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53화 (53/670)

# 53

귀환 마교관

53화

푸른빛으로 빛나는 실잠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능소소는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검지만한 사람.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그 소인(小人)은 등에 잠자리처럼 가늘고 긴 날개를 달고 있었다.

굉장히 낯선 광경이었지만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그러기엔 소인이 너무 작고, 아름다웠으며, 또 신비로웠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이지 않았을 때의 공포가 사라졌다.

부산스럽게 날개를 팔랑거리는 소인은 여기저기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한 명이 아닌 듯했다.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던 능소소가 마침내 입술을 열었다.

“웃은 건… 너희들이니?”

- 맞아요.

눈앞에 떠 있는 소인이 놀랍게도 대답을 했다.

그런데 귀로 들린다기보다는 뇌리에 울리는 느낌이었다.

“너희들은 누구니?”

- 전 태초의 호흡으로 탄생한 자, 흐름을 만드는 ‘실프’라고 합니다.

소인이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다른 소인들은 마치 자기들끼리 장난이라도 치듯 소곤거리거나 키득거렸다.

“실프….”

- 절 부른 건 맹약을 하기 위함인가요?

“불러? 내가 너희들을?”

- 네, 당신의 부름에 제가 여기로 소환되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맹약’이라는 건 또 뭐야?”

- 으음… 맹약이라는 건….

소인이 포로롱 날아올라서 허공을 잠시 서성이더니 생각을 정리한 듯 말했다.

- 당신의 부름에 언제든 제가 응한다는 거죠.

“혹시 아까 목검을 피하게 만든 것도 너희들이 한 일이야?”

- 맞아요. 당신이 그 순간 저를 필요로 했으니까요.

“하지만 난 맹약이라는 걸 하지 않았는데?”

- 당신은 이미 저와 친화력이 굉장히 높거든요. 그래서 부름에 응한 거예요. 그러나 맹약을 맺지 않은 상태에서는 저도 당신의 부름을 거절할 권리가 있답니다.

능소소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꿈을 꾸는 것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날개 달린 소인이 나타나더니 맹약이라는 것을 떠들어대니 현실감이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혹시 이게… 예전에 교관님이 말씀하신 황홀한 경험이라는 걸까?’

말 그대로 황홀했다.

눈앞의 신비로운 존재는 더 없이 친근하게만 느껴졌다.

맹약.

단어는 무겁고 딱딱하지만, 날개 달린 소인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결국 능소소는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맹약을 맺을게.”

- 좋아요. 맹약은 성립되었어요. 태초의 호흡이 그대와 함께 하길.

말을 마친 실프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더니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도 능소소는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부스럭.

갑자기 들린 소리에 능소소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어?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맹약이라니?

그게 뭔지는 알고 한 건가?

혹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무서운 건 아닐까?

‘정말 부르면 나타나는 걸까?’

‘한 번 불러볼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불쑥 들렸다.

“실프와 맹약을 맺은 모양이구나.”

“교관님!”

능소소가 반색하며 돌아보았다.

사비강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는 저벅저벅 다가왔다.

“교관님은 실프를 알고 계신 거예요?”

“물론이다. 바람의 정령이지.”

“바람의 정령요? 그럼 역시 귀신이나 영혼 같은 건가요?”

“조금 다르지만 그 비슷한 것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 말에 심술이라도 난 것인지, 사비강 주변으로 한 차례 강한 바람줄기가 불어 닥쳤다.

“실프는 하급 정령이다.”

“하급이라면… 더 위의 급도 있는 건가요?”

“중급, 상급, 최상급이 있지. 그리고 정령왕까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런 게 존재하고 실제로 대화도 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그럴 수밖에. 중원에서는 외부적인 환경보다 내적인 수양을 중심으로 무공이 발전했으니까.”

“마치 다른 곳에서는 주로 외부적인 환경을 이용한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그 말 그대로다. 그래서 준비해야만 하지. 그들의 싸움 방식에 맞서서.”

능소소는 무슨 뜻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잠자코 듣기만 했다.

“실제로 너는 정령술에 재능이 충만한 아이야. 그러니 정령술을 수양하는데 게을리 하지 마라.”

“하지만 수양 방법을 모르는데….”

“후후. 매일 밤마다 수양하지 않았더냐?”

“그럼 설마…?”

“그래. 내가 알려 준 구결들은 모두 정령술과 관련된 거다. 그리고 내가 알려 준 운기행공 역시 마찬가지고.”

“그럼, 수양을 열심히 하면 바람의 정령 말고도 다른 정령들과도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다. 물, 불, 대지. 심지어 감정을 다스리는 정령까지. 물론, 거기까지 발전하긴 좀 어렵겠지만.”

능소소는 멍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온통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조금 전 실프와 직접 계약까지 맺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

“참고로 정령들은 네 눈에만 보일 거다. 그리고 아직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자칫 마공으로 오해받기 딱 좋을 테니까.”

“네, 교관님. 명심할게요.”

“정령들은 본래 정령계에서 소환되는 거다. 때문에 이 세상에 마나가 없어도 정신력과 친화력이 출중하면 정령을 소환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루기가 까다로운 정령일수록 마나가 필요해진다.”

“마나… 그게 뭐죠?”

“차차 알게 될 거다. 어쨌든 축하한다. 열심히 한 보람이 있구나.”

사비강이 싱긋 웃었다.

능소소가 고개를 숙이고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

사비강이 돌아온 후 아침이 밝았다.

사비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동안 야외 수련을 이어갔다.

사비강이 알려 준 특유의 호흡법과 운기행공, 그리고 개별 지도였다.

물론 개별 지도를 거부하는 생도들도 있었다.

바로 연우경 무리였다.

마침내 다시 해가 저물고 밤이 깊었을 때.

“자, 이제 다들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쉬도록. 내일 우리는 이곳을 떠난다.”

사비강의 말에 생도들이 흩어지려는데.

“이제 그만 알려 주시죠?”

“음? 뭘 말이냐?”

사비강이 눈썹을 구기고는 연우경을 바라보았다.

연우경이 피식 웃고는 곡보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다 들었습니다. 저 협곡 안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러자 생도들의 시선이 모두 곡보옥에게 향했다.

그러고 보니 곡보옥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연우경 무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 혼자 서 있었다.

사비강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시치미를 떼실 생각이십니까? 이제 교관님이 직접 설명해 주시죠. 저 협곡 안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왜 사람들이 저곳을 저주 받은 곳이라고 하는지! 저희도 알 권리가 있습니다!”

연우경이 강하게 주장하자, 생도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사비강이 결국 한숨을 내쉬고는 대꾸했다.

“정 궁금하다고 하니 알려 주마.”

그러자 생도들은 물론 매설란도 마른 침을 삼키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저 안쪽에는….”

“…….”

“… 무인들이 산다.”

“뭐라고요?”

연우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른 생도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두루뭉술하지 않은가?

“꽤 강한 무인들이지. 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래서 그들에게 부탁을 하러 온 것이다. 이틀 동안 생각할 시간을 주었고, 지금은 기다리는 중이지.”

다시금 술렁거리는 생도들.

이번에는 매설란이 먼저 나서서 물었다.

“무인들이라니. 그자들이 누구죠? 설마 사파 무리는 아니겠죠?”

“사파 무리라고 하더라도 도움이 된다면 무슨 상관이겠소?”

“뭐라고요? 그건 굉장히 위험한 발언….”

“걱정 마시오. 사파는 아니오.”

“그럼?”

매설란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건대, 이번만큼은 쉽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집념이 엿보였다.

‘뭐, 어차피 알게 될 일.’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당이협과 그의 수하들이오.”

“당이협…?”

매설란이 눈살을 구기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왠지 귀에 익은 이름이다.

하지만 선뜻 떠오르진 않았다.

그러던 순간.

“설마…! 사천당가의 소가주였던 그 당이협 말인가요?”

“그렇소.”

“말도 안 돼!”

“하지만 사실이오.”

매설란은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당이협이 누군가?

한때 강호 백대 고수에 속하는 무인이지 않았나?

그러나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의 부하들과 함께.

그럼에도 사천당가는 후속 조치가 빨랐다.

이 공자를 빠르게 소가주로 임명해서 혼란을 최소화한 것.

마치 소가주가 사라질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한 조치였다.

때문에 항간에는 소가주와 이 공자 사이에서 권력 암투가 있었으리라 짐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가의 자제들은 우애가 남다르기로도 소문이 나 있었다.

그 어떤 곳보다도 가족애가 돈독한 가문이었다.

때문에 그 설은 별로 지지를 얻지 못했다.

어쨌거나 당이협이 사라진 것은 이 시대의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였다.

그런데 사천당가의 당이협이 이곳에 은신하고 있었다?

사천당가라는 말을 들은 생도들도 술렁거리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때 연우경이 느닷없이 소리치며 웃었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하하하!”

“뭐가 말이냐?”

“그게 사실이라면, 사천당가의 소가주가 왜 이런 곳에서 지내고 있었는지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끝까지 말씀하지 않을 생각이군요. 이미 목격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비강이 담담하게 대꾸하자 연우경이 이를 뿌득 갈고는 매설란에게 말했다.

“매설란 교관님! 우린 당장 여기를 벗어나야 합니다.”

“이유가 뭐지?”

“저 협곡 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연우경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생도들을 훑어 본 후 말을 이었다.

“문둥병자들입니다!”

“뭐라고?”

매설란이 비명처럼 소리쳤고, 생도들 역시 기겁을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매설란이 최대한 침착하게 되물었다.

“근거는?”

“곡보옥이 직접 목격했습니다.”

연우경의 손가락이 한쪽에 서 있는 곡보옥에게 향했다.

그러자 생도들이 우루루 흩어지며 곡보옥으로부터 멀어졌다.

곡보옥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사, 사실입니다. 그곳에서 전 문둥병자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참담한 표정이었다.

사실 연우경에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잠재적 문둥병자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았기에.

하지만 약삭빠른 연우경을 속이는 건 쉽지 않았다.

결국 추궁을 당한 끝에 실토하고 말았던 것.

“맙소사….”

매설란이 흔들리는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저 말이 사실인가요?”

그러고 보니, 곡보옥이 지난 밤 왜 그렇게 여길 떠나야 한다고 했는지 이해가 됐다.

생도들도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술렁거렸다.

“문둥병자라니. 어떻게 된 거야?”

“그러고 보니… 이곳 사람들이 말한 저주가….”

“여기저기 새겨진 낙서들도 이해가 돼.”

사비강이 나섰다.

“다들 진정들 해라. 문둥병은 전염병이 아니야. 그리고 저곳에 사는 자들은 문둥병자도 아니고. 수련에만 전념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헛소문을 퍼트렸을 뿐이다.”

“아, 아니야! 내가 직접 봤어! 그자들 얼굴을 똑똑히 봤다고! 분명히 썩어 가고 있었어! 그자들 전부… 시체나 다름없는 몰골이었다고!”

곡보옥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울부짖었다.

연우경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라고… 하는군요. 보옥은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개울에서 미친 듯이 몸을 씻었죠. 혹시나 그 저주받은 병에 감염되었을까 봐. 피가 나도록 개울에서 씻는 걸 제 두 눈으로 봤습니다.”

그는 쥐 죽은 듯 고요해진 주변을 한 차례 훑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당장 이 위험한 곳을 떠나 학관으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보옥이 입을 연 이상, 우리가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는 학관에서도 교관님께 책임을 묻게 될 것 같습니다.”

연우경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겼다.

드디어 저 괴짜 교관의 치명적인 실수를 찾아낸 거다.

하지만 사비강은 귀를 후비며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거참. 저 녀석이 헛 걸 본 거라니까.”

“그럴 리가 없…!”

그때였다.

슈슈슈슈슈슈슈슈슈슉!

갑자기 근방으로 검은 장포에 죽립을 푹 눌러 쓴 자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난데없이 나타난 무인들을 보며 생도들이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이자들은?”

찰나, 곡보옥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으아아악! 저, 저들이야! 저들이 바로 그 문둥병자들이라고! 우릴 처리해서 입을 막으려는 걸 거야! 아니면 우리마저 감염시킬 생각인 거야!”

그러자 생도들이 너도나도 진검을 뽑아 들며 경계했다.

차차차앙!

연우경 역시 검을 뽑아 들고는 그들을 향해 겨눴다.

마침 붉은 장포를 입은 남자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머, 멈춰라!”

연우경이 소리쳤다.

하지만 죽립을 눌러 쓴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연우경 앞에 멈춰 선 그가 탁한 목소리를 흘려냈다.

“감히, 이 당이협을 문둥병자로 몰아간다는 건… 사천당가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당이협이 천천히 죽립을 벗었다.

마침내 드러난 그의 얼굴.

그런데….

‘뭐야? 멀쩡하잖아?’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곡보옥이었다.

그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제법 준수한 외모.

어느 모로 보나 문둥병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연우경이 멍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당이협은 사비강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가더니 한쪽 무릎을 꿇으며 포권했다.

“당 아무개, 교관님의 뜻을 평생 따르겠습니다!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거두어 주십시오!”

장포를 걸친 사내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생도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그들을 보는 사비강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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