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귀환 마교관
38화
촤르르.
물방울이 미끈한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가녀린 어깨와 굴곡진 가슴, 잘록한 허리를 지나 부드럽게 솟아 오른 엉덩이, 그리고 꿀을 바른 것처럼 반들거리는 허벅지를 따라서 얇은 종아리까지.
그야말로 깎아 놓은 조각이 따로 없었다.
매설란은 젖은 머리카락을 한 차례 흔들고는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감쌌다.
정말이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
그녀는 동경에 비친 자신의 가슴을 한 차례 쓰다듬고는 살짝 미소 지었다.
이만하면 됐다.
‘오늘이야 말로.’
매설란은 속옷을 입은 후 몸의 굴곡이 여실히 드러나는 얇은 옷을 걸쳤다.
물론, 거기에 앞섶을 풀어헤쳐 풍만한 가슴이 도드라져 보이도록 했다.
‘좋아, 이만하면 됐어.’
자신감에 찬 그녀가 문을 활짝 열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저는 목욕을 끝냈으니, 이제 교관님이 씻을 차례… 인데…?”
방긋 웃으며 말을 꺼내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어둑한 방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탁자 위에 서신이 놓여 있었다.
- 곧 돌아오겠소. 생도들을 부탁드리오. -
매설란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여인이 알몸으로 목욕을 하는데, 어떠한 긴장감도 없이 자리를 비워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금껏 자신이 만나 본 사람 중에서 이런 부류의 인간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이익! 사비강!’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수건을 집어던졌다.
**
“흐음. 저 둘 중 한 군데군.”
사비강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위에서 먼발치의 산을 바라보았다.
토끼의 귀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은 토이산(兎耳山).
이름대로 커다란 봉우리 두 곳이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좌이봉, 다른 하나는 우이봉으로 불렸다.
사비강이 찾아가야 할 곳은 좌이봉이다.
하지만 보는 방향에 따라 오른쪽과 왼쪽이 달라지니, 어느 쪽이 좌이봉인지 눈으로 보아서는 판단이 되지 않는다.
‘오늘은 일단 좀 쉬고 내일 가야겠군.’
좌이봉에서 취해야 할 물건은 지금까지 수거한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아마도 자신에게 있어서 이번 생의 전환점이 되리라.
그만큼 결계도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뭐, 그래봐야 마나를 아예 모르는 중원인을 의식한 것이니 그리 큰 위협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다.
우선 좌이봉이 어느 쪽인지 먼저 알아 두어야 한다.
그리고 내일 날이 밝았을 때, 좌이봉으로 향한다.
음기가 강한 밤보다는 음기가 약한 대낮에 찾으러 가는 것이 낫다.
그만큼 결계의 속성이 약해지기 때문에.
‘그럼, 객잔 주인장에게 물어볼까?’
턱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사비강이 문득 이맛살을 찌푸리고 먼발치를 바라보았다.
제법 먼 거리.
어둑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이 마을 사람들인가? 잘 됐군. 저들에게 물어보면 되겠다.’
위저드 아이 마법을 통해서 일단의 무리를 확인한 사비강이 나뭇가지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
“어이, 지금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
악소(惡少)는 빠진 앞니 사이로 침을 찍 뱉고는 으르렁거렸다.
봇짐을 멘 행인들이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나리, 한 번만 봐 주십쇼. 이것마저 없으면 저희들은 굶어 죽습니다요.”
“너희들 눈엔 내가 나리로 보여?”
“…….”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군. 내가 나리였으면 여기서 왜 선량한 네놈들을 협박하고 있겠어? 난 도적이란 말이야. 그래서 지금 내 일을 충실히 하는 중이지.”
악소의 말에 곁에 있던 도적 세 명이 킬킬거리며 웃어댔다.
그 중 한 명이 칼등으로 제 목을 툭툭 치며 말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네놈들 중에 계집년이 있었으면 우리랑 같이 갔어야 했다고.”
“자자, 그러니 군말하지 말고 가진 걸 내놓자. 해도 저물었는데 얼른 돌아가야 할 것 아냐?”
다섯 명의 행인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무기를 든 도적이 모두 넷이나 된다.
무공까지 익힌 것 같다.
머릿수는 이쪽이 많지만, 싸움으로 이겨낼 재간이 없다.
결국 그들은 단념을 했는지 긴 한숨을 내쉬며 짐을 풀었다.
“여, 여기….”
“가진 건 그게 전부냐?”
악소가 봇짐들을 훑어보고는 물었다.
나이가 지긋한 행인이 허리까지 숙이며 말했다.
“말씀하신대로 다 내놓았습니다요. 그만 이제 저희들을 보내 주시지요.”
“만약 너희들 품을 뒤져서 뭐라도 나오면 죽는다?”
“하, 하지만 이게 전부인데….”
“그러니까 뒤져서 나오면 죽는다고 했잖아. 나오면.”
행인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악소가 그 반응을 즐기는 듯 바라보다가 히죽 웃었다.
“내가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마지막 기회를 주지. 지금이라도 가진 걸 전부 내놓으면….”
“거기, 말 좀 물읍시다.”
“그래, 물어… 음?”
무심코 대꾸를 하던 악소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의 곁에 선 도적들도 덩달아 몸을 돌렸다.
제법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를 가진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서역에서나 볼법한 특이한 모양의 검을 패용하고 있었는데, 바로 사비강이었다.
‘저건 또 뭐야? 무인인가?’
악소가 미간을 좁혔다.
도적들이 악소의 눈치를 살피며 속삭였다.
“형님, 무인인 것 같습니다. 어쩌죠?”
“어쩌긴 뭘 어째? 머릿수는 우리가 훨씬 많다. 쫄 것 없어.”
무공이라면 이쪽도 익혔다.
상대가 이, 삼류의 실력을 지녔다면 머릿수가 많은 이쪽이 훨씬 유리할 터.
사비강은 흉흉한 분위기를 눈치 채지도 못한 건지, 나이가 지긋한 행인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어르신이 길을 제일 잘 알 것 같군요. 혹시 저기 보이는 두 봉우리 중에서 좌이봉이 어느 쪽인지 아십니까?”
노인이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좌, 좌이봉… 말씀이시오?”
얼떨결에 대꾸하자 사비강이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예, 반드시 알아야 해서요. 혹시 알고 계시는지요?”
“저, 저쪽이오만.”
노인이 봉우리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확실한 겁니까? 저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이라서 말입니다. 헛걸음을 하긴 싫거든요.”
“무, 물론이오.”
“그럼, 혹시 좌이봉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가장 빠른 길인지요?”
노인이 슬쩍 악소의 눈치를 살피려는데.
“꼭 좀 부탁드립니다. 무척 중요한 일이거든요.”
사비강이 그의 손을 덥석 잡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도 노인이 얼떨결에 대꾸했다.
“그, 그건… 이 길을 따라가다가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노인이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악소는 기가 찬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이것들이 지금 뭐하는 거야?’
도적질을 하는 현장에서 길을 물어?
제정신인가?
“어이.”
악소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렀다.
하지만 사비강은 노인으로부터 길을 안내 받느라 정신없었다.
악소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이봐! 네 눈에는 지금 우리가 안 보이냐?”
악소가 큰소리로 으르렁거리자 뒤늦게 사비강이 고개를 돌렸다.
“으음? 나한테 볼 일이라도 있나? 그럼 좀 기다려. 아직 내 용무가 끝나지 않았잖아. 잠깐이면 된다고.”
“뭐, 뭐라?”
악소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지만, 사비강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눈치를 보는 노인에게 괜찮으니 마저 설명을 해달라며 재촉했다.
마침내 모든 설명을 들은 사비강이 포권을 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그러더니 악소를 돌아본 사비강이 방긋 웃었다.
“자, 이제 그쪽 차례인가? 아까 나한테 용무가 있던 것 같던데? 왜 불렀지?”
악소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마침 곁에 있던 도적 하나가 악소에게 속삭였다.
“형님, 우리를 무시하는 건지, 우리가 무서워서 비위를 맞추려고 저러는 건지 좀 애매한데요?”
악소가 이를 뿌드득 갈고는 소리쳤다.
“어이! 애송이.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로 보이냐? 네놈이 그렇게 편안하게 우리한테 질문을 던질 자리로 보이는 거냐? 너, 우리가 누군지는 아는 거냐?”
“그럼, 알고말고.”
뜻밖의 대답에 악소가 움찔거렸다.
“아, 안다고? 우리가 누군데?”
“너희들 마빡에 써 있잖아. ‘도․적․새․끼’라고.”
사비강의 얼굴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게다가 기도가 아까와는 좀 달라졌다.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린 행인들이 소리쳤다.
“대, 대협! 우리 좀 구해 주십시오!”
“이놈들에게 지금 협박을 받고 있습니다!”
악소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시끄럽다! 이 새끼들아! 어이, 이왕 이렇게 된 것. 너도 그 검이나 내놓고 가라.”
악소가 사비강의 검을 가리켰다.
사비강이 툴툴 웃었다.
“이거 주면 너희들은 뒈져.”
“뭐?”
“아무래도 그냥 갈 수 없게 됐군. 도움을 받은 데다 쓰레기들이 날 무시하니까 기분이 엿 같아서 말이지.”
“이제 보니 아주 제대로 미친놈이었군.”
악소를 비롯한 도적들이 저마다 무기를 뽑아 들고는 사비강을 에워쌌다.
그러는 동안에도 사비강은 팔짱만 낀 채 행인들을 향해 일렀다.
“여러분은 그만 가보십시오.”
“가긴 어딜 가. 너희들 꼼짝 말고 있어. 이놈 죽여 버리고 너희들도 손을 좀 봐야겠으니까.”
“걱정 말고 가시오. 내가 책임질 테니.”
“가면 네놈들도 죽여 버린다.”
사비강과 악소가 번갈아 가며 말했다.
행인들이 어쩔 줄을 몰라 안절부절 못했다.
사비강이 다시 말했다.
“길 안내를 받은 답례요. 얼른 가시오.”
“하지만….”
“가!”
사비강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내력이 담긴 목소리가 밤공기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제야 행인들이 얼른 봇짐을 챙겨들고 부랴부랴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편, 악소를 비롯한 도적들은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사비강을 바라보았다.
‘방, 방금 그 목소리는…!’
절대 이, 삼류 무인이 낼 수 있는 발성이 아니다.
굳이 대적하지 않아도 조금 전의 목소리만으로도 심후한 공력이 느껴졌다.
‘젠장! 고수였던가?’
그제야 악소는 상대를 잘못 봤다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사비강이 중얼거렸다.
“실력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 하는데. 너희들은 눈치도 없고, 싸가지도 없어. 그러니 삶이 팍팍해질 수밖에 없는 거다.”
화르르륵.
어느새 사비강의 손에 불의 기운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헉!”
악소를 비롯한 도적들이 헛바람을 집어 삼키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저건 뭐야? 갑자기 불이…!’
‘저런 건 본 적도 없어!’
네 사람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악소가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쥐어짰다.
“저, 저기… 저희들이 고인을 몰라 봬서….”
“늦었어.”
차갑게 말을 뱉은 사비강의 손에서 화염 창이 날아갔다.
화르르르륵!
“우, 우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뒤를 이었다.
**
“뭐? 납치? 쿨럭!”
차를 마시던 곡보옥이 사레가 걸려 기침을 했다.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은 그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연우경을 보며 물었다.
“농… 이지?”
“그런 재미없는 농을 왜 하겠어?”
“정말 납치를 하자는 거야?”
“그래. 어차피 사비강 교관은 이곳에서 이틀씩이나 보낼 생각이야.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개인적인 볼일이 있을 테지.”
“하긴, 그런 게 아니라면 이런 외진 마을에서 그렇게 머물 이유가 없으니까.”
“그 말인즉, 우리에게도 기회가 많다는 거다. 교관이 개인적인 용무를 보는 동안 우리 행동도 그만큼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 있지.”
“그렇지만 납치라니….”
곡보옥이 그래도 조금 마음에 걸린다는 듯 중얼거렸다.
연우경은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너도 들었잖아. 이 마을에서 요즘 흑도쌍괴가 설치고 다닌다는 말. 그놈들 특기가 뭐였어?”
“그야 납치… 설마…?”
“그래. 우리가 한 짓을 그놈들이 한 짓으로 몰아가는 건 일도 아냐. 생각해 봐. 연무기행 도중 생도가 납치됐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지게 될까?”
곡보옥의 표정에 웃음기가 살짝 돌았다.
“흐흐흐. 재미있겠는데?”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기회야.”
“그런데 누굴 납치하는 게 좋을까?”
“그야, 교관과 친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여자일수록 좋겠지.”
연우경이 희미하게 웃으며 턱짓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마침 객잔 아래로 능소소가 마구간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곡보옥의 표정이 사악한 미소로 물들었다.
“흐흐흐. 마침 딱이군.”
연우경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날 이후로 마음을 바꿨지.”
“나도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엉덩이가 아직도 아픈 것 같아.”
흑사방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날 엉덩이에서 피가 나도록 두드려 맞은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열불이 뻗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