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귀환 마교관
72화
‘역시….’
사비강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역공이 반드시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모험을 하기 보다는 생도들의 안전을 생각하자는 쪽으로 정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당이협과 매설란의 생각이 컸다.
그래서 결국 조직대항전 취소를 건의했다.
마침 학장이 중재에 나섰다.
“커험. 우선은 모두들 근거 없는 추측은 지양하는 것이 좋겠소. 다만, 조직대항전 일정은 모두의 의견을 들어보고 수렴하겠소.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소?”
교관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의견 꺼내기를 주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칫 주장을 내세웠다가 사고라도 일어나면 그 책임을 지게 될까 봐 염려된 것이다.
한참이 지나서야 언벽이 가장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위험을 무릅쓰고 강행하는 것보다야 조금은 돌아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자 천세명이 곧바로 반박을 펼쳤다.
“그게 돌아가는 길인지, 질러가는 길인지 판단할 근거가 없잖소? 상필지 교관님 말씀대로 그 누군가 이 일까지 예측해서 행동하고 있다면 오히려 일정을 변경하는 것이 독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건… 그렇군요.”
언벽이 얼른 눈치껏 목소리를 낮췄다.
천세명이 사비강을 빤히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배신자가 존재한다면, 그 누구도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상필지 교관님 말씀대로 목격자 또한 예외가 될 수는 없지요.”
어디까지나 사비강을 의식해서 한 말.
주유천이 천세명에게 물었다.
“하면 천 부장께선 어떤 생각이오?”
“개인적으로는 일정대로 치르는 게 좋다고 봅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저들의 계획을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잘 대비만 한다면 큰 사고 없이 넘어갈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파의 암계가 두려워 학관의 일정을 전면 취소했다간 세간의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그건 그렇군요. 사파의 암계가 두려워서 천하의 용천관이 꼬리를 마는 건 썩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등부형이 동조했다.
자고로 정파인들은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니 이들로서는 다소 위험이 따르더라도 사파의 음모가 두려워 피하는 것이 자존심상 용납되지 않았다.
사비강은 쓴 웃음을 지었다.
회의가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고는 진작 예견했다.
그럼에도 당이협과 매설란의 권유를 따른 것이다.
‘역시 정파 녀석들이 정신 차리려면 한참 멀었어.’
내심 냉소를 짓는 가운데, 교관들은 하나둘 천세명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결국 주유천이 결정을 내렸다.
“다수의 의견에 따라 조직대항전은 예정대로 치르겠소. 단,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대한의 인력을 동원하여 용자림을 감시하고 관리하도록 할 거요. 예년과 달리 수위무사(守衛武士)를 두 배 이상 늘리도록 하겠소. 이상이오.”
수위무사란, 용천관의 춘향제가 사고 없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돕는 무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교관들 모두가 납득을 하면서 회의가 종료됐다.
교관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하니, 사비강 역시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마침 천세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쉽게 됐소, 사 교관.”
“……?”
“일정이 변경되면 적어도 조직대항전에서 망신 살 일은 없었을 텐데.”
“뭐, 할 만큼은 했으니 미련은 없소. 사건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더 이상 내 책임은 아니게 될 테니.”
오히려 잘 된 것일 지도 모른다.
어차피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는 것은 사비강의 방식이 아니었다.
차라리 부딪치고 깨면서 적들의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게 중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 유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럴 경우 희생은 불가피하다.
때문에 조금이나마 희생을 줄이기 위해 당이협과 매설란의 건의를 수용한 것이다.
천세명이 차갑게 웃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우리 용천관이 한낱 사파 녀석들에게 당할 리가 없지 않소?”
“그러길 바라오.”
사비강이 냉랭하게 대꾸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런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천세명은 피식 실소를 지었다.
‘그런 꼼수로 망신을 피하려고 해봤자 소용없다. 이번에야말로 철저하게 밟아 주마.’
**
“밀선(密船)이 죽었소.”
“어쩌다가?”
“적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호자림에서 발각되어 죽었다고 하오.”
“호자림에서? 용천관이 호자림에도 경계를 둔 거요?”
“그런 것 같지는 않소.”
“한데, 왜?”
“미꾸라지 한 마리가 있다는데….”
“무슨 뜻이오?”
“용천관에서도 썩 내켜 하지 않는 교관이 있다고 하오. 이름이 ‘사비강’이라던가?”
“으음. 일전에 우선이 얘기했던 자가 그자인가? 좀 튀는 교관 하나가 있다더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한데, 그자가 왜?”
“밀선이 바로 그자에게 죽었소.”
“우연일 가능성은?”
“그건 모르겠소. 다만… 사비강이라는 그 교관. 정말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어서 불안하다고 했소.”
“조직대항전이 취소될 가능성은 있소?”
“아마 오늘 회의를 했을 거요. 하지만 취소될 가능성은 적을 거요. 그들은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 놈들이니.”
“하긴, 오히려 기를 쓰고 하겠지. 후후.”
“하나 대비는 더욱 견고히 할지도 모르오. 그러니 인원을 보충할 필요가 있겠소.”
“얼마나 더?”
“최소 쉰 명.”
“알겠소. 흑살대(黑殺隊)를 끌고 가시오. 단, 실패해서는 안 되오.”
“그건 염려 마시오.”
**
춘향제의 꽃.
조직대항전이 치러지는 날.
용자림을 앞둔 너른 공터에 수백 명의 생도들이 모였다.
물론, 각 반을 담당하는 교관들 역시 함께.
생도들은 물론 몇몇 교관들도 들뜬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춘향제의 모든 행사에서 조직대항전이야말로 가장 인기 있는 행사였다.
규칙은 간단하다.
모든 반의 생도들이 담임 교관들과 함께 용자림에 투입된다.
각반의 생도들은 다른 반 생도들의 몸에 붉은 점을 찍어야 하는데, 이때 급소 부위의 요혈을 찍어야만 사망으로 간주한다.
다른 부위에 찍힌 점은 부상으로 간주하는데, 부상이 세 개 모이면 사망이 된다.
사망자는 자진해서 숲을 빠져나와야 하지만, 거짓으로 살아 있는 행세를 할 경우에는 숲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수위무사들이 이들을 가려낸다.
그렇다고 사람만 조심해서 될 문제는 아니다.
용자림 곳곳에는 각종 기관진식이 설치되어 있다.
이 또한 생도들이 헤쳐 나가야 할 난관들 중 하나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살아 남는 반이 최종 우승을 하게 된다.
“올해는 특히 안전한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용자림 곳곳에 수위무사들의 배치를 두 배로 늘려 두었다. 그러니 모두들 양심껏 규칙을 지켜 주길 바란다. 수위무사들의 복장에 대해서는 담임 교관에게 직접 듣도록 한다. 그럼, 너희들 개개인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해라.”
“예!”
수백 명의 생도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자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수위무사들은 원래 용천관의 경계를 지키는 무인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이번에는 당이협과 그의 수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직대항전에 참가할 수 있는 교관은 담임 한 명과 부담임 한 명만 가능했기에.
“그럼, 지금부터 조직대항전을 개시한다.”
학장이 선언하자, 북소리가 울렸다.
둥! 둥! 둥! 둥! 둥!
“와아아아아!”
생도들이 함성을 내지르더니 곧 교관들 인솔 하에 용자림으로 쫙 흩어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숲으로 들어간 후에는 은신이 기본이 되어야 하기에 함성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각 반의 성향에 따라서 모두 모여 이동하는 경우도 있었고, 조를 나누어 흩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또 어떤 경우는 무조건 최후의 생존을 위해 은신이 뛰어난 소수의 생도를 따로 분리하기도 했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으니, 어떤 전술이 더 뛰어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뭉쳐 있으면 힘이 세지지만 발각되어 표적이 되기 쉽고, 흩어져 있으면 은신하기 좋으나 힘이 약하다.
사비강은 특목반을 두 개 조로 나누었다.
매설란이 이끄는 귀갑조(鬼甲組), 그리고 사비강이 이끄는 적멸조(寂滅組)다.
두 조의 역할은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
귀갑조의 목표는 우승을 위한 생존이다.
때문에 은신과 경공이 뛰어난 조문탁, 방어력이 뛰어난 곡보옥, 잠재력이 뛰어난 능소소 등이 여기에 속했다.
반면 적멸조는 이름 그대로 적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
때문에 공격력이 뛰어난 연우경과 목단화. 모든 분야에서 골고루 두각을 보이는 염자량, 장거리 공격이 가능한 단리정 등이 여기에 속했다.
용자림 안으로 들어선 사비강은 우선 적멸조를 멈춰 세우고는 지도를 펼쳐 보였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여기다. 지금부터 여기로 이동하도록 한다.”
사비강이 지도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염자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교관님, 거긴 굉장히 먼 곳인데요?”
“나도 알아.”
“하지만 그렇게 깊숙이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는 공격조잖아요.”
“저도 자량의 말에 동의합니다. 공격조가 그렇게 깊은 숲으로 들어가 숨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바깥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놈들을 찾아내야죠.”
연우경이 염자량을 거들고 나섰다.
하지만 사비강은 고개를 저었다.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죽고 싶지 않으면.”
여기서 죽음이란 실제의 죽음을 뜻하는 거였지만, 그 사실을 눈치 챈 생도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생도들은 사파의 음모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학관에서도 생도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도록 모든 교관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던 탓이다.
사비강이 지도를 둘둘 말아 품에 넣으며 말했다.
“참고로 수위무사들의 복장은 백색이다. 혼동하지 말도록.”
“백색이요? 항상 적색이지 않았습니까?”
“올해는 백색으로 바꿨다.”
사실 이는 오늘 아침에 정해진 사항이었다.
어젯밤 사비강은 매설란의 권유로 주유천을 남몰래 다시 찾아갔다.
그리고 주유천에게 한 가지 제안을 꺼냈다.
“수위무사들의 복색을 바꾸자고?”
주유천은 뜻밖의 제안에 눈살을 찌푸렸다.
“예, 그리고 바뀐 복색에 대해서는 어떤 교관에게도 알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내일 사파 놈들이 나타난다면 기존 수위무사들의 복색과 같은 색을 착용할 겁니다. 그러니 복색을 바꾸면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어찌 그리 확신하는가? 게다가 자네는 어떻게 그들의 복색까지 알고 있나?”
“그 복면인을 추궁해서 얻은 대답입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이미 미래를 겪어 봤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수위무사들과 똑같은 복색을 착용하고 나타나서 생도와 교관들을 사정없이 벴다.
그래서 피해가 더욱 컸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할 수는 없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한데 주유천 역시 호락호락한 자는 아니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주유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생각에 잠겼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복면까지 착용한 자가 그런 정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불었다?
보통은 고문을 당하기도 전에 자결하기 마련이다.
사파 놈들이 정파인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면, 훨씬 독하다는 것이다.
주유천의 눈빛에서 모종의 의심을 확인한 사비강이 말을 덧붙였다.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저를 의심하면 답이 없습니다. 학장님께서 선택하셔야 합니다.”
“흐음.”
주유천이 사비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비강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알겠네. 복색을 바꾸도록 하지. 단, 복색에 대해서는 자네에게도 말해 주지 않겠네. 내일 아침 교관들에게 일괄적으로 알려 주겠네.”
“좋은 생각이십니다.”
사비강이 씩 웃었다.
사실 그가 사비강의 권유를 따른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사비강이 배신자라면 굳이 이렇게 찾아와 복색을 바꾸라고 할 필요는 없기에.
어쨌거나 수위무사들이 백색 무복을 입은 데에는 그런 사정이 있었다.
사비강이 적멸조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동 중에 적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 주변 경계 확실히 하면서 따라오도록. 만약 사망자가 나오게 되면 일절 망설임 없이 버린다.”
“알겠습니다.”
생도들의 표정에 비장함이 그려졌다.
비록 모의 훈련인데다 진짜로 사망하는 것이 아니지만, ‘사망자를 버린다’는 표현을 들으니 왠지 실전에 가까운 긴장감을 가지게 됐다.
“자, 그럼 이동.”
사비강이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몸을 훌쩍 날렸다.
연우경과 염자량을 비롯한 적멸조가 날다람쥐처럼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