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귀환 마교관
58화
이틀 후, 사비강과 생도들은 섬검목가를 나섰다.
목철우는 마을 어귀까지 나와서 사비강의 손을 맞잡았다.
“아직은 많이 어리석고 부족한 딸이라오. 때론 엄하게 키워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으나, 하나밖에 없는 딸이다 보니 가슴이 따라가질 않았소. 괜히 그 마음으로 딸아이를 잘못 키운 게 아닌가 하여 걱정되는구려. 사비강 교관께서 날 대신해 잘 이끌어 주셨으면 하오. 부디 잘 부탁드리겠소.”
“후후후. 걱정 마십시오. 확실한 인재로 키워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이보다 든든할 수도 없구려.”
목철우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사비강이 목단화를 힐끔 보고는 보란 듯이 웃어 보였다.
마치 그 웃음이.
‘봤느냐? 이제 네 아버지도 너의 명운을 내게 맡겼다. 그래도 발버둥칠 생각이냐? 죽은 듯이 내 말을 따르도록 해라. 그럼 다치진 않을 거다.’
라는 정도의 협박처럼 느껴졌다.
‘하아, 정말 아버지는 왜 저러신담?’
목단화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자신을 끔찍이도 아끼셨다.
그녀가 한 마디 하면 아버지는 그 이상을 들어주시는 분이었다.
그런데 사비강과 대련을 한 직후부터 아버지의 태도가 돌변했다.
자존심이 강하고 언제나 당당한 아버지가 저렇게 자세를 낮추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렇다고 대련에서 아버지가 밀린 것도 아니다.
대등한 실력으로 보였다.
물론, 한낱 교관이 아버지를 상대로 대등한 실력으로 겨룰 것이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 부분은 분명 놀라웠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아버지가 저렇게 상대를 추켜세우다니.
확실히 아버지는 지금 사비강을 존중하는 것을 넘어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사실, 지난 비무의 내막을 알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당연한 의구심이었다.
하지만 목철우로서는 단 한 번의 비무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
사비강의 실력, 그리고 생도들 앞에서 자신을 배려하는 그의 인성.
그날 밤 술자리에서 목철우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딸아이에 대해 말할 때는 거침이 없더니, 비무를 할 때는 어찌 그런 배려를 해주셨소?”
“자고로 무공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어떤 무공인가, 보다는 어떤 사람인가가 늘 중요하죠. 해서 단화의 인성에 대한 지적을 좀 더 거칠게 했습니다. 뭐, 제가 딱딱한 격식 자체를 싫어하는 이유도 있지만요.”
평소 같았더라면 화가 났을지도 모를 대답.
하지만 이미 상대의 실력에 감복한 목철우는 그 대답에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자라면 믿고 딸을 맡길 수 있겠구나.’
아니, 처음으로 용천관에 딸을 보낸 것이 옳은 결정이었다고 확신하게 됐다.
그전에는 그저 출세와 인맥 확장이라는 명분밖에 없었기에.
결국 목철우는 그날 밤 사비강과 함께 날이 새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사비강은 젊은 무인 같지가 않았다.
마치 수십 년의 인생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본 노년의 고수 같은 느낌이랄까?
실제로 사비강은 굉장히 긴 인생을 살았지만, 그런 내막을 알 리가 없는 목철우로서는 그저 사비강이 어려서부터 세상의 이치를 꿰뚫은 자처럼 보일 뿐이었다.
지난밤을 잠시 회상하던 목철우는 이제 목단화를 불러 좋게 타일렀다.
“앞으로 학관에 가서도 사비강 교관님의 말씀을 잘 따르도록 해라. 사비강 교관님과의 인연은 하늘이 내리신 축복이다.”
“아버지도 참, 무슨 그렇게까지….”
“어허! 이 아비의 말도 이젠 못 믿겠다는 것이냐?”
“그건 아니지만….”
목단화는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목철우를 보았다.
아버지는 진심이었다.
겉치레로 하는 말도 아니었고, 힘에 의해 굴복한 모습도 아니었다.
그러니 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사비강 교관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딸을 두고 목철우는 사비강을 향해 포권을 해보였다.
“앞으로 섬검목가는 사비강 교관님께 적극 협조할 것이오. 혹, 우리 가문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온다면 언제든 주저 말고 불러 주시오.”
“크크.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부디 평안한 여정이 되시길.”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뒤로 도열해 있던 섬검목가 무인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소리쳤다.
“살펴 가십시오!”
마침내 사비강과 생도들이 길을 떠났다.
한편, 생도들과 함께 걸어가는 연우경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말 우연이 아닌 건가?’
목단화와 대련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녀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한데 검을 섞을수록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명문가로 위세를 떨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대련을 시작했을 때, 사비강은 자신에게 엉뚱한 조언을 해주었다.
“바닥만 보고 해라.”
처음에는 무슨 미친 소린가 했다.
바닥만 보라니?
하지만 일각 쯤 흘렀을 때, 그는 보았다.
도저히 검로가 뚫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자책하면서 무심결에 바닥을 보았다.
그때 사비강의 조언이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집중해서 살폈다.
정답은 보법에 있었다.
늘 쾌속하고 경쾌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보법이 방어할 때만큼은 그 위력을 잃는 것처럼 보였다.
그 이유를 곧바로 알아내진 못했다.
한데 몇 차례 공방을 주고받자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그녀의 보법이 방어할 때만큼은 약간씩 굽어가는구나!’
그렇다면 자신은 최단거리를 이용해 쫓아가면 어떨까?
어쩌면 검로가 뚫릴 지도 모른다.
물론 말처럼 간단한 것은 아니다.
이쪽의 반격 동작은 마지막 자세와도 연관이 많다.
때문에 연우경은 반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초식을 구사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검로가 열렸다.
우연이 아닌가 싶었지만, 다음에도 같은 방식의 공격이 통했다.
이제 망설임은 없었다.
그는 곧장 직선의 움직임을 펼치며 활짝 열린 검로를 따라 검봉을 내질렀다.
그리고 비무에서 이겼다.
간단해 보이지만, 생사를 건 비무 도중에는 상대의 보법에만 신경 쓸 수 없다.
한데 사비강은 그 비무를 직접 보지 않고도 어떻게 알아낸 것일까?
문득 곡보옥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사비강 교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부류가 아닌 것 같아.”
‘사비강.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이젠 정말 모르겠다.
한편, 그런 생각을 비슷하게 가진 사람이 또 있었으니….
“말씀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사비강의 마차에 다가와 우뚝 선 사람.
바로 당이협이었다.
마차 문이 열리자, 당이협이 진중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한 번은 찾아올 줄 알았지.”
“그럼,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니. 내가 나가지. 좀 걷지.”
사비강이 마차에서 내렸다.
**
용천관의 용담실.
“학장님. 언제까지 정교관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천세명의 말에 주유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비강 교관과 얘기를 나눠야 할….”
“그와 한 약조를 파기하시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현 상태로는 담임을 잃은 낭아반(狼牙班) 생도들을 교관들이 돌아가며 보충하기에는 버거운 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고 새로운 교관을 임의대로 고용할 수도 없는 일이오.”
“새로운 교관을 임용하지 않고도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마침내 주유천이 관심을 보이며 천세명을 보았다.
천세명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상필지 교관님을 담임으로 임명하시는 겁니다.”
“상 교관을?”
상필지 교관은 일년생 정교관 중에서도 가장 검술이 뛰어난 자였다.
하지만 담임을 맡지는 않는다.
회의에도 불참이 잦은 그는 애초에 담임을 맡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교관이 된 자였다.
주유천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새로 정교관을 고용하지 않고도 문제가 해결되겠지. 하나 상 교관이 담임을 맡으려고 하겠소?”
귀찮은 일은 딱 질색하는 상필지였다.
담임 교관이 된다면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결코 담임이 되려고 하지는 않을….
“이미 상 교관님과 이야기를 끝내 놓았습니다.”
천세명이 불쑥 대꾸했다.
“이야기를 끝내다니? 무슨 소리요?”
“학장님의 인가만 있다면, 상필지 교관께서는 담임을 맡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마주 앉은 등부형과 그 곁에 앉은 언벽조차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오, 그게 정말입니까?”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낭아반 생도들은 그야말로 복 받은 셈이군요.”
천세명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놀랐습니다. 우리가 먼저 부탁해도 모자랄 지경인데, 어제 상필지 교관께서 직접 찾아와서 제게 말씀하시지 뭡니까?”
“그게 정말이오?”
이번에는 주유천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천세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처음에는 제 귀를 의심했지요.”
사실이었다.
상필지는 어젯밤 자신의 숙소로 찾아왔다.
“이제 슬슬 담임을 맡아도 좋지 않을까 싶군.”
정말 예상치도 못한 발언.
무뚝뚝하게 꺼낸 그 말에 천세명은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만약 상필지가 담임을 맡게 된다면, 다가오는 춘향제에서 그의 참여는 거의 확실시 된다.
그렇다면 여러모로 사비강에게 대항할 패가 늘어나는 셈.
이보다 좋은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게다가 상필지는 이미 정교관이다.
사비강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다.
새로운 인물을 정교관으로 고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한 직무 변동일 뿐.
그러니 상필지가 낭아반 담임을 맡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갑자기 왜 담임을 맡으려는 건지 물어보진 않았다.
괜히 귀찮게 했다간 그가 발걸음을 돌려 버릴 수도 있었기에.
대신 최선을 다해 학장에게 건의하겠노라 약속했다.
“끄흠.”
주유천이 침음을 흘리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문제될 건 없다.
“상필지 교관을 낭아반 담임으로 임명하는 것에 대해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소?”
“찬성입니다.”
“저 역시 찬성합니다.”
일년생 교관들이 저마다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사실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도 그들은 공석을 메우기 위해 여러모로 바쁜 상황이었기에.
주유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상필지 교관을 낭아반 담임으로 임명하겠소.”
“감사합니다, 학장님. 덕분에 저희들도 한숨 돌리게 됐습니다.”
천세명이 환하게 웃으며 포권했다.
**
“어떻게 그런….”
당이협은 입을 척 벌린 채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의 발은 땅속에 파묻힌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앞서 걷던 사비강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후후. 믿기 어렵겠지.”
믿기 어렵다고?
천만에.
이건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애당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렇다.
이건 가능성에 대한 문제다.
가령, 둔재 중의 둔재가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초절정 고수가 됐다는 이야기는 믿고 말고의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둔재가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용으로 변신해서 승천해 버렸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이야기다.
즉 믿음의 영역을 떠난 이야기란 말이다.
지금까지 사비강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딱 그렇다.
마계는 무엇이며, 마수들은 무엇이고, 또 마왕은 뭔가?
마나와 정령은 무엇이며, 미래와 과거 회귀라니!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반응이라도 할 것이 아닌가?
“지금… 절 놀리시는 겁니까?”
어렵게 말을 꺼냈지만, 질문을 던지면서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어느 누가 고작 장난을 치기 위해 이런 허황된 이야기를 한 시진이나 떠들어댄단 말인가?
하지만 사비강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의 입에서는 스스로도 놀랄 만한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앞으로 얼마나 남았습니까? 마왕이 오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