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귀환 마교관
46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노려보는 매설란을 보고는 사비강이 피식 웃어 버렸다.
“알겠소. 나갑시다.”
“정말… 정말 여길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이죠? 혹시라도 허세를 부리는 거라면 관두세요. 전 이곳을 벗어났다가 겨우 다시 돌아왔다고요. 자칫 미로를 헤매게 되면 물도 구할 수 없어요.”
“뭐, 그럼 여기서 좀 더 머물러도 좋….”
“이봐요!”
“알았소, 알았소. 갑시다.”
사비강이 옷을 챙겨 입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설란도 얼른 따라서 일어나자 사비강이 미간을 좁히고는 물었다.
“그러고 나갈 생각이오?”
“그럼요?”
“뭐라도 좀 걸치는 게….”
“아!”
그제야 매설란은 나체 차림이라는 것을 의식하고는 얼른 옷가지를 주워들고 가슴을 가렸다.
“뭐, 뭘 그렇게 보는 거예요!”
“누가 보면 내가 겁탈이라도 한 줄 알겠소.”
“시, 시끄러워요! 어서 나가기나 해요!”
“그럽시다. 일단 옷이나 좀 입으시오. 이래서야 같이 나가면 나도 낯이 팔리니까.”
매설란이 내심 발끈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 꾹 참고는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멀쩡한 거죠?”
“아, 그게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설명하기가….”
“아니. 나, 나랑 관계를 가졌으면서도 어째서 멀쩡한 거냐고 묻는 거예요.”
보통의 무인이라면 모든 공력을 잃었으리라.
하지만 사비강에게서는 한 줌의 공력도 흡수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사비강의 몸에서 내공 자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비강이 히죽 웃었다.
“내공을 전부 마나로 치환해 두었거든.”
“마… 뭐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죠?”
“뭐, 차차 알게 될 거요. 그러고 보니, 매 소저가 여기 있다는 건… 지금까지 생도들이 방치되어 있다는 말이군.”
매설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그걸 따질 때인가요? 어차피 수개월이 지났으니 생도들은 모두 학관으로 돌아갔을 거예요. 다들 무사히 귀환했기를 바랄 수밖에요.”
“그건 아니오.”
“왜요?”
“이곳 결계 안의 시간은 바깥의 시간과 다르거든.”
“결계? 그게 이 동혈에 설치된 기관진식의 이름인가요?”
“뭐, 그런 거라고 합시다.”
대충 대꾸하는 사비강을 보면서 매설란이 입술을 꾹 씹었다.
어쩐지 대화를 길게 나눌수록 자신이 점점 바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세상에 시간을 다르게 흐르도록 하는 기관진식이 있단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요.”
“그렇지만 사실이오.”
“그런…!”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니?
하지만 왜 이 남자 말은 믿어지는 걸까?
사비강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
“아마 바깥에서는 아직도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을 거요.”
“말도 안 돼!”
“뭐, 나중에 확인해 보시오. 내 말이 틀린지, 맞는지.”
“그럼, 지금이라도 어서 나가요!”
“그럽시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신호탄이 터진 것도 보았는데, 매 소저가 함께 있을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군.”
“신호탄이라고요? 그럼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생도가 위험에 빠졌을 수도 있는 것 아니에요?”
“괜찮소. 여기서 우리가 하루를 더 보내도 밖에서는 반각도 흐르지 않소.”
“그렇다고 여기서 언제까지 뭉그적거릴 거예요! 생도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좀 기다려도 괜찮소. 그 녀석들도 이 기회에 교관의 소중함을 좀 알아야지.”
“그걸 말이라고 해요? 지금!”
결국 매설란이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매 소저?”
“이번엔 또 왜요?”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오.”
사비강이 반대 방향의 길을 가리켰다.
“무슨 소리예요? 그쪽은 당신이 들어왔던 길이잖아요?”
“그래도 이쪽이오.”
사비강이 씩 웃었다.
순간 매설란은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얼른 시선을 피하고는 말했다.
“그, 그럼 당신이 길을 아니까 앞장서요.”
“그렇게 합시다. 자, 그럼 손을 잡고.”
“손, 손은 왜요?”
매설란이 얼른 자기 손을 만지며 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품은 사이면서 저렇듯 수줍어하는 것이 귀엽기도 하다.
사비강이 픽 웃었다.
‘이런 여자가 매혼섭공은 어떻게 익힌 거지?’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라도 떨어져서 또 길을 잃으면… 그땐 몇 년을 혼자 지내야 할지도 모르지 않소?”
상상하기도 싫은 일.
“뭐, 정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사비강이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매설란이 얼른 달려왔다.
“기, 기다려요! 누가 싫대요? 그냥 이유를 물어본 거라고요. 이유를!”
사비강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매설란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손… 놓지 말아요. 절대.”
“물론이오.”
**
자정이 지났다.
객잔 앞마당에 모인 생도들은 저마다 입을 꾹 다문 채 골목 끝만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표정으로.
마침내.
“안 되겠어. 우리끼리 가자.”
단리정의 말에 생도들이 모두 그를 돌아보았다.
연무기행을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숫기가 없어서 묻는 말에도 잘 대답하지 못하던 그였다.
그런데 이제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가장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었다.
“그럼, 교관님은?”
생도 중 한 명이 물었다.
단리정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오늘 돌아오실 것 같지가 않아. 이대로라면 너무 늦어 버릴 지도 몰라.”
한 시진 전에 객잔에서 신호탄을 던져 올렸다.
그런데 아직도 사비강과 매설란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염자량이 단리정의 의견에 동참했다.
“그래, 이젠 더 이상 교관님만 기다릴 수는 없어. 우리끼리라도 가자. 가서 동기들을 구하자.”
“우리가 흑도쌍괴를 상대로? 그놈들이 그렇게 강하다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곡보옥이 눈썹을 성큼 추켜세우며 따졌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 자칫하면 목단화 일행이 위험에 빠질 수도….”
“그보단 먼저 학관에 알리는 게 어떨까?”
연우경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향했다.
“학관에 알려서 어쩌려고?”
“일단은 사고가 생겼으니, 누군가는 학관으로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려야하지 않을까? 교관님이 둘 다 행방불명되고, 목단화 일행이 흑도쌍괴에게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알려야지.”
“그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잖아! 지금은 단 한 사람의 전력도 아쉬운 상황이라고!”
“그러다가 우리가 전부 잘못되면?”
“뭐?”
“사실 교관님들이 전부 사라진 것도 이해가 안 돼. 어쩌면 교관님들도 흑도쌍괴에게 당한 게 아닐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염자량이 흔들리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일단은 반발을 했지만, 그 역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설마 아닐 거야. 교관님이 그런 놈들에게 당할 리가 없어.’
그때였다.
“그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귀에 익은 목소리!
염자량은 물론 생도들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교관님!”
단리정이 제일 먼저 소리쳤다.
그곳에는 사비강과 매설란이 다가오고 있었다.
연우경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뭐야? 멀쩡하게 살아 있었잖아?’
그가 불쑥 한 걸음 나서더니 따졌다.
“교관님. 지금까지 어디에 계셨던 거죠? 저희 신호탄은 보신…!”
“봤으니까 왔잖냐?”
“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그건 네 감이고.”
마침 단리정이 얼른 사비강 앞으로 달려갔다.
“교관님! 목단화와 민유향…!”
“알고 있다. 그동안 마음고생들 많았다. 이젠 내게 맡겨라.”
“어떻게 알고 계시는…?”
“오는 길에 너희들이 하는 얘기를 좀 들었다.”
단리정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사비강이 연우경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너희들. 매 교관에게 들었다. 어젯밤 능소소를 미행했다고 하던데, 혹시 목단화 납치 사건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니겠지?”
“무, 무슨 소립니까? 우린 미행을 한 적이 없…!”
그 순간 매설란이 한 걸음 나섰다.
“나를 상대로 시치미를 뗄 생각이니? 내가 어젯밤 소소에게 다가갔을 때, 너희들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
“그, 그건…!”
연우경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쳤다.
이내 그가 침착함을 되찾고 대꾸했다.
“그저 장난을 좀 치려던 것뿐이었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 전혀 상관없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알겠다. 너희들이 나를 상대로 장난을 치는 건 얼마든지 받아 주마. 하지만 다른 생도들에게 피해가 간다면 그땐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그럼, 다들 숙소로 들어가라. 매 교관이 너희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생도들이 술렁거리며 객잔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매설란이 다가와 짐짓 먼 산을 보며 슬쩍 말을 건넸다.
“조, 조심해요.”
“걱정 마시오.”
“걱정은 누가….”
조그맣게 중얼거린 그녀가 얼른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객잔으로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서성이는 생도가 있었다.
바로 조문탁이었다.
그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어… 교관님.”
“왜?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
“그 여자 생도들. 꼭… 구해야 하나요?”
“그게 무슨 말이지?”
“사실은 그 여자 생도들… 일부러 납치당한 거예요!”
“일부러 납치를 당하다니?”
조문탁이 주위를 한 번 훑어보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어젯밤에 연우경 방을 지나다가 우연히 들었어요. 연우경 방에 목단화 무리가 들어가는 걸 봤거든요.”
사비강의 묘한 시선을 느낀 조문탁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 단순한 호기심으로 엿들은 거예요. 사, 사실은 뭔가 야한 장난이라도 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죄송합니다.”
어쨌든 타인의 대화를 엿들은 행동이 떳떳한 것은 아니었기에 조문탁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뭐, 그거 때문에 널 본 건 아니다.”
사비강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조문탁이 그날 엿들었던 내용을 모두 전해 주었다.
“그러니까 전 교관님이 그 생도들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업자득이라고요. 필요하다면 저도 학관에서 증언하겠습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흐음. 그렇게 된 거군.”
사비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은 다른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문탁이 원래 일찍 죽었지.’
사실 조문탁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존재감 자체가 희미하던 녀석.
마계의 침공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는 사파 무인의 손에 죽어 버린다.
그래서 그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런데 이제 보니….
‘이 녀석도 제법 쓸 만한 재주가 있었군.’
목단화는 생도들 중에서도 기감이 뛰어난 자다.
그런 그녀를 상대로 기척을 죽이고 엿듣기까지 했다는 건 분명한 재능이다.
잘 키우면 미래에 도움이 될 녀석.
“어쨌든 네가 동기생의 대화를 엿들은 것은 잘한 짓이 아니니, 내일 밤부터 매일 날 찾아오도록 해라. 가벼운 벌을 주마.”
“예? 아, 예….”
“그럼, 숙소에 들어가 있어라.”
“저… 가실 겁니까? 목단화를 구하러?”
“가야지. 이래봬도 교관인데….”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생도들을…!”
“네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네?”
“나한텐 별로 위험을 감수하는 게 아냐.”
사비강이 히죽 웃어 보이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편, 객잔 이 층에서 창밖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칫, 목단화가 느꼈다던 기척이 저 녀석이었나? 저놈, 쓸데없는 소리를…!’
그가 이를 뿌득 갈고는 객잔으로 들어서는 조문탁을 빤히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