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귀환 마교관
39화
밤늦은 시각.
능소소는 마구간에 들렀다.
그녀가 말의 머리를 쓰다듬고 갈기를 어루만져 주자, 녀석은 기분이 좋은 듯 투레질을 했다.
‘왠지 네 마음이 내게 전해지는 것 같아.’
단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는 최근 들어서 말의 상태에 대해서 훨씬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어떤 날 기분이 좋은지, 어떤 날 상태가 별로인지.
그리고 언제쯤 지치는지.
지금처럼 말갈기를 쓰다듬으며 눈을 보고 있자면, 마치 대화라도 나누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능소소는 건초더미를 열 마리의 말들에게 모두 나눠 준 다음 마구간을 나섰다.
아직도 뺨을 스치는 밤공기는 차가웠다.
눈을 지그시 감고 걸음을 옮겼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이 예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가느다란 실들이 손가락을 휘어 감으며 부드럽게 쓸려가는 듯했다.
공기의 형태가 손으로 만져진다는 느낌일까?
지금처럼 차가운 공기는 그만의 특징이 있다.
어딘지 날카롭고 예민한 성격처럼 보인다.
바람을 만지며 성격이라니.
능소소가 혼자 피식 웃었다.
마치 바람을 사람처럼 대하질 않나?
하긴, 바람을 만진다는 표현도 우습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바람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소중하게.
그리고 그 바람의 성격이 다시 살짝 바뀌는 기분이 들었을 때.
“응?”
능소소가 눈을 떴다.
‘뭔가 공기가 달라졌어.’
역시 기분 탓이 아니다.
이건 확신에 가깝다.
부드럽게 손가락마다 휘어 감기던 바람이 아주 잠깐 흐트러졌던 것.
마침 뒤쪽의 공기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능소소는 휙 몸을 돌렸다.
그녀는 자신의 앞을 막은 그림자를 보고 반사적으로 물러나며 비명을 내질렀다.
“꺄악!”
“어맛!”
상대도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능소소가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교, 교관님?”
“휴우,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니? 내가 더 깜짝 놀랐잖아.”
“앗, 죄, 죄송해요! 갑자기 뒤에 서 계셔서….”
능소소가 얼른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달려가려는데.
“잠, 잠깐만.”
“네?”
“너에게 뭐 좀… 물어볼 게 있어.”
매설란이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능소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게요? 그게 뭔데요?”
“으음. 일, 일단 따라와.”
“앗!”
매설란이 능소소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데 이 아이, 조금 전에 내 기척을 느낀 건가?’
매설란은 걸어가면서 잠깐 생각을 떠올렸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일부러 은밀하게 접근한 것은 아니었지만, 습관처럼 기척을 없애긴 했다.
그런데 기껏해야 평범한 생도인 능소소가 자신을 눈치 챘을 리가 없지 않나?
뒤를 돌아본 건 우연이리라.
**
“네?”
능소소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밤이 꽤 깊은 시각이었기에 숙소로 잡은 객잔 일 층에는 두 사람 밖에 없었다.
매설란이 이마를 곱게 찡그리곤 물었다.
“사비강 교관을 어떻게 생각하니?”
“그, 그야… 좋으신 분이라고….”
능소소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꾸했다.
매설란이 그녀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거리가 갑자기 가까워지자 능소소가 당황하며 허둥거렸다.
“왜, 왜 그러세요? 교관님?”
그러면서도 내심 매설란의 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아름다우시구나. 같은 여자가 봐도 반할 만큼 예뻐.’
매설란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혹시… 사 교관님을 좋아하니? 아니, 사랑하니?”
“네에?”
능소소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매설란이 얼른 검지를 입술에 대며 주의를 주었다.
“쉿. 목소리가 너무 커.”
“아, 죄, 죄송해요! 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야. 사비강 교관님을 사랑하고 있는 거니?”
“그, 그럴 리가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능소소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흐응. 나한텐 괜찮아. 사실대로 말해도 다 이해하니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교관님을 좋아하긴 하지만…. 아, 물론 교관님으로서 좋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사랑하는 건 아니에요.”
능소소가 ‘사랑’이라는 말을 꺼낼 때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매설란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다시 물었다.
“난 정말 괜찮으니까, 진심으로 대답하렴.”
“정말이에요, 교관님.”
“흐음, 그럼 하룻밤의 불장난이었다는 거구나.”
“네? 그게 무슨…?”
“뭐, 그럴 수도 있지. 순정파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도 약았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좋아. 나도 모른 척 해줄 테니 대신 어떤 방법을 쓴 건지 말해 봐.”
“네? 방법이라니요?”
“그러지 말고 말해 봐. 내가 볼 때, 넌 내가 제자로 삼기에 훌륭한 자질을 갖춰서 그런 거니까.”
물론, 그건 핑계였다.
매설란으로서는 그저 돌덩이 같은 사비강을 넘어뜨려 뜨거운 밤을 보낸 능소소의 전략이 무엇인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해졌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교관님. 전 정말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머리가 나쁜가 봐요.”
“너 끝까지 이럴 거니? 밤마다 네가 사비강 교관이랑 방에서 하는 짓을 내가 모를 줄 알아?”
“아아, 운기요?”
“뭐?”
“사비강 교관님이 제게 운공법을 가르쳐 주는 걸 말씀하시는 거죠?”
“운공법… 이라고?”
“네. 그거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저도 어떤 방법인지 구체적으로 말하기가 어려….”
“잠, 잠깐만. 그럼 밤마다 넌 사 교관이랑 운기행공을 했단 말이야?”
“네. 사비강 교관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럴 리가….”
“네?”
능소소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매설란은 맥이 탁 풀린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제야 자신의 머릿속에서 각색되었던 두 사람의 대화가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게 운기행공이었단 말이야? 사비강 도대체 이 남자는 뭐야?’
매설란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
“제길, 갑자기 매설란 교관이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했어.”
곡보옥이 투덜거렸다.
마구간에서 나오는 능소소를 납치하려고 할 때, 갑자기 매설란이 나타난 것이다.
매설란과 능소소는 아직도 일 층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일 다시 시도해야 할 것 같아.”
곡보옥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때.
“그건 너무 위험한 발상 아닐까요?”
새가 지저귀듯 아름다운 목소리가 방안에 흘러들어 왔다.
연우경을 비롯한 생도들이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꽃송이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목단화가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 뒤로 민유향과 백미령도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대를 하는 목단화였지만, 연우경과 그 측근들에게만큼은 쉽게 말을 놓지 못했다.
연우경이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하면 목 소저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소? 내 알기로 목 소저도 사비강 교관에게 그리 좋은 감정이 아닌 것으로 아오만.”
“물론, 자질도 부족한 그런 교관에게 제가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없죠.”
“후후후. 해서 뭔가 계획이라도?”
“납치예요. 지금으로선 제일 좋은 방법이 납치밖에 없어요.”
곡보옥이 눈썹을 구기며 물었다.
“납치? 납치는 좀 전에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납치를 하는 게 아니라, 당하는 거죠.”
“그게 무슨 말이오?”
“흑도쌍괴에게 우리가 납치를 당하는 거죠.”
목단화가 자신을 비롯해 민유향과 백미령을 가리켰다.
뜻밖의 발언에 곡보옥이 입을 딱 벌리고는 연우경을 돌아보았다.
연우경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과연 나쁘진 않은 방법이오. 하지만 너무 위험하지 않겠소? 일부러 납치를 당하려다가 정말 곤란한 상황이 생긴다면….”
“물론, 우리가 실제로 납치당할 생각은 없어요.”
“하면?”
“흑도쌍괴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까지 간 다음 우리는 스스로 잠적. 그렇게 되면 소문이 어떻게 날까요?”
“역시나 흑도쌍괴에게 납치당했다는 소문이 나겠군.”
“그렇죠. 흑도쌍괴도 우리 정도면 침을 흘리지 않겠어요?”
“과연. 그 소문을 완성하는 건 우리 몫이 되겠군.”
연우경이 씨익 웃었다.
“역시 목 소저의 깊은 생각은 따라갈 수가 없구려.”
“과찬이에요.”
웃으며 답하던 그녀가 잠깐 멈칫거렸다.
‘방금 전… 문밖에서 기척이?’
얼른 문을 열어 본 목단화는 텅 빈 복도를 확인하고는 돌아섰다.
‘기분 탓인가?’
“왜 그러시오?”
연우경의 질문에 목단화가 가볍게 대꾸했다.
“아니에요. 잠시 착각했어요.”
**
밤늦게 돌아온 사비강은 다음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도대체 어딜 가는 거지?’
사비강을 미행하는 매설란은 이마를 곱게 찡그리고는 저만치 걸어가는 사비강을 보았다.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는 걸로 보아서는 목적지가 분명한 듯했다.
그나저나 운기행공이라니.
밤마다 능소소를 불러서 운기를 도와줬단 말인가?
어젯밤 능소소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니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마터면 생도 앞에서 추태를 보일 뻔하지 않았나?
‘흥, 그래도 교관이라고 생도들의 무공 증진을 돕고는 있었단 말이지?’
참 알수록 묘한 남자다.
어떨 때는 무책임하기가 이를 데 없을 정도로 막무가내 같은데, 또 어떨 때는 생각지도 못한 것까지 챙기는 세심함이 보인다.
‘이렇게 되면 정말 고자일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건가?’
매설란은 복잡한 머릿속 생각들을 떨쳐내며 꾸준히 뒤를 밟았다.
그런데 점점 사비강의 속도가 빨라졌다.
‘뭐야? 왜 저렇게 빨라?’
점점 숨이 차올랐다.
나중에는 아예 이를 악물고 사비강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거리가 더욱 벌어졌다.
‘산으로?’
도대체 산 위에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거지?
‘자칫하면 놓쳐 버리겠어!’
이제 그녀는 모든 공력을 경공에 쏟아 부으며 뒤쫓고 있었다.
마침 사비강이 깎아지른 듯 높은 암벽 모퉁이를 돌아갔다.
‘안 돼!’
더 이상 거리가 벌어지면 놓쳐 버린다.
파팟!
그녀가 새처럼 날아가 암벽 모퉁이를 돌아섰다.
하지만….
‘놓쳤어!’
사비강이 보이지 않았다.
얼른 높은 나무 위로 몸을 날려서 근방을 살폈다.
마찬가지였다.
“쳇! 어딜 간 거지?”
거리가 꽤 벌어졌다곤 하지만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줄이야.
기감을 펼쳐 보아도 느껴지는 것이 없다.
그 정도의 경공술을 사용한다면 당연히 감지되어야 할 텐데.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이제는 정말 사비강을 놓쳐 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부아가 치밀었다.
무심코 바닥의 돌멩이를 걷어찬 순간.
“어?”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방금… 뭐지?’
허공을 날아간 돌멩이가 암벽에 부딪치는가 싶더니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커다란 눈을 끔뻑이던 그녀가 얼른 돌멩이를 주워 들고는 암벽을 향해 던졌다.
쑤욱.
마치 암벽이 돌멩이를 집어삼키듯, 이번에도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설마…?’
놀란 그녀가 얼른 암벽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딱딱하다.
분명 벽이다.
다시 물러나서 돌멩이를 집어던졌다.
쑤욱.
어떠한 마찰음도 없이 돌멩이는 그대로 암벽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게 무슨 조화야?’
매설란은 아예 두 눈을 감고는 손을 슥 뻗어 보았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으니, 아예 보지 않기로 작정한 것.
쑤욱.
놀랍게도 손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여느 공기와는 다르게 물컹한 이질감이 느껴지긴 했다.
마치 얇은 막을 지나가는 듯.
깜짝 놀라 눈을 뜨니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이 암벽을 더듬고 있었다.
기관진식인가!
하지만 이런 식의 기관진식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좋아, 그럼!’
매설란이 심호흡을 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물컹.
묘한 이질감이 전신을 휩쓸 듯 지나쳤다.
마침내 서서히 눈을 뜬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 삼키고 말았다.
“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