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귀환 마교관
87화
“다들 여기 옹기종기 모여 있었군.”
사비강이 주변을 휘이 둘러보다가 생도들의 시체를 확인하고는 미간을 슬쩍 구겼다.
“이런 짓을 잘도 저지르고 말이지.”
그의 전신에서 막강한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언벽과 흑호가 뒤로 주춤 물러났다.
‘뭐, 뭐야? 이 녀석은?’
흑호의 표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일그러졌다.
점점… 점점 올라간다.
내공 수위가 계속 올라간다.
흑호보다 더 놀란 사람은 언벽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교관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사비강이 이처럼 심후한 내공을 지녔을 거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이 녀석… 뭐야? 내가 알던 그 사비강이 맞나?’
이래서야 천세명이 사비강을 의식한 게 우스울 지경이 아닌가?
지금 사비강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감히 천세명 따위가 대들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놀라웠다.
[용천관에 이런 자가 있었소?]
[‘사비강’이라는 교관이오. 이자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교관이었소.]
[밀선을 잡았다는 그….]
[바로 그렇소. 하지만 나도 이자의 내공 수위가 이 정도일 줄은….]
언벽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비강의 기도는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간신히 버티고 서 있던 상필지가 피식 웃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뭐야? 저 녀석은… 애초에 내 상대가 아니었잖아?’
맥이 탁 불렸다.
사비강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아니, 그에 대해서 알긴 안 건가?
한편, 사비강은 죽어 나자빠진 생도들을 보고 처음으로 분노를 표현하고 있었다.
“뭐하냐? 안 오면 내가 먼저 간다.”
꿀꺽.
언벽과 흑호가 동시에 마른 침을 삼켰다.
마주 서 있는 것만으로 이렇게 오금이 저려오게 하다니.
[이자의 기도만 보면 이미 초절정의 수준을 넘어섰소!]
[나도 보고 있소.]
언벽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이런 막강한 놈을 바로 옆에 두고도 몰랐다니.
이렇다면 혈사련의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
찰나.
파핫!
사비강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엇?”
빨라서 보이지 않는 것과 다르다.
그냥 사라졌다.
그리고 눈을 깜빡하기도 전에 사비강은 흑호 앞에 번개처럼 나타났다.
“허억!”
흑호가 기겁을 하며 칼을 들어 올렸다.
쉬이이이이잇!
쩌어엉!
한 손으로 쥐고 내려친 베르타스를 흑호가 양손으로 도를 받쳐 들고는 막아냈다.
“크억!”
부들부들.
양 팔이 부서져 나갈 듯했다.
다음 순간.
퍼카앙!
흑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순식간에 그의 도가 산산이 부서지며 흩어졌다.
베르타스에서 한기가 풀풀 휘날렸다.
‘강기인가!’
흑호가 충격 속에서 애써 추측하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 틈을 타서 언벽이 빠르게 쇄도하며 검을 내질렀다.
“사비가앙!”
턱.
언벽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이, 이 무슨…!’
사비강이 옆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언벽의 검신을 움켜잡는 것이 아닌가?
언벽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아주 기분 나쁜 꿈을.
하지만 곧 이어진 상황으로 인해 그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꽈자자작. 짜자자작!
사비강의 손에 잡힌 검신이 쩌적, 소리를 내며 새하얗게 얼어 가는 것이 아닌가?
‘설마 이건 빙백신공(氷白神功)인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물론, 그것은 빙백신공이 아닌 ‘프로스트 포스(Frost force)’라는 마법이었다.
대상을 순식간에 얼려 버릴뿐더러, 주변의 공기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극냉 속성의 마법.
때문에 언벽이 내쉬는 숨결마저 하얗게 얼면서 바닥으로 떨어질 정도였다.
언벽이 얼른 입을 닫았다.
자칫 폐가 얼어 버릴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판단은 옳았으나, 다음 순간 그는 헛바람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카차아앙!
그의 검신이 이번에도 산산조각 나며 부서져 나간 것이다.
뒤이어.
퍼엉!
사비강의 일장이 그의 가슴에 작렬하면서 언벽의 몸이 포탄처럼 날아가 나무 기둥에 처박혔다.
쿠당!
“커헉! 쿨럭!”
시뻘건 핏덩이가 한 움큼 토해졌다.
“이, 이럴… 수가!”
그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가 한 걸음 내딛는데.
“크윽!”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생각보다 내상이 심각했다.
내장 일부가 얼어 버린 데다가 내상까지 깊어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어려웠다.
찰나.
“흐아아아압!”
흑호가 사비강의 측면을 노리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이었다.
사비강은 그가 당도하기도 전에 그저 손을 스윽 들어 올릴 뿐이었다.
다음 순간.
구구구구구구궁!
“크엇!”
흑호가 갑자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면서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그의 발이 땅속에 깊이 파묻혔다.
천근추 무공을 사용했을 때만큼이나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비티 마법이었다.
“크으윽!”
흑호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젠장, 뭐가 이리 무거운…!’
이 세상의 모든 공기가 자신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뒤이어.
슈우우욱!
사비강이 눈앞에 나타났다.
흑호는 절망했다.
사비강의 주먹이 그대로 안면을 강타했다.
퍼억!
“커억!”
흑호의 몸이 뒤로 날아가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쿠당탕탕!
“끄으어어어.”
그는 안면을 쥐고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절망뿐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사비강이 그의 멱살을 쥐고는 일으켜 세웠다.
“네 잘못을 알겠나?”
“좆이나… 까라.”
“우선 언어 교정부터 해야겠구나.”
무심하게 읊조린 사비강이 단도를 꺼내들고 휙 저었다.
피츗!
“크아아아악!”
흑호의 양쪽 입가가 찢어지면서 턱이 쩍 벌어졌다.
사비강이 던지듯 놓아주자 흑호는 입을 부여 쥐고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으으으으읍!”
사비강이 흑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끄으으으읍!”
“잘 알았다.”
사비강이 대충 말을 뱉고는 베르타스를 들어올렸다.
그 순간.
“그만하지 그러나?”
늙수레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작은 몸집에 하얀 토끼 가면을 쓴 자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비강이 눈살을 구겼다.
“넌, 뭐냐?”
“백토라고 하네. 그자를 그만 놔주게나.”
“꺼져라.”
“허어, 이것 참. 말이 안 통하는 자로군.”
따악.
순간 백토가 손가락을 튕기니, 사방팔방에서 검은 천을 친친 감은 환살단 무인들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 수가 무려 이백에 달하니 숲을 빽빽하게 채운 느낌이었다.
백토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아무리 강해도 이들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을 걸세.”
사비강이 날카롭게 환살단을 훑었다.
백토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핑!
백토가 손가락을 다시 튕기자, 한 줄기 빛이 날아가면서 낭아반 생도인 노치은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피츗!
노치은의 뺨에 선혈이 죽 그어지며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계속해서 반항하겠다면, 저 아이들은 나도 책임질 수 없네. 아마 다음엔 내 탄지공(彈指功)이 빗나가지 않을 게야.”
“이 비열한 새끼들!”
불쑥 소리친 사람은 바로 상필지였다.
하지만 그는 곧 등 뒤에 나타난 환살단 무인에 의해 점혈을 당해 기절하고 말았다.
상필지의 기력이 다한 것도 문제였지만, 애초에 환살단 무인들의 기척이 그만큼 은밀했다.
사비강이 싸늘한 눈초리로 백토를 응시했다.
마침내 베르타스를 거둔 그가 몸을 돌렸다.
“크크크.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군.”
백토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또 무슨 짓을 해보겠다는 건가?”
“그건….”
사비강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환살단 무인들이 저마다 자세를 고쳐 잡으며 기습을 가할 준비를 갖춰 갔다.
백토 역시 천천히 도의 손잡이를 움켜잡아 갔다.
마침내 사비강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항복이다.”
“음? 뭐?”
“항복하겠다. 대신 생도들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도록.”
그제야 백토의 안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후후후. 잘 생각했네. 사실 우리도 이만저만 손해 본 게 아니어서 말이야. 그리고 자네에게 궁금한 것도 꽤 많고.”
백토가 턱짓을 하자, 요신을 비롯한 환살단 무인 몇이 사비강 곁으로 홀연히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감은 것과 같은 검은 천으로 사비강의 몸을 꽁꽁 묶기 시작했다.
백토는 쓰러진 언벽과 흑호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일을 어렵게 만들었소.”
“면목 없소.”
적사인 언벽이 고개를 숙였고, 흑호 역시 흙이라도 씹은 표정이었다.
“뭐, 일단 돌아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말을 마친 백토가 뒷짐을 진 채 몸을 돌렸다.
**
반 시진 후.
사비강이 있었던 그 장소에 한 무리의 무인들이 내려섰다.
학장 주유천을 비롯한 용천관 교관들이었다.
당이협과 매설란도 함께였다.
그들은 주변을 살피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끄으음.”
주유천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사망한 생도는 열 명이 넘었다.
꽈악 말아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교관 중 한 명이 다가왔다.
그는 생도들에게 추적술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마지막 싸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 생도들은 낭아반 아이들 같은데… 상필지 교관은?”
“사체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생포 당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놈들…!”
주유천이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마침 그의 눈길이 한곳에 머물렀다.
“저자는 누군가?”
그가 가리킨 곳에는 흑살대주 조량의 사체가 있었다.
하지만 베르타스에 의해 머리통이 완전히 쪼개진 시체를 보고 그 정체를 알아내기란 쉽지가 않았다.
교관들이 우물거리는데, 마침 뒤에서 힘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자는… 흑살대주 ‘조량’이라는 자입니다. 무위는 절정 고수였습니다.”
이곳으로 오던 중 발견한 소섭랑이었다.
마침 교관 하나가 말했다.
“아무래도 상필지 교관이 처리한 모양입니다.”
“아닐 겁니다.”
소섭랑 말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그를 죽인 자는 아마도… 사비강 교관일 겁니다.”
“그게 대체 무슨…! 그자가 어떻게 절정 고수를 상대한단 말이오?”
“그렇소! 상필지 교관이 아니고서야….”
교관들이 반발했지만 소섭랑은 주장을 꺾지 않았다.
“아뇨. 상필지 교관님은 그를 상대할 여력이 없었을 겁니다. 제가 본 사비강 교관님은 절정을 충분히 넘어선 고수였습니다.”
“……!”
교관들이 저마다 입을 척 벌렸다.
주유천도 마찬가지.
‘사비강 교관이 그 정도로…?’
물론, 사비강의 특이한 행보를 관심가지고 지켜보긴 했다.
하지만 그가 절정 고수를 가볍게 다룰 정도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교관 하나가 나직이 일렀다.
“아무래도 소섭랑 부교관이 심하게 다쳐서 상황 파악에 어려움이….”
“제가 다치긴 했으나, 그 정도로 정신이 혼미하진 않습니다.”
소섭랑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주유천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오. 사비강 교관과 상필지 교관, 그리고 이곳에 살아 있던 생도들이 모두 납치당했다는 거요. 문제는 그들이 어디로 납치를 당했는지도 알 길이 없다는 거지.”
그때였다.
“그건 문제가 없습니다.”
낯선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그곳에 모여 있던 무인들이 모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웬 놈이냐!”
마침 나무 아래에서 스르르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