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귀환 마교관
93화
사비강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기억나지?”
“…….”
“넌 이름도 모를 놈한테 뒈질 운명이라고. 그런데 그걸 내가 막아 주겠다고.”
“뭔 개소리를…!”
“그전에 내가 죽여 버릴 테니까.”
함가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혈옥에 갇혀 있어야 할 녀석이 어째서 여기에 있단 말인가?
“흥! 어찌됐든 상관없지! 네놈은 큰 실수를 한 거다. 혈옥을 나왔으면 그대로 달아날 것이지. 죽을 장소를 제 발로 찾아왔구나!”
“흐흐흐. 늙은이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여기서 죽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라니까.”
말을 마친 사비강이 손을 불쑥 뻗었다.
찰나.
슈우우우우웅!
콰장!
창문을 부수며 베르타스가 튀어나오더니 그의 손이 착 감기는 게 아닌가.
우우우웅!
베르타스가 몸을 부르르 떨며 공명을 일으켰다.
함가조가 미간을 팍 구겼다.
‘과연 저 망할 검이 보통 물건은 아닌가 보구나! 내 저놈을 처리하면 반드시 저 물건에 대해 알아보리라!’
너무 많은 일이 갑자기 일어났다.
졸지에 언벽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 상황에서 바깥이 소란스러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저 지랄 같은 검을 손으로 잡기도 난감했다.
그러던 중에 사비강이 나타나다니.
“오냐, 내 오늘 네놈을 자근자근 밟아 버리는 것으로 분을 풀어야겠다! 곱게 죽을 희망은 버려라.”
함가조가 으르렁거리더니 양손을 활짝 펼쳤다.
순간 알싸한 향이 퍼진다 싶더니 주변이 온통 암흑으로 변했다.
곧이어 그의 목소리가 천지에서 울려댔다.
“흐흐흐흐! 네놈이 나를 이겨낼 성 싶으냐? 이 함가조의 별호가 ‘환영야차’라는 것을 알고도 덤비다니! 한심하고 멍청한 놈!”
완벽한 암흑 속에서 사비강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론, 그런다고 보이는 것은 없다.
사비강이 천천히 베르타스를 들어올렸다.
어찌나 어두운지 들고 있는 베르타스 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함가조의 환영술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크흐흐흐! 이제야 알겠느냐? 네놈은 내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을!”
“좌절하고 절망해라! 네놈의 한계를 깨닫고!”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다. 널 영원한 지옥으로 빠트려 주마!”
사방팔방에서 함가조의 목소리가 가득 울려 왔다.
스스스스스스!
곧이어 어둠 속에서 함가조의 모습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 옆에 또 한 명, 또 한 명….
마침내 수십 명으로 늘어난 함가조가 사비강을 빼곡하게 에워쌌다.
“두려워하라!”
“절망의 늪에서!”
“죽음을 맛보아라!”
수십 명의 함가조가 저마다 한 마디씩 내던지니 천지가 울리는 듯했다.
뒤이어.
취리리릿.
스산한 기운과 함께 어디선가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렸다.
마침내 수백 마리의 뱀이 바닥을 미끄러지며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도 그 뱀들은 확실히 보였다.
취리리리릿!
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뱀들이 순식간에 미끄러져 오더니 사비강의 다리를 감아 가며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크크크! 어떠냐?”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다!”
“이곳에선 너의 내공이 완전히 차단될 것이다.”
“천천히 절망하며 죽어라.”
수십 명의 함가조가 비소를 지었다.
그런데.
“훗, 귀엽군.”
싸늘하게 읊조린 사비강.
다음 순간.
화악!
화르르르륵!
그의 몸을 둘러싸며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는 게 아닌가?
퀴리리리릿!
꿈틀거리며 기어오르던 뱀들이 순식간에 온몸이 불타며 나가떨어지기 시작했다.
시전자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화염을 발산하는 플레어(Flare) 마법이었다.
졸지에 뱀들이 모두 타죽자 함가조는 입을 척 벌리고 말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함가조가 일갈을 터뜨리며 비수를 날렸다.
“노옴!”
“죽어라!”
수십 명의 함가조가 일시에 비수를 뽑아 날렸다.
쒸쒸쒸쒸쒸에에엑!
수백 자루의 비수가 사비강을 향해 쏟아졌다.
그런데….
따다다다다다당!
매섭게 날아가던 비수가 사비강을 감싼 희미한 막에 부딪치며 튕겨 나갔다.
자신만만하게 웃던 함가조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막? 하지만 내공을 운용할 수 없을 진데…!’
물론, 사비강이 사용한 것은 기막이 아니라, 실드 마법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함가조로서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한 차례 요란한 소리가 울리고 나자 사비강이 히죽 웃었다.
“재롱은 다 부렸나?”
“뭐, 뭣이?”
“도대체!”
“네놈은!”
“정체가 뭐냐!”
수십 명의 함가조가 저마다 한 마디씩 꺼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비강이 나직이 뇌까렸다.
“글쎄… 아까부터 말했잖아. 널 죽일 사람이라고. 이름은 사비강. 이래봬도 어엿한 교관이지.”
“놈! 허세 부리지 마라! 네놈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날 찾아내지 못하는 이상….”
“맞아. 네 환술은 정말 칭찬해 줄 만하군. 이들 중에서 어떤 놈이 진짜 네놈인지 알 수가 없거든.”
“크크크! 그걸 인정하고도 그딴 개소리를 짖어대느냐?”
“하지만….”
“……?”
“이 녀석은 피 냄새를 귀신같이 잘 맡는단 말이야!”
우우우우웅!
대답이라도 하듯 베르타스가 어둠속에서 공명했다.
다음 순간.
쒸에에에엑!
사비강의 신형이 번개처럼 날아갔다.
그는 오로지 모든 감각을 베르타스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베르타스가 이끄는 대로만 움직였다.
찰나.
“멍청한 소리!”
“네놈은 절대로!”
“날 이길 수 없다!”
“죽어랏!”
쒸쒸쒸쒸쒸쒸쒸에에엑!
함가조의 고함소리에 이어 수십 자루의 비수가 다시 한 번 사비강에게 쏟아졌다.
따다다다다다당!
이번에도 비수는 보이지 않는 막에 부딪히면서 튕겨 나갔다.
경악에 찬 함가조의 외침이 비명처럼 들렸다.
“말, 말도 안 돼!”
“이건 있을 수 없어!”
하지만 그의 외침은 부질없었다.
쒸이이이익!
푸욱!
마침내 베르타스의 검신에 뭔가가 걸렸다.
살을 찢어내는 섬뜩한 감각이 검의 손잡이를 타고 사비강에게도 전해졌다.
사비강이 입매를 치켜 올렸다.
“크크크크. 찾았다.”
“이런… 거짓말 같은…!”
함가조가 몸을 부르르 떨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어둠이 주저앉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베르타스는 함가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연신 흡수하고 있었다.
함가조가 사비강과 눈을 마주쳤다.
“네놈은 도대체….”
“지겹도록 말했잖아. 미래에서 왔다고.”
“도대체 그 미래에 무슨 일이….”
“지옥도가 펼쳐진다. 그전에 내 손에 죽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라.”
츄아아악!
베르타스가 함가조의 옆구리를 찢어내며 튀어나왔다.
하지만 피는 튀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모든 피를 베르타스가 흡수해 버렸기에.
위이이이잉.
오랜만에 포식을 한 듯 베르타스가 흡족한 울음을 울렸다.
“그럼, 마무리해 볼까?”
사비강이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장내에는 혈향이 가득했다.
함가조가 사비강에게 죽임을 당하고, 분타주도 생도들의 합공으로 사망하자, 남은 무인들의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하앗!”
꽝!
“크악!”
쿠당탕탕!
마지막으로 남은 무인 하나가 곡보옥의 주먹을 맞고 벽에 부딪치더니 그대로 절명했다.
“후우, 후우, 후우.”
곡보옥은 심호흡을 하면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주먹을 보았다.
원래 도를 사용하던 그였다.
하지만 사비강은 자신에게 도법이 아닌, 권법을 권했다.
확실히 훨씬 잘 맞았다.
다만, 권법만 사용해서는 방어하기가 까다로운 만큼 몸 여기저기에 자잘한 상처가 남았다.
“흐음.”
지붕 위에 앉아서 장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사비강이 침음을 흘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곡보옥을 한참 바라보다가 곧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연우경과 염자량, 조문탁과 능소소 등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확실히 이렇게 보니 장단이 분명히 보이는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그가 당이협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인피면구(人皮面具)를 만들어 둬.”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남자 하나, 여자 하나.”
“알겠습니다.”
곧 당이협이 몸을 날려 어디론가 향했다.
인피면구는 실제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겨 만드는 가면이다.
이곳에는 시체가 즐비하니 충분히 만들 수 있으리라.
‘이제부터가 중요하지.’
마침 매설란이 그의 곁으로 사뿐 다가와 앉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앞으로 필요한 것들을 생각했지.”
“뭐가 필요한데요?”
“글쎄… 너무 많아서 일일이 말하기도 힘들군.”
매설란은 잠깐 사비강의 옆모습을 보았다.
볼수록 신기한 사람.
어떨 땐 한없이 가벼워 보이다가도, 또 이렇게 진중한 표정을 지으면 세상의 짐을 혼자 짊어진 사람 같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녀가 먼 산을 보며 툭 던지듯 말했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사비강이 피식 웃고는 매설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얼른 딴청을 피우며 물었다.
“왜, 왜 그렇게 사람을 빤히 보세요?”
“그러고 보니… 설란은 장신구를 하지 않는군.”
갑자기 이름이 불리자 매설란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그, 그런 건 귀찮으니까요. 무인이 장신구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혹시 내가 선물하면?”
“네?”
매설란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내가 선물하면 할 건가?”
“갑, 갑자기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지금.”
“하는 게 좋을 거야.”
“왜 내가 해야 하죠?”
“왜긴. 내 선물이니까.”
“뭐래는 거야? 정말.”
매설란이 허둥지둥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몸을 날려 버렸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사비강의 입매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
용천관 대연무장 앞에 삼백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열을 맞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 단상에는 천랑단주 석지평이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오늘 우리는! 사악한 사파 녀석들에게 납치당한 생도들과 교관을 구하러 간다! 그 사파 녀석들에게 우리의 힘을! 정도맹 천랑단의 힘을! 보여주도록 하라!”
“우와아아아아!”
천랑단 무인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인근 숲에 있던 새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그야말로 화려한 출정식.
석지평이 단상 위에서 온갖 화려한 언변으로 연설하는 데에만 한 식경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이 출정식을 멀리 태사전에서 지켜보던 주유천이 나직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요란하군요.”
“후후. 좋게 생각해 줍시다. 지금이라도 저들이 나서 준다는 것을.”
은기륭의 말에 주유천이 탐탁찮은 듯 대꾸했다.
“저자는 그저 이 기회에 정도맹의 요직을 한 번 노려보겠다는 욕망밖에 없는 듯합니다.”
“그렇더라도 두고 볼 수밖에. 하늘이 그의 손을 들어줄지….”
은기륭은 쓴 웃음을 지었다.
맹이 개입해 버린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때였다.
주유천과 은기륭의 눈이 반짝였다.
“저건…?”
“사비강 교관이 아닙니까?”
주유천이 놀란 표정으로 은기륭을 돌아보았다.
그의 말대로 용천관 정문으로 들어서는 자는 바로 사비강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뒤로 납치당했던 상필지와 생도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상필지는 몇몇 무인들에 의해 들것에 실려 옮겨지고 있었다.
은기륭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다시 피어올랐다.
“허허, 사비강 교관이 다시 한 번 재미있는 일을 벌이는구려.”
“설마 이렇게 빨리….”
주유천은 너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특목반 생도들이 관외 수업을 떠난 게 아직 칠주야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사비강과 함께 돌아오다니!
그의 가슴이 마구 뛰었다.
언제나 규칙과 질서의 틀에 얽매여 있던 그가 처음으로 느끼는 묘한 희열이었다.
‘사비강, 자네는 도대체…!’
참 별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별종이 학관의 분위기를 조금씩 바꿔 놓더니, 이젠 자신의 원칙마저 흔들고 바꿔 놓았다.
그리고 그 격동이 이제는 정도맹까지 미치려 한다.
출정식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엇? 저기… 사비강 교관 아냐?”
“맙소사! 상필지 교관님도 같이 오고 있잖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오늘 구출단이 출발하려고 하는데…?”
“생도들도 모두 멀쩡히 돌아왔어!”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요란한 출정식을 치르던 석지평은 여간 민망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 그대는…?”
석지평이 얼른 달려가자, 사비강이 뭔가를 휙 던졌다.
툭,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는 것은 백토, 함가조의 머리였다.
“하도 안 와서 그냥 내 발로 돌아왔다. 이 개새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