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귀환 마교관
90화
은기륭은 태사전 오 층 창가에서 뒷짐을 진 채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핏빛처럼 붉은 노을이 하늘을 온통 물들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하릴없이 바라보는데, 마침 그의 뒤에서 주유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관들의 불만이 점점 고조되고 있습니다.”
“흐음.”
은기륭은 가만히 침음을 흘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주유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 교관과 생도들이 납치된 장소가 밝혀졌습니다. 벌써 그게 칠주야 전입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던가?”
은기륭의 대꾸에 주유천이 미간을 팍 구겼다.
“관주님!”
“허허, 성내지 마시게. 잘 듣고 있네.”
“이대로 두고만 보실 겁니까?”
“그럼, 어쩌겠는가?”
“저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용천관에서 자체 조직을 꾸려 구원조를 보내….”
“정도맹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자는 건가?”
“하지만 천랑단이 꿈쩍도 하지 않으니…!”
“그렇다고 정도맹과 싸울 수는 없지 않겠나?”
주유천이 주먹을 꽉 말아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은기륭의 지적이 온당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정도맹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용천관이 상부 지시를 어기고 임의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주유천이 긴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썩어도 너무 썩었습니다.”
“허허. 맹의 부패가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이대로면 사비강 교관과 상필지 교관의 목숨마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도들도 마찬가지지요.”
“그렇겠지.”
은기륭의 눈빛이 깊어졌다.
주유천이 일말의 희망을 안고 넌지시 말했다.
“그러니 그들 모르게라도 구원조를….”
하지만 은기륭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깊어진 눈으로 주유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네가 그 일을 맡을 수 있겠는가?”
“…….”
“원리원칙만을 고수하던 자네가 그 규칙을 깨고 할 수 있겠나?”
“그건….”
주유천이 미간을 좁히고는 말끝을 흐렸다.
모르겠다.
어떤 것이 옳은지.
지금까지 원리원칙만을 따지며 살아왔다.
한데 이상하게도 그 사비강 교관이 설치기 시작한 후로 자신의 기준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은기륭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목소리에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자네 말대로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납치된 사람들의 목숨이 위험할 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정도맹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희생이 아니겠는가?”
“관주님…!”
주유천이 흔들리는 눈으로 은기륭을 보았다.
은기륭은 다시 뒷짐을 지고는 창가로 걸어갔다.
‘무서운 분이다. 그토록 온화한 인상 속에서 그런 계산을 하시다니.’
은기륭은 먼 산을 바라보았다.
‘나로선 그렇다네. 정도맹이 제자리를 찾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그들의 죽음도 나쁘지 않다고 보네. 다만….’
은기륭이 주유천을 힐끔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자는 그리 쉽게 죽지 않을 걸세.”
**
탕!
매설란이 책상을 내리쳤다.
“도대체 뭐가 문제죠? 왜 꿈쩍도 하지 않느냐는 말이에요?”
“하하. 진정하시오. 매 소저.”
“그렇게 부르지 마시죠! 저도 어엿한 교관이니까!”
매설란은 소리치면서도 잠시 흠칫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가 자주 하던 말이네.’
책상 너머에 앉은 석지평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맹의 일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아서 말이오.”
“도대체 뭐가 간단하지 않다는 거예요? 보세요! 납치 장소가 밝혀졌으니, 단주께선 천랑단을 이끌고 그들을 구하고, 보복 공격을 감행하면 끝! 이게 그렇게 복잡한 일인가요?”
“하하, 그럼 내가 물어보겠소. 그 정보를 물어다 준 자가 누구요?”
“그야….”
대답을 하려던 매설란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거였나…?’
귀영부는 사파에 속하는 조직이다.
한데 정도맹을 돕는다는 것이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으리라.
석지평이 그것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보시오. 사파 나부랭이들이 우리 정도맹을 돕는다며 정보를 제공해 왔소. 이걸 우리가 덥석 물어서 쫓아가면 어찌되는 줄 아시오?”
“하지만 그들은 사비강 교관에게 빚을 갚으려고….”
“사비강 교관이 사라진 마당에 그 말을 어떻게 믿소? 나는 사파 잡종들의 말을 믿느니 지나가는 개소리를 따라 가겠소.”
“천안각은 뭘 하고 있나요? 칠주야가 지났어요! 이 정도면 천안각에서도 그 정보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있을 텐데요?”
“물론이오. 그대 말대로 천안각은 이미 정보의 진위 여부를 파악했소.”
“뭐라고요? 그럼, 그 정보가….”
“뭐, 정보는 진짜로 확인됐소.”
“그런데 왜 이러고 있는 거예요?”
“정보가 진짜니까 더욱 조심하는 거요.”
“그게 지금 말이에요?”
“보시오, 매 소저…. 아니, 매 교관. 정보가 진짜인 만큼 적들의 함정일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소? 만약 그게 함정이라면 우리 천랑단은 위기에 빠지게 될 테고, 우리 천랑단이 전멸이라도 하게 되면 정도맹은 큰 타격을 입는 거요.”
매설란은 열불이 뻗쳐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고도 백리세가와 태천문이 가만히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 그 부분은 걱정 마시오. 정도맹에서 사람을 보내 충분히 위로를 해주었소. 두 문파에서도 이쪽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소. 이럴 때일수록 분열보다는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소?”
매설란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이 썩어빠진…!’
얼핏 듣긴 했다.
정도맹에서 상당한 위로금을 두 문파에 지급했다는 이야기를.
물론, 자식을 잃은 백리세가는 그러고도 한동안 복수를 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홀로 내는 목소리는 힘이 약하기 마련이다.
태천문은 위로금을 받고 나서 굳이 일을 크게 만들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만약… 납치된 생도가 연우경이나 목단화였어도 이렇게 나왔을 건가요?”
“그게 누구… 아, 패검연가와 섬검목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군. 뭐, 사실대로 말하리다. 그랬다면 지금쯤 사파 녀석들은 숨도 쉬지 못했을 거요. 이미 우리가 치고도 남았을 테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보시오, 낭자… 아니, 매 교관. 그대답지 않게 왜 이렇게 순진하게 구시오? 우리 적당히 합시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과 그 흐름에 따라서 적당히 흘러가자는 말이외다.”
매설란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기서 이런 놈에게 더 따져봐야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석지평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매설란 곁으로 다가오더니 은근하게 허리 쪽으로 손길을 뻗어 왔다.
“너무 심려 마시오. 그대가 그토록 원한다면 내가 좀 더 힘을 써….”
매설란의 손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음?”
석지평이 다소 기대하는 얼굴로 매설란을 보았다.
매설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피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이 손 조심해.”
“아… 하하….”
매설란이 그의 손을 휙 뿌리치고는 걸음을 돌려 나왔다.
석지평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여자들이란….”
**
사람들은 그를 ‘마수괴(魔手怪)’라고 불렀다.
그야말로 마귀의 손을 가진 괴물.
그의 손에 맡겨진 자는 대부분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미쳐 버리거나 결국 죽어 버렸다.
그 처참한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마수괴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꺼렸다.
물론, 그와 늘 만나야만 하는 간수들은 제외였다.
그들은 마수괴가 고문할 때만 아니라면 아이처럼 순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커다란 화로를 들고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마수괴를 보고 간수장이 불쑥 말을 걸었다.
“이봐, 도대체 몇 번째야? 화로만 몇 개째 들여다 놓느냐고.”
“상, 상관 마. 내, 내 맘이야.”
“그야 물론 네 맘이겠지만, 살살 하라고. 그러다가 사람을 숯으로 만들어 버리겠어.”
“흥!”
마수괴는 콧방귀를 끼고는 성큼성큼 혈옥동(血獄洞) 입구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좌우로 늘어선 옥을 계속 지나쳐 가장 깊숙한 곳에 다다라서야 멈춰 섰다.
끼이이익.
듣기 싫은 마찰음과 함께 옥문이 열리자, 그 안에 사지가 묶인 채 매달려 있는 사비강의 모습이 나타났다.
“크크크. 오셨는가?”
사비강이 고개를 들고 웃었다.
반면 마수괴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 버렸다.
표정만 보면 누가 고문하는 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마수괴가 터덜터덜 걸어 들어가서는 화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화로 안에 숯을 더 집어넣은 그가 새로 챙겨 온 인두를 담갔다.
“이, 이번에는 기대해도 좋아. 반, 반드시 너의 비, 비명 소리를 듣고 말 테니까.”
“크크크! 멍청한 놈.”
“누, 누가 멍청하다는 거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냐?”
“아, 아니야! 난 안 멍청해! 멍, 멍청한 건 너야!”
사비강이 피식 웃더니 마수괴의 말을 흉내 냈다.
“멍, 멍청한 건 너야.”
“따, 따라하지 마!”
“따, 따라하지 마!”
“이익! 짜증나는 놈!”
“이익! 짜증나는 놈!”
결국 마수괴가 화를 참지 못하고 인두를 꺼내 들었다.
“좋, 좋아. 두, 두고 보자!”
마수괴가 사비강의 가슴에 인두를 들이댔다.
그 순간.
“크아아아아악!”
사비강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수괴가 희열에 찬 표정으로 웃어댔다.
“흐히히힉! 역, 역시… 역시 아프지? 많, 많이 아파? 흐히히힉!”
“크아아아악! 으아아아… 아아… 뭐, 이 정도면 됐나?”
사비강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차분해졌다.
마수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치이이익.
사비강의 살에 닿은 인두가 빠른 속도로 식어 가고 있었다.
“뭐, 뭐야? 이번에도 또!”
“크크크. 그래도 네가 듣고 싶어 하는 비명은 들려줬잖아? 안 그래?”
짜작. 짜자자작!
인두가 얼어 갔다.
화들짝 놀란 마수괴가 얼른 손을 놓고는 인두를 발로 걷어찼다.
땡그랑!
“으으, 추워!”
마수괴가 양팔을 끌어안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문실 한쪽에는 화로가 여섯 개나 나뒹굴고 있었다.
모두 꽁꽁 얼어붙은 상태였다.
방금 가져온 화로도 어느새 그렇게 얼어 있었다.
마수괴가 사색이 되어 주저앉아 버렸다.
“나, 난… 죽을 거야.”
그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고문을 하다가 실수로 요인을 죽이거나, 고문 실력이 변변치 못해서 보름 안에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할 경우.
백토는 어김없이 고문관을 죽여 왔다.
그 피비린내 나는 현장에서 끝까지 살아 남은 자가 바로 마수괴였다.
한데….
이 독종은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
손톱을 뽑으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고, 채찍을 휘둘러도 몸에 닿지 않는다.
인두를 가슴에 지져도 거짓말처럼 식어 버리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공진철을 사용해 구속했으니 내공을 운용하는 것도 아닐 것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상부에 보고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자신의 고문 실력이 형편없다며 죽여 버릴까 봐 입만 다물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쩌면 좋지? 이래서야 이 녀석은 묶여 있지만 묶여 있다고 볼 수도 없잖아. 혹시 이 녀석,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여기서 나갈 수도 있는 것 아냐? 그렇다면 왜 안 나가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수괴는 더럭 겁이 났다.
그때.
“야.”
“우아아악! 뭐, 뭐, 뭐냐!”
“뭘 그렇게 놀라고 지랄이야.”
“왜, 왜 불렀어!”
마수괴가 주먹을 쥐고 싸움이라도 할 것처럼 경계했다.
사비강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배고프다. 먹을 것 좀 가져와라. 그럼 살려 줄게. 다녀오는 김에 심부름도 하나 해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