
“흐음. 그나저나 지금 우린 어디로 가는 거예요?”
“보물찾기하러 가는 거지.”
“보물찾기라니….”
“말했잖아. 설란에게 선물을 할 거라고. 어쩌면 청혼할지도 모르지.”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지금! 하나도 재미없다고요!”
“어쨌든 조만간 선물을 할 테니 받기나 해.”
“이보세요. 지금 제 말은 듣고 있는….”
사비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매설란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따라 일어났다.
**
날이 저물었다.
숲속의 밤새가 울부짖었다.
이따금씩 뭔지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도 불쑥불쑥 들려왔다.
매설란이 사비강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점점 인적이 없어지고 있는 거… 기분 탓은 아니죠?”
“숲속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인적이 드물 수밖에.”
“언제까지 갈 거예요?”
“조금만 더 가면 묵을 곳이 있으니까. 일단은 걷자고.”
사비강은 꾸준히 산길을 따라 올랐다.
매설란은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뒤를 따랐다.
징계가 내려진 다음날 사비강은 자신을 불쑥 찾아오더니 함께 여행을 다녀오자고 했다.
칠주야 정도 걸리는 거리.
혼자 있어 봐야 기분도 울적할 것 같아서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오랜만이니까.’
매설란은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앞서가는 사비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저 남자만 보면 심경이 이렇게 복잡해지는 건지.
그녀는 낯선 감정에 혼란스러우면서도 이러한 관계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산을 올랐을까?
‘도대체 목적지가 있기나 한 건지….’
매설란이 내심 푸념을 하는 가운데 마침 저만치 불빛이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이런 곳에 집이 있다니 별 일이네.’
사비강이 그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봐. 묵을 곳이 있잖아? 오늘 밤은 저기서 신세를 좀 지자고.”
숲속에 외따로이 위치한 집에는 한 쌍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사비강과 매설란을 보더니 인심 좋게 방을 내주었다.
다행히 침상은 두 개였다.
사비강이 은자를 두둑하게 건네주었지만, 그마저도 받지 않겠다며 사양했다.
“누추하지만 편히 묵었다 가십시오.”
“고맙소.”
남자가 돌아가자, 매설란이 방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한적한 산속에 이처럼 번듯한 집이 있다니 별일이네요.”
“별일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겠지.”
“그나저나 아까 그 사람들은 정말 선남선녀였어요.”
매설란이 말한 그대로였다.
남자는 준수한 외모에 다부진 체격이었고, 여인은 매설란도 한 번 돌아볼 만큼 아름다운 얼굴에 매끈한 몸매였다.
“일단, 눈 좀 붙이자고.”
며칠 째 이어진 여정이다 보니 매설란도 더는 따지지 않고 잠자리에 누웠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사비강이 천천히 눈을 떴다.
매설란은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무색무취의 흡몽향(吸夢香)에 중독되었을 테니.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쥐고 천천히 문을 열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