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귀환 마교관
84화
“이 잡것들, 죽여 버린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망절소가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파치지지지짓!
염자량의 손에 또 다시 새하얀 기운이 맺히는 게 아닌가.
점점 굳어져 가는 그 기운은 곧 얼음덩어리로 화해 버렸다.
망절소는 물론, 곁에 서 있던 연우경까지 놀라서 입을 척 벌렸다.
‘쓰란다고 정말 또 쓸 줄이야.’
연우경이 내심 놀랐다.
사실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염자량은 틀림없이 그 원리를 몸에 또렷하게 각인한 것이리라.
자신이 썼던 마법과는 다르다.
사비강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자신이 사용한 마법은 실드다.
일종의 보호막.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이후로 실드를 사용하려고 하면 좀처럼 되지 않았다.
은연중에 기막을 펼치는 원리와 비슷하게 운기해 버리는 게 문제였다.
‘실드’라는 이름을 알고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었다.
“네가 초식을 쓸 때, 초식 명을 아무리 외쳐 봐야 초식이 저절로 나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이나 시동어가 아니라 그 원리다. 시동어는 그저 의지의 표현일 뿐이다.”
사비강이 해준 말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실드를 쓸 수 있도록 촉매 역할을 해준 것은 바로 자존심이라고 했다.
비무에서 절대 지기 싫다는 강렬한 의지.
하지만 염자량은 다르다.
한낱 자존심이 아니라, 생사의 기로에서 떠올린 기적이다.
마차에 깔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어미가 마차를 들어 올리는 기적을 일으키듯.
절체절명의 순간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니 몸이 아직까지 잊지를 않는다.
연우경의 추측은 정확했다.
염자량이 사용한 마법은 바로 아이스볼트(Ice Bolt)였다.
1서클의 공격 마법 중에서도 하필 아이스볼트를 사용한 것은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것만이 가슴에 붙은 불을 끄고, 상대를 공격해서 죽음을 피할 유일한 수단이었기에.
어쨌거나 그런 과정을 통해 염자량의 손에는 지금 새하얀 얼음덩어리가 뾰족한 날 모양으로 떠 있었다.
거침없이 달려들던 망절소가 급하게 멈춰 섰다.
‘저, 저게 도대체 어디서…?’
귀신이 곡할 노릇.
분명 아무것도 없던 손에서 갑자기 얼음 화살이 생긴 게 아닌가?
게다가 지금 날씨가 얼음이 얼 만큼 추운 날씨도 아니다.
어쨌거나 저 공격에 한 번 당했던 망절소였기에 그 역시 섣불리 덤비지는 못했다.
“너 이 새끼… 그거 안 내려놔?”
망절소가 주춤거리며 말했다.
염자량이 자신의 손을 멀뚱멀뚱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원한다면, 뭐.”
휙, 쒸에에엥!
까앙!
매섭게 날아간 아이스볼트가 망절소의 칼에 튕겨 날아갔다.
“이 개새끼! 죽여 버린다!”
망절소가 다시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이제 염자량의 손에 들린 얼음 화살도 없애버렸으니 거리낄 것은 없….
파지지지짓!
망절소가 다시 급히 멈춰 섰다.
“이런 씨부럴 놈! 도대체 뭔 사술을 부리는 것이냐! 그 얼음 덩어리는 도대체 어디서 자꾸 꺼내는 거냐!”
“그게… 나도 잘 모르겠는 걸?”
염자량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흥! 그딴 잔재주로 날 상대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버려라!”
마침내 망절소가 바닥을 차고는 쏘아져 나갔다.
쒸이이잇!
까앙!
이번에도 아이스볼트가 망절소의 칼에 튕겨 나가고 말았다.
사실 아이스볼트가 망절소의 입장에서 무척 생경한 공격이긴 했지만,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봐야 1서클에 불과했기에 직격을 당하면 몸에 피멍이 드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물론 운이 없다면 뼈가 부러질 수도 있겠지만.
순식간에 염자량 앞에 다다른 망절소가 다시 칼을 휘둘렀다.
쉬이이이잇!
염자량이 얼른 뒷걸음질을 치며 칼날을 피했다.
망절소가 그대로 염자량을 쫓았다.
하지만 그는 염자량에게 격분한 나머지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쒸이이이잉!
“헛!”
그는 옆구리로 날아드는 검을 보고 기겁을 했다.
타닷!
얼른 바닥을 찍어 차며 옆으로 물러났다.
염자량에게 약이 올라 연우경을 잊고 있었다.
연우경이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쫓아가며 공격을 이어갔다.
까강! 깡!
불꽃이 터지면서 금속성이 울렸다.
그러는 사이.
파지지짓!
또 다시 염자량이 아이스볼트를 사용했다.
‘끄응. 이것도 계속 쓰니 내공이 빨려나가는군.’
사실 내공이 아니라 마나였지만, 지금의 염자량은 그걸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쒸이이이잉!
아이스볼트가 날아가면서 망절소의 복부를 노렸다.
“이이익! 귀찮은!”
망절소가 얼른 몸을 뒤틀며 피했다.
그대로 표적을 지나친 아이스볼트가 나무 기둥을 직격하면서 소멸됐다.
콰직!
하지만 망절소는 다음 순간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쉬이이이잇, 서컥!
“크아악!”
연우경의 검이 그의 허벅지를 깊이 찌르고 만 것.
아이스볼트를 신경 쓰느라 연우경의 공격을 놓치고 말았다.
‘제기랄, 이딴 애송이들에게…!’
망절소가 털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연우경의 검이 망설임 없이 날아들었다.
슈컥!
“꺼억!”
검신이 목에 박힌 망절소는 그대로 두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하고 말았다.
한편, 이 과정을 숨어서 지켜보던 홍염은 내심 놀랐다.
‘조금 전 저 아이가 쓴 건 도대체….’
망절소가 염자량의 목숨을 끊어 놓으려는 순간, 그가 튀어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염자량이라는 아이는 생전 처음 보는 사술을 사용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상대가 그 사술에 한 차례 얻어맞은 후로 움직임이 둔해졌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알아보기 힘들겠지만, 홍염의 눈에는 그 차이가 또렷하게 보였다.
‘도대체 그는 생도들에게 뭘 가르치고 있는 거지?’
문득 사비강이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
치열한 싸움 끝에 상황이 정리됐다.
스무 명의 흑살대원들.
그들은 특목반 생도들에게 처참하게 도륙을 당했다.
물론, 거기에는 초절정의 수준을 뛰어넘은 사비강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어쨌거나 특목반으로서는 몇몇 부상자를 제외하면 완벽한 승리였다.
사비강은 흐뭇한 표정으로 생도들을 훑어보았다.
물론, 그의 눈은 유난히 젖은 무복을 걸친 여자 생도들에게 향했지만.
‘요즘 아이들은 성장이 빠르군.’
마침 곁으로 내려선 매설란이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며 물었다.
“무슨 음흉한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음? 무슨 소리를. 난 그저 생도들이 대견해서….”
“유독 여자 생도들이 대견한가 봐요.”
“그야 당연히 이 추운 날씨에 물속에서 버텨 주고 저렇게 예쁜 몸… 커험. 아무튼 사랑스럽군. 내 제자들이.”
“정말 대단하네요. 이렇게까지 해낼 줄은….”
“후후. 내 생각보다도 잘해 줬어.”
“아뇨. 생도들을 말하는 게 아니라, 당신 말이에요.”
“내가 왜?”
“보면 볼수록, 겪으면 겪을수록 당신이라는 사람이 신기하고 대단해요.”
“그건….”
“…….”
“고백인가?”
“됐어요. 말을 말죠.”
매설란이 한숨을 푹 쉬고는 걸어갔다.
마침 망절소를 쫓아갔던 연우경과 염자량이 돌아왔다.
사비강이 희미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수고했다.”
이미 홍염으로부터 대강의 사정을 미리 전해들은 터였다.
때문에 염자량이 서클을 개방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 나아졌어.’
생도들은 이제 제법 손발이 잘 맞았다.
목숨을 건 실전을 한 번이라도 치른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이제 생도들의 장단점도 분명히 보인다.
어떤 생도를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좋겠군.’
좋은 재목은 좋은 도구로 다뤄야 하는 법.
사비강은 내심 대견한 눈길로 생도들을 훑어보았다.
그때.
‘음?’
아스라이 느껴지는 기척.
사비강이 훌쩍 몸을 날려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섰다.
‘쫓기는 건가?’
제법 먼 거리였지만 기척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 말은 상대가 은신도 사용하지 않은 채 무작정 달리고 있다는 뜻.
필시 누군가 그를 쫓는 상황이리라.
‘가봐야겠군.’
사비강이 나무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이협, 설란!”
그의 부름에 당이협과 매설란이 얼른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두 사람은 아이들을 데리고 용천관으로 귀환하도록. 지금쯤이면 용천관에서도 일이 터졌을 거야.”
“당신은 어쩌려고요?”
매설란이 얼른 나서며 물었다.
사비강의 시선이 북쪽으로 향했다.
“남은 쓰레기들을 청소해야지.”
“하지만 혼자선…!”
팟!
매설란이 말을 잇지 못하고 두 눈을 멀뚱멀뚱 떴다.
사비강의 신형이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기에.
**
“크윽! 제길!”
소섭랑이 왼팔을 쥐고는 비틀거렸다.
벌어진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급한 대로 혈을 점해 지혈을 해두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자꾸만 피가 스며 나왔다.
‘그래도… 여기서 포기하면 모두 죽는다!’
상필지 혼자서는 낭아반 생도들을 절대 보호할 수 없으리라.
지금쯤이면 낭아반 생도들 중 몇이 죽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나저나 사비강, 그자를 부른다고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소섭랑은 회의적이었다.
다만 상필지가 그를 부르라고 했으니, 명령에 따를 뿐이다.
우지끈.
“헛!”
쿠당탕탕!
발을 디딘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경공을 펼치던 소섭랑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평소 같았으면 가뿐히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황.
달아나던 중 흑살대주 조량의 일장을 얻어맞아 내상까지 입은 터였다.
“헉, 헉, 헉! 제기랄!”
소섭랑이 무릎을 쥐고 몸을 일으키는데.
쒸엑! 쒸에엑! 푸푹!
비수 두 자루가 날아들면서 그의 등에 틀어박혔다.
“커헉!”
운 좋게 요혈을 피했지만 더 이상 달리는 건 포기해야 할 지경이었다.
소섭랑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런 상황에 사비강이라는 자를 찾아가라니….’
어이가 없다.
그만큼 상필지 교관도 절박했다는 뜻일 터.
이제 모든 게 끝이다.
“후후후. 여기까지 달아나다니. 생각보다는 뚝심이 있군.”
어느새 풀숲으로 내려선 조량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소섭랑은 모든 걸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상 교관님. 하지만… 그자를 불러온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자신을 쫓아온 조량부터 이미 절정의 고수가 아닌가?
한낱 교관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크크크. 기도는 드렸는가?”
“잔말 말고 죽여라!”
“크크. 꼴에 자존심은 있나 보군. 그럼 사양 않고….”
조량이 히죽 웃고는 칼을 뽑아 들었다.
그가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소섭랑 앞에서 칼을 치켜들었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찰나.
“음?”
조량이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찰나.
파바바밧!
조량이 튕겨 나가듯 훌쩍 뒤로 물러났다.
“넌… 뭐냐?”
놀랍게도 소섭랑 바로 뒤에 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건 그가 언제 어떻게 그곳에 나타난 것인지 조량으로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남자가 히죽 웃었다.
“나? 생도들을 계도시키고, 너 같은 놈들을 자근자근 밟아 주는 사비강 교관이시다.”
“교관…?”
“자, 이제 네가 답할 차례다.”
“무슨….”
“널 풀어 둔 주인은 어디에 있냐?”
사비강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