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귀환 마교관
59화
사비강이 의외라는 듯 당이협을 보았다.
“호오. 믿는 건가?”
“믿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의심하기도 힘들군요.”
당이협이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너무나 허황된 이야기.
그야말로 아기가 잠들 때, 머리맡에서 할머니가 들려 줄 것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하기엔 그야말로 천재적인 창의성이 아닌가?
게다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자신의 병을 치료하고, 듣도 보도 못한 맹독을 전해 받아 연구했던 것들이 설명되지 않는다.
사비강으로부터 받은 그 맹독들은 분명 이 세상에서는 만들기 힘든 것이었다.
만약 그의 말을 믿는 척이라도 한다면?
이 모든 의문이 풀린다.
그 황당한 이야기로 인해.
‘정말이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군.’
당이협은 복잡한 표정으로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가를 떠나온 지 벌써 오 년 가까이 흘렀다.
당시 가주였던 아버지, 당문천(唐文天)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미 전신의 감염 증세가 심각했던 상황.
흰 천으로 전신을 휘어 감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상태가 나빴다.
더 이상 가문에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어찌어찌 세간에 숨기고는 있었지만 발 없는 소문보다 빠르고 무서운 것은 없는 법.
만약 당가의 소가주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새어나갔다간 하루아침에 가문의 권위가 바닥으로 추락할 터였다.
그렇게 가족의 눈물을 뒤로하고 그는 수하들과 함께 가장을 떠났다.
그리고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며 귀신처럼 배회하다가 지귀에 머물렀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한 서린 인생은 그렇게 마감되리라 여겼다.
한데 구원의 손길이 뻗어 왔다.
정말이지 난 데 없이.
사비강은 자신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신의 손길이었다.
때문에 그를 주군으로 모시는 것에 있어서는 한 치의 불만도 없었다.
여벌로 얻은 목숨, 사비강을 위해서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
게다가 사비강이 보여준 무공의 수위는 가히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주인으로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니 주군이 하는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으리라.
하지만….
‘정말이지 되새길수록 황당한 이야기로다.’
그 마음을 읽었는지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믿으라고 강요하진 않는다.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터.”
“아닙니다. 주군을 믿습니다. 다만, 미천한 지식으로 그 내용을 모두 파악하기에는 버거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마음이 받아들이는 중입니다.”
당이협의 대꾸에 사비강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과연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
당이협은 역시 이런 인물이다.
제일 첫 조력자로 당이협을 고른 것도 이런 이유였다.
한 번의 신뢰로 영혼까지 맡길 수 있는 의협심을 가진 자.
사실 조금만 더 찾아보면 당이협 만큼이나 훌륭한 고수들을 도와주고 아군으로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하나, 인간의 됨됨이가 그만큼 뛰어난 자는 드물다.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십 년. 앞으로 십 년이 남았다.”
“십 년이라면….”
“그전에 여러 징후가 포착되겠지만, 그들이 본격적으로 침공하는 시기는 앞으로 십 년 후다.”
당이협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안도하는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 들은 이야기라고 벌써 빠져들었단 말인가?
하지만 믿는다.
사비강을.
자신을 절망의 늪에서 꺼내 준 사비강을!
사비강이 당이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도하면 안 돼.”
“죄송합니다.”
“지금 중원인의 수준을 생각한다면, 앞으로 십 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그 정도… 입니까?”
“하지만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는 앞으로 많은 것들을 해나가야 한다.”
“그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는 건 어떻습니까?”
“크크크. 너무 쉽게 생각하는군.”
사비강이 웃음을 흘렸다.
당이협은 뒤늦게 실언을 깨달았다.
하긴.
자신도 이제야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한데 보통의 인간이라면 누가 그 말을 믿을까?
그저 미치광이 무인 하나가 마공을 써서 자신의 종파 하나를 세우려고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할 게 뻔하다.
신뢰를 만드는 일은 공든 탑을 쌓아올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어리석은 발언은 공든 탑의 주춧돌을 빼내는 것과 마찬가지.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정상의 자리에 올라서도 한순간에 어이없게 무너지는 곳이 바로 강호다.
사비강이 몸을 휙 돌리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때가 되면. 아직은 그때가 아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아니, 한참을 더 기다려야겠지. 그때까지 우린 조용히 준비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당이협은 굳은 표정으로 대꾸하면서 사비강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태사전 후원의 청심지.
연못가에는 어김없이 은기륭이 앉아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와 하얗게 샌 그의 머리카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이제 완연한 봄이구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곁에 있던 주유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다 금방 더워지는 것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허허, 세월이 늘 그런 것 아니겠소? 이제 다가와 반기려고 하면, 어느새 저만큼 멀어져 버리는 것을.”
“하지만 관주님은 그 세월마저 붙들고 계신 것 같습니다.”
“허허허. 주 학장이 입에 발린 소리를 할 때도 다 있구려.”
주유천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사실 입에 발린 소리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은기륭 곁에 다가올 때면 어김없이 그의 심후한 내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꼈다.
때문에 늘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수면을 가만히 바라보던 은기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곧 돌아오겠구려.”
“아마 내일 쯤 도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긴, 송백을 떠났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으니. 지금쯤이면 거의 도착했을 테지.”
사비강이 이끄는 특목반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느새 석 달이 훌쩍 흘렀다.
떠날 때만 해도 굉장히 긴 시간이라고 여겼건만.
정말이지 세월이라는 것은 은기륭의 말대로 반기기도 전에 멀어지나보다.
“들었소. 상필지 교관이 담임을 맡았다고. 천 교관이 그를 적극 추천했다지요?”
“그렇습니다만, 그전에 상필지 교관이 먼저 요청을 해왔다고 합니다.”
“그렇소?”
이번에는 은기륭도 다소 의외였는지 주유천을 힐끔 돌아보았다.
주유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은기륭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별일이로군.”
“저 역시 의외였습니다.”
“교관들의 입장에서는 환영하는 분위기라 들었소. 그 이유가 있을 터인데.”
잠시 뜸을 들인 주유천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직 교관들 사이에서는 사비강 교관을 인정하기 싫은 기류가 있습니다. 해서, 상 교관을 사 교관에게 대항할 수 있는 패로 여기는 듯합니다.”
“허허, 참으로 우습군.”
“어쩔 수 없지요. 사 교관이 스스로 풀어야 할 과제겠지요.”
“공감하오.”
은기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호불호마저 관주나 학장이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춘향제는 어찌 되고 있소?”
“무리 없이 진행 중입니다.”
“다행이오. 모쪼록 무탈하게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애써 주시오.”
“최선을 다하지요.”
대략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주유천은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은기륭은 연못가에서 길게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물고기가 놀란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나, 실제로는 깊은 사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주유천이 자리를 떠난 후에도 청심지의 고요함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괜찮으시겠어요?”
옥구슬이 구르는 듯 청아한 목소리.
은기륭의 호신위 여영이었다.
“그가 넘어야 할 산이다.”
은기륭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여영의 목소리가 다시 우려를 나타냈다.
“하지만 상필지는 초절정에 가까운 고수입니다. 제아무리 사비강 교관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당해내기 쉬운 상대가 아니에요.”
왜 모르겠는가?
상필지는 강호 백대 고수의 반열에 드는 자다.
세간으로 나갔다면 능히 문파 하나를 거뜬히 세우고도 남을 위인이다.
“하지만 그도 고인 물을 정화시키지는 못했지.”
상필지는 오로지 강인함만 추구하는 자다.
용천관의 뿌리가 썩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오직 자신의 성취만을 생각하는 자.
그게 바로 상필지다.
그런 그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사비강의 행보에 관심이 갔기 때문이리라.
“정말 이대로 구경만 하실 생각이세요?”
여영이 다시 심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흐음. 나서서 도와줄 수는 없지. 하나… 사전에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터. 우선은 그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구나.”
“그가 도착하는 대로 부르겠습니다.”
여영의 목소리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은기륭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영이도 그 녀석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군.’
**
오랜 여정이었다.
석 달간의 연무기행.
마침내 용천관으로 향하는 야산의 길목에 들어섰을 때, 생도들은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돌아왔다!”
누군가 소리쳤다.
“용천관이다!”
“와아! 여기가 이렇게 그리울 줄은 몰랐다!”
“그래봐야 일주일 지나면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지도? 키키킥.”
생도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댔다.
힘들게 겪는 동안은 참으로 긴 시간처럼 느껴지는데, 지나고 나면 찰나에 불과하다.
‘정말이지 바로 어제 이곳을 떠났던 것 같은데….’
단리정은 주변에 우거진 나무들을 둘러보며 새삼 감회에 젖어들었다.
석 달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비교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활이라….’
그는 왼손으로 쥔 화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많은 것을 얻은 여행이었다.
비단 그 뿐만 아니라, 여러 생도들이 이번 연무기행을 통해서 확실히 성장했다.
이처럼 알찬 연무기행이라니.
떠날 때만 해도 그저 놀러가는 기분이었는데.
자신들의 이런 변화를 학관에서는 짐작이나 할까?
마침내 사두마차를 선두로 모든 일행이 용천관 정문으로 들어섰다.
연무장에 있던 몇몇 생도들이 우루루 달려와 귀환하는 특목반을 보며 술렁거렸다.
“오, 특목반 생도들이다!”
“이제 연무기행에서 돌아왔나 봐.”
“대단한 걸? 정말로 석 달이나 여행을 하다니.”
“뭐, 그래봐야 문제아들 모아 놓은 특목반이지만. 헤헤.”
마침내 행렬이 멈추자 사비강이 마차 지붕 위로 훌쩍 올라섰다.
특목반 생도들이 모두 그를 올려다보았다.
떠날 때만 해도 그를 무시하며 투덜거리던 생도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 같이 시선을 모으고 사비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 석 달 동안 고생 많았다. 긴 여정이었으니 각자 숙소로 돌아가 푹 쉬도록 해라. 이상.”
긴 여정이 어딘지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짧은 발언이었지만, 생도들은 오히려 그렇기에 사비강답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비강이 지붕에서 막 내려서는데.
“하하하! 어서 오시오.”
천세명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사비강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그간 잘 계셨습니까?”
“덕분에 잘 지냈소. 우리도 이곳에서 사 교관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종종 소식을 들었다오. 참으로 대단하시오.”
“별 말씀을.”
“아, 그런데 사 교관이 없는 사이에 낭아반 담임을 정해 버렸다오. 도저히 우리끼리 너무 힘들어서 말이오.”
순간 사비강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건 분명히 제가 추천한….”
“아, 혹시라도 오해는 하지 마시오. 정교관을 새로 임명한 것은 아니니까.”
“하면?”
“그간 담임을 맡지 않았던 상필지 정교관께서 그 아이들을 맡아 주기로 하셨소. 그러니 사 교관께서 다른 사람을 정교관으로 추천하셔도 문제가 없소. 다만 담임을 맡을 수 없을 뿐.”
잠시 상황을 파악하던 사비강이 이내 웃음을 지었다.
“아, 그렇다면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잘 됐군요.”
‘잘 돼? 담임을 맡을 수 없는데도?’
‘괜한 허세를 부리는 건가?’ 하고 생각하던 천세명이 내심 조소를 지었다.
‘훗, 앞으로 넌 상 교관과 비무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천세명이 속생각을 삼키며 말했다.
“역시 이해해 주실 줄 알았소. 한데 사 교관께서는 직접 추천할 무인을 찾으셨소?”
“물론이지요. 함께 왔습니다.”
사비강이 대꾸하자, 죽립을 눌러 쓴 사내 한 명이 곁으로 다가왔다.
천세명이 내심 코웃음을 쳤다.
‘흥, 보나마나 어디서 뒷돈이나 받고서 쓰레기를 끌고 왔겠지.’
천세명이 내색하지 않고 포권했다.
“반갑소, 일 년생 교관부장 천세명이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당이협이라고 합니다.”
“그렇구려. 이렇게 만나서 반가… 가만, 당이협이라면… 혹시 사천당가의 소가주….”
“이미 지난 일입니다. 당가를 떠난 지는 오래 됐으니 그만 잊으셔도 됩니다.”
당이협이 고개를 들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천세명이 입을 딱 벌렸다.
“맙소사… 이게 어떻게 된….”
“주군의 은혜로 이 자리까지 오게 됐습니다.”
‘주군이라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천세명이 멍한 표정으로 당이협과 사비강을 번갈아보았다.
“뭐, 그렇게 됐습니다.”
사비강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