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귀환 마교관
68화
쉬이이잇!
한 줄기 바람이 불자 나뭇가지가 격하게 흔들렸다.
복면을 쓴 사내는 바람처럼 내달렸다.
타닷!
어느 순간 나뭇가지를 박차자, 나뭇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며 떨어져 나갔다.
주변의 풍광들이 빠른 속도로 그를 지나쳐 갔다.
가히 놀라운 경신법임에도 복면인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젠장! 어째서…!’
어금니를 꾹 씹었다.
모든 과정에 문제는 없었다.
정보가 샐 가능성도 없었다.
한데 꼬리를 밟혔다.
우연일 가능성은 없다.
본래 용천관 동쪽으로 넓게 펼쳐진 호자림(虎子林)은 평소 경계가 허술한 편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춘향제를 할 때는 경계를 지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오히려 경내를 감시하며 수상한 자를 가려내는 게 낫기 때문이다.
한데 호자림 곳곳에 눈이 있었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고수들.
용천관 교관들은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 일부러 사람을 심어 둔 것이다.
그 말은 곧….
‘누군가 우리 계획을 알고 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알았을까?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건 위에서 할 일.
자신은 당장 여기를 벗어나 정보가 샜다는 사실만 알리면 된다.
하지만….
쒸엑! 쒸엑! 쒜에에엑!
“치잇!”
복면인이 혀를 차며 급히 몸을 돌렸다.
따다당!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던 세 자루의 암기가 튕겨 나갔다.
‘이대로라면 빠져나가기 어렵다!’
달아나면서 눈치를 챘다.
녀석들이 자신을 한곳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을.
생포하겠다는 심산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들이 가진 정보가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니까.
그랬다면 굳이 자신을 생포할 필요가 없을 테니.
‘어떻게든 활로를 뚫어야 하는데…!’
달리기 쉬운 장소일수록 함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곳으로 달릴 수밖에 없다.
다른 곳은 너무 촘촘하다.
‘젠장, 여기까지인가…!’
복면인은 이를 뿌득 갈고는 다시 나뭇가지를 박찼다.
**
‘과연 경신법이 상당히 뛰어나군.’
사비강은 눈을 가늘게 떴다.
복면인은 거의 모든 공력을 경공에 쏟아 붓고 있었다.
하지만 호자림을 벗어날 수는 없을 터.
사비강은 복면인의 뒤를 느긋하게 쫓았다.
천라주사진(天羅蛛絲陣).
귀야채 무인들과 당문의 수하들, 그리고 귀영부 무인들까지 동원한 진이다.
이 진을 완벽히 구사하기 위해 이들은 지난 며칠간 밤낮없이 합을 맞췄다.
한 번 걸려들면 개미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다.
사비강이 독자 개발한 것은 아니다.
이미 마계에서는 익숙하게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가져와 이름만 그럴 듯하게 붙인 것이다.
익히기는 쉬우면서도 효율성은 매우 높은 진이다.
“달아나도 소용없다.”
사비강이 나직이 읊조리듯 말했다.
하지만 매직 마우스 마법을 사용했으니, 상대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기가 흐트러지는 게 느껴진다.
동요한 것이다.
전음과 다르니 더욱 놀랐을 터.
그 틈을 타 사비강은 블링크 마법을 써서 먼발치까지 순식간에 이동했다.
한편, 복면인은 막다른 암벽까지 내몰리고 나서야 완전히 걸음을 멈추었다.
“헉, 헉, 헉.”
복면인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슉, 슉, 슈슈슈슈슉!
사방으로 무인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역시…!’
이들은 준비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샜을까?
적사의 신변까지 노출된 것일까?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 거짓말처럼 한 남자가 나타났기에.
팟!
마치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나타난 사람.
사비강이었다.
그가 무감한 표정으로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누굴 만나고 온 거지?”
“…….”
“혈사련(血死聯)이 보냈나?”
“……!”
사비강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그랬군.”
복면인은 당황했다.
혈사련은 아직 세상에 밝히지도 않은 명칭.
이번 거사에 성공하고 나면 혈사련이 존재한다는 것을 당당하게 밝힐 예정이었다.
한데 그 이름까지 알고 있다니!
도대체 이자는…!
“너, 너는 누구냐?”
복면인이 소리쳤지만 사비강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질문은 내가 한다.”
“큭…!”
“누굴 만나고 돌아가는 길인가?”
“어떻게 알았냐?”
“너희들은 조직대항전이 치러지는 날 이 용자림에서 거사를 치를 계획이겠지?”
“……!”
“역시 그렇군. 춘향제가 한 달여나 앞당겨졌는데 계획을 전혀 수정하지 않았단 말이군.”
“너, 넌 도대체 정체가 뭐냐?”
“내통자를 만나고 용자림을 한 번 살펴본 후 돌아가려고 했겠지?”
“으익…! 도대체 네놈은 어떻게 그런 걸 전부…!”
“자, 다시 묻지. 누굴 만나고 돌아가는 길인가?”
“또 뭘 알고 있느냐?”
“역시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건가?”
“차라리 죽여라.”
“너희들은 용자림에서 폭약을 사용하겠지. 그리고 혼란한 틈을 타서 생도들과 교관들을 학살할 계획이야. 그렇지?”
이제 복면인의 눈은 찢어질 것 같았다.
이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다는 건 넘겨짚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하니 표정 관리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비강이 희미하게 웃었다.
“자, 그러니 우리 거래를 하지.”
“무슨….”
“내통자만 알려 주면 돼. 그럼 널 곱게 보내 주마.”
“흥! 그 말을 믿을 것 같은가?”
“혹시, 천세명을 만나러 왔나?”
복면인이 툴툴 웃었다.
“흐흐. 내 반응을 보고 유추하려는 모양이군. 하지만 소용없다!”
복면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순간.
퍽!
그의 머리가 순식간에 터져 나갔다.
그를 에워싼 무인들이 흠칫거리고 달려왔지만, 이미 머리가 터진 복면인의 몸은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지독한…!”
고적산이 신음처럼 말을 흘렸다.
사비강은 시체 앞으로 다가오다가 멈칫거리고는 몸을 돌렸다.
“오고 있군.”
“예?”
무인 하나가 물었지만, 사비강은 대답 대신 가만히 숲 쪽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뜻밖에도 상대는 상필지 교관이었다.
‘호흡이 고른 편이지만 경공을 사용해서 이쪽으로 곧장 왔다. 혹시 상필지가 접선책인가?’
사비강이 속내를 감추며 히죽 웃었다.
“상필지 교관님 아니십니까?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곧 있을 조직대항전을 준비하기 위해서 용자림을 둘러보고 있었소. 알다시피 조직대항전은 이 용자림에서 치러지니까. 한데 사 교관께서는 무슨 일로 이런 곳에? 그리고 저 시체는 뭐요? 이 무인들은?”
상필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게 내통자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시체를 보고 놀랐기 때문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사비강이 사실대로 말했다.
“쥐새끼 한 마리가 들어와서 쫓았더니 자폭해 버렸습니다.”
“이 무인들은?”
“절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 쥐새끼는 어디서 들어온 거요?”
‘정말 모르는 건가? 하지만 의심을 쉽게 거두어서는 안 된다.’
사비강이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대꾸했다.
“그것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사실대로 말했다간 상대가 내통자일 경우, 또 미래가 어찌 바뀔지 모르기에.
게다가 내통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쪽이 아는 걸 다 나불거렸다간 역으로 당할 수도 있다.
일단 표정으로 보아서는 안도의 기색이 없다.
하긴.
수년 간 이곳에 심어 둔 내통자라면 이만한 일로 안색이 변하거나 하진 않을 터.
상필지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한데 쥐새끼인지 아닌지 어찌 알았소?”
눈빛이 사뭇 날카로웠다.
사비강이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떤 면에서 따지면 복면인이 던진 질문과 같은 내용이다.
“쥐새끼가 아니면 복면을 쓸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흠, 시체를 좀 봐도 되겠소?”
“물론이지요.”
사비강이 옆으로 물러나자, 상필지가 저벅저벅 다가가 시체를 살폈다.
머리가 완전히 터져 나갔기에 정체를 확인하기란 불가능했다.
상필지가 사비강을 슬쩍 돌아보았다.
“관주님께 보고하실 거요?”
“물론이지요.”
“그렇군. 고생하셨소.”
상필지가 사비강의 어깨를 한 차례 두드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흐음, 좀 헷갈리네.’
사비강이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진짜로 나타났다면서요?”
그날 밤, 사비강의 집무실에 불쑥 찾아온 매설란이 다짜고짜 소리쳤다.
“뭐가 말이오?”
“사파의 복면인! 진짜로 나타났다면서요?”
“그랬소.”
“그럼… 정말 그게 전부… 사실이란 말이에요?”
“그렇소.”
매설란은 아마도 당이협을 통해 모든 사실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지금쯤 그녀는 자신이 미래에서 회귀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터.
언젠간 알아야 할 사실이기도 했다.
“말도 안 돼….”
매설란이 몸을 가늘게 떨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비강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정말 미래에서 왔나요? 그게 가능한 건가요?”
“마계라면 가능했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당신… 정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건가요?”
“다는 아니지만 상당히 알고 있소.”
“그럼… 정말 곧 많은 사람이 죽게 되나요? 생도들은 어떻게 되죠? 사파는? 그들은 정말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요? 십 년 후, 마계의 침략으로 몇 명이나 죽죠?”
“흐음, 질문이 너무 많은데.”
사비강이 중얼거리자, 매설란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가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아요. 하나만 묻죠. 미래의 나는 어떻게 되나요?”
“음?”
사비강이 헛웃음을 지었다.
“자기애가 강하구려. 알고 싶소?”
“알 수 있다면요….”
“나와 혼인해서 아이 셋을 낳게 되지. 그리고 나를 하늘처럼 떠받들며….”
“거짓말.”
“정말 알고 싶소?”
“네, 말해 봐요.”
“마계의 침공을 받고, 그들에게 윤간을 당하다가 처참하게 죽소.”
“거… 짓말.”
“사실이오.”
매설란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무인이지만 그래도 여자다.
윤간을 당한다는 말이 달가울 리 없다.
사비강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리 되지 않을 거야.”
“왜죠…?”
“그걸 막기 위해 내가 온 거니까.”
“막을 수… 있나요?”
“무조건. 반드시.”
사비강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매설란의 뺨을 쓰다듬었다.
매설란은 피하지 않았다.
갑자기 너무 많은 사실들을 한꺼번에 들어 버렸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을 인정해야만 이해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아아, 이 사람 또… 짓궂어….’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비강.
하지만 싫지 않다.
지금은 그의 손길에 다시 의지하고 싶다.
그날 동혈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비강의 손길이 어느새 그녀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런데….
“왜… 멈추나요?”
“손님이 오는군.”
사비강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매설란도 기척을 감지하고는 얼른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일어났다.
“자세한 건 다음에 얘기해요.”
“그러지.”
“그리고 반말….”
“음?”
“… 해도 돼요.”
“크크. 벌써 하고 있는데?”
“착각하진 마세요! 회귀를 했다니까. 그게… 나보다 훨씬 오래 산 영감님이니까 봐주는 거라고요!”
“누가 뭐라고 했나?”
“흥!”
매설란이 몸을 휙 돌리더니 스르르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 직후.
똑똑.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사비강이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매설란과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방해를 받았으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뜻밖에도 연우경이었다.
“무슨 일이지?”
연우경의 시선이 둘 곳을 잃은 것처럼 이리저리 방황했다.
어쩐지 평소의 그답지 않았다.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길이라도 잃은 거냐?”
“저어….”
잠시 뜸을 들이던 연우경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교관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뭐? 미안하지만 난 그쪽 취향이 아니다. 보옥이하고 싸웠다더니 궁해진 거냐?”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와 보옥이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아닙니다!”
“그럼, 뭐냐? 질문의 요지를 정확히 말해야지.”
“내일 비무 말입니다. 교관님은… 제가 이길 수 있다고 보십니까?”
사비강이 그제야 정색을 하고는 연우경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내 사비강의 대답이 떨어졌다.
“아니. 네가 진다.”
“……!”
“지금 이대로라면 말이지.”
사비강이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