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귀환 마교관
37화
“흐음.”
이번에는 은기륭이 침음을 흘리고는 가만히 수면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 지적은 일리가 있구려.”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생도들이 다녀갔던 곳에 그런 끔찍한 일이 발생했으니, 우선은 연무기행을 중단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리라.
천세명이 은기륭을 보았다.
“관주님. 생도들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사람을 보내 주십시오.”
“흐음. 좋소, 사람을 보내 특목반의 연무기행을 중단시키고 사 교관을 곧장 학관으로 불러….”
그때였다.
“천 교관님!”
먼발치에서 등부형이 경공을 펼치며 달려왔다.
청심지에 도착한 그는 곧 주유천과 은기륭을 보고는 예를 갖췄다.
주유천이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안강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안강에서?”
이번에는 세 사람 모두 등부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천세명이 ‘옳다구나’ 하고는 소리쳤다.
“이것 보십시오! 안강에서 왜 사람이 여기까지 찾아오겠습니까? 정도맹도 아닌, 이 용천관에! 이건 필시 그 사건과 사비강 교관이 연관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당장 그자를 잡아들여야 합니다!”
‘불러들이자’는 표현이 단숨에 과격해졌다.
마침내 은기륭이 천천히 일어섰다.
“오늘은 영 고기가 잡히지 않는구려. 그런데 안강에서 오신 그 손님은…?”
그의 시선을 받은 등부형이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창천문주 호요범입니다.”
그 말에 주유천과 천세명이 흠칫거렸다.
문주가 직접 찾아올 정도로 심각한 일이라는 건가?
“그럼, 한 번 만나러 가봅시다.”
관주가 수염을 쓸고는 걸음을 옮겼다.
주유천이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한편, 천세명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내심 웃음을 참지 못했다.
‘후후후. 사비강! 드디어 네놈이 끝장나는구나!’
어떤 식으로 엮였는지 모르겠지만, 세 문파가 사라진 사건이다.
필시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되리라.
**
주유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다 무엇이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상자를 보았다.
상자 안에는 은괴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마주 앉은 호요범이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저희들의 작은 정성입니다.”
“정성이라니….”
“저희가 용천관에 드리는 기부금입니다. 그저 감사의 마음을 담은 것이니 사양치 말아 주십시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드리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용천관은 이런 걸 받을 수 없소.”
“저희 창천문에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호요범의 대답에 주유천이 은기륭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가 다시 호요범을 향해 물었다.
“하면…?”
“안강 사람들 모두가 십시일반 모은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 저희 창천문도 조금 보탰지만요.”
“도대체 안강이 이런 걸 왜…?”
“그저 용천관에서 좋은 인재들을 양성하는데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걸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저희 안강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여겨 주십시오.”
“글쎄, 이걸 왜 용천관으로….”
“저희 안강 사람들은 용천관의 사비강 교관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혜를? 그게 무슨 소리요?”
호요범은 빙그레 웃으며 안강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모두 알려 주었다.
이야기를 전해 듣는 은기륭과 주유천의 얼굴은 시시때때로 놀라움과 감탄, 당혹감으로 변했다.
이윽고 모든 이야기를 전해 주었을 때.
“호오. 그런 일이 있었구려.”
은기륭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수염을 쓸며 대꾸했다.
“예, 사비강 교관은 참으로 대단한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이곳에 계시니 용천관 생도들은 복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리 생각해 주시니 오히려 감사드리오.”
“그럼, 이제 저희들의 순수한 정성을 받아 주시는 겁니까?”
“먼 길을 오셨는데, 그대로 돌려드리는 것도 아닌 듯하니, 좋은 일에 쓰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창천문과 안강 사람들의 깊은 뜻은 반드시 사비강 교관이 돌아왔을 때 전해 드리도록 하겠소.”
관주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제야 주유천의 표정에도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한편, 밖에서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두 사람.
천세명과 등부형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나인들 알겠소? 제기랄!’
두 사람의 표정이 똥이라도 씹은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
안강을 떠난 지 다시 열흘 째.
사비강이 이끄는 특목반은 이제 ‘자양(慈養)’이라는 마을에 들어서고 있었다.
안강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잠시나마 잠재웠던 생도들의 불만은 다시 조금씩 고조되고 있었다.
지난 열흘 간 제대로 쉬지도 않으면서 줄곧 강행군을 이어왔기에.
그 때문일까?
사비강은 자양 마을의 제대로 된 객잔을 숙소로 정하겠다고 선포했다.
앞서 사두마차를 몰고 가는 단리정은 마침 길가에 선 사람을 보며 물었다.
“어르신,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
“마을에서 묵을 만한 객잔이 어디 쯤 있을까요?”
“…….”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는 탐탁찮은 시선으로 생도들의 행색을 살피더니 냉랭하게 돌아서 버렸다.
‘뭐야? 왜 저러지?’
단리정이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다시 마차를 몰았다.
거리를 지나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어딘지 경계하는 눈초리로 특목반 일행들을 힐끔거렸다.
그나마 다행히 객잔을 찾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객잔에 이르러 사비강이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묵을 방이 있소?”
제법 많은 수의 사람을 확인한 주인장이 직접 나와 맞이했다.
“모두 몇 분이나 되는지요?”
“스무 명이 좀 넘소.”
“저희 객잔은 방이 총 여덟 개입니다. 세 분씩 같은 방을 쓰시면 어떠신지요?”
사비강이 슬쩍 매설란을 돌아보았다.
매설란이 짐짓 딴청을 부리는 척 대답했다.
“뭐, 전 교관님과 같이 써도… 상관없어요.”
겉으로는 툴툴거리듯 말했지만, 사실 그녀의 내심은 몹시 조급했다.
안강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관계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은 탓이다.
이제라도 한방을 쓰면서 기회를 노려야 한다.
한 남자를 꼬시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한 적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설마 진짜로 고자 아냐?’
어떻게 자신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 오래 버틴단 말인가?
그동안 덮칠 기회가 없었으면 말도 안 한다.
몇 번이나 밥상을 차려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밥숟가락을 들다가도 아슬아슬한 순간 내려놓는다.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
그러다 보니 매설란으로서는 구겨진 자존심이 말이 아니었다.
사비강은 객잔을 통째로 빌렸다.
그동안 거의 노숙만 해왔기에 경비는 여전히 남아도는 상태였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숙소에 묵게 된 생도들은 각자의 방에 들어가서 뻗어버렸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아래층으로 모인 생도들에게 사비강이 짤막하게 주의 사항을 알렸다.
“우린 여기에서 이틀을 머물게 될 거다. 그동안 너희들은 자유다. 관칙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뭘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 단, 이 마을에서 벗어나지 말고 자정이 되기 전까지는 숙소로 복귀해야 한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신호탄을 쓰도록 한다. 질문 있나?”
그러자 곡보옥이 손을 들었다.
사비강이 턱짓을 하자 그가 물었다.
“여기가 어딘데 이틀씩이나 머무는 겁니까?”
“‘자양’이라는 마을이다. 그뿐이다.”
“예? 그런데 왜 이틀간이나 머무는 거죠? 무슨 의미라도 있습니까?”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뭔가 억지스러운 말을 할 때마다 나오는 그의 습관이었다.
“낯선 곳에 적응하는 것도 하나의 훈련이지.”
생도들이 술렁거렸다.
“저게 말이야? 방귀야?”
곡보옥이 들으라는 듯 투덜거렸다.
“자, 다른 질문 없으면 이상.”
사비강이 말을 끝내자, 점소이가 식탁으로 음식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마침 곡보옥이 점소이를 향해 물었다.
“이봐, 여기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다 불친절한 거냐?”
곡보옥 역시 객잔으로 오는 동안 곁눈질을 해대는 주민들을 본 것.
점소이가 헤실헤실 웃으며 굽실거렸다.
“공자님들이 이해 좀 해주십시오. 최근 이 마을 분위기가 좀 어수선하거든요.”
“왜?”
“그게… 사실은 최근에 흑도쌍괴(黑刀雙怪)가 나타나서 마을 부녀자들을 자꾸 납치해 가거든요.”
“흑도쌍괴?”
곡보옥이 목소리를 높이자 다른 생도들도 모두 이쪽을 돌아보았다.
점소이가 슬쩍 눈치를 살피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저희 마을에는 강호인들이 많지 않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는 실정입니다요. 관원들은 아예 손을 놓고 있고요. 그러다 보니 마을 분위기가 흉흉하고, 외부인을 봐도 일단은 경계부터 하지요.”
그러고 보니 객잔에 이렇게 손님이 없는 것도 나름 이해가 됐다.
그때 염자량의 낯빛에 화색이 돌았다.
그가 무릎을 탁 쳤다.
“아! 교관님은 역시 그런 생각이셨군요?”
사비강이 미간을 찡그리며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냐?”
“흑도쌍괴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맡을 임무는 흑도쌍괴를 토벌하는 것이겠죠?”
염자량이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엥? 무슨 헛소리냐? 그런 일은 없다. 다들 납치나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예에? 그럼 우린 정말 여기 왜 온 겁니까? 이게 무슨 연무기행이에요?”
이번에는 염자량도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말했잖아. 낯선 곳에 적응하는 것도 훈련의 하나라고.”
“하지만 이렇게 겁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잘하는 짓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순간 사비강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뭔가 착각하나본데 강호에서 잘 살아가는 방법은 겉멋에 물들어 나대는 게 아니라, 죽지 않고 최대한 오래 살아남는 거다.”
“그게 뭐야….”
생도들이 저마다 실망한 투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사비강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렇다.
앞으로 십년 후.
녀석들이 나타났을 때, 제 실력만 믿고 무턱대고 설쳐대던 자들은 가장 먼저 죽었다.
하지만 신중을 기한 자들은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
물론, 그러고도 재앙을 막아내진 못했지만.
한편, 곡보옥은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중얼거렸다.
“뭐야? 단단히 쫄았잖아. 저런 자를 교관이라고 따르고 있다니. 아아, 우리도 참 불쌍하다.”
곁에 앉은 생도들이 낄낄거렸다.
문득 곡보옥이 연우경을 보았다.
“우리가 해결해 버리면 어떨까? 흑도쌍괴라면 어차피 두 명 뿐일 거 아냐?”
“하긴, 우린 다섯 명이니까 할 만할지도.”
곁에 앉은 생도의 말에 곡보옥이 어깨를 으쓱이며 연우경을 추켜세웠다.
“굳이 머릿수가 아니어도 우경의 검술 실력이면 그놈들은 일도 아닐 거야.”
“그건 그래.”
생도들이 맞장구를 치며 아부했다.
그때까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연우경이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흑도쌍괴라…. 재미있군.”
“그치? 역시 우리끼리 그놈들을 토벌해 볼까?”
“아니. 그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떠올랐어.”
“그보다 재미있는 일?”
연우경은 대답 대신 사비강을 보며 싸늘하게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