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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마교관-36화 (36/670)

# 36

귀환 마교관

36화

“으음….”

능소소가 희미한 신음을 흘렸다.

얇은 경장을 차려입은 그녀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전신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녀의 등에 손을 맞대고 있는 사비강의 이마에도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벌써 한 시진 째.

막힌 혈도를 뚫어 주는 게 아니다.

능소소의 몸에 밴 월랑심법의 기운을 모두 희석시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보았더라면 기겁을 했을 것이다.

능소소는 월천문의 제자였다.

월랑심법은 당연 월천문의 독문심법이었다.

한데 애써 익힌 월랑심법의 기운을 전부 와해시킨다니!

만약 월천문의 문주가 이 사실을 알았다간 당장 칼부림을 하자고 덤벼들었을 지도 모를 일.

그렇게 반 각 정도가 더 지났을 때.

“후우우우.”

사비강이 긴 숨을 내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제야 능소소 역시 거칠게 호흡을 토해내며 바닥을 짚고 엎드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제 월랑심법의 냄새를 꽤 지웠다. 앞으로는 내가 말한 방식대로 운기하기가 훨씬 수월해질 거다.”

“감사합니다, 교관님.”

“몸은 좀 괜찮으냐?”

“네, 조금 힘들지만 문제없어요.”

능소소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썼다.”

사비강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저어, 교관님.”

“음?”

“정말… 괜찮은 거겠죠?”

“뭐가 말이냐?”

“제가 애써 익힌 독문심법의 기운을 모두 희석시켰다는 것을 문주님이 아시면….”

“걱정 마라. 내가 책임지마.”

사비강이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능소소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월천문에서 이 사실을 알면 당연히 반발할 것이다.

하지만 능소소의 능력은 미래에 반드시 필요하다.

월천문에서도 먼 훗날 능소소의 특별한 재능을 깨닫고 그것을 개발시키기 위해 애쓰게 된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 늦다.

실제로 능소소는 자신의 재능을 십분 다 활용해 보지도 못한 채 죽고 만다.

‘그런 일을 되풀이할 순 없지.’

월천문주가 반발하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 설득을 시키리라.

사비강은 상의를 훌렁 벗어던지고는 땀을 식히며 물었다.

“마지막에 내가 운기해 준 방식을 기억하느냐?”

“네, 교관님.”

“그 운공법을 절대 잊지 말고 자주 행하도록 해라.”

“하지만 그대로 운공하면 점점 기가 소실되는 것 같아요.”

“당연한 결과다. 앞으로 네가 발휘할 재능에 있어서는 내공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아. 오히려 방해가 되지.”

“그런데 왜 운공을 하는 거죠?”

“다른 방식으로 그 기운을 응용해야하니까. 내가 알려 준 그 운공법은 중원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코 너에게 해가 되진 않을 테니 믿어도 좋아.”

“알아요.”

능소소가 수줍은 듯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부터 사비강이 싫지 않았다.

다른 교관들은 중소 문파 출신인 자신에게 이렇듯 각별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변변치 못한 출신에 무공도 그저 그런 수준이다.

거기에 성격도 소심하니 학관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다.

한데 사비강은 자신을 다르게 대한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단지 말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아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다.

사비강의 눈빛을 보면 왠지 스스로가 필요한 존재라는 걸 느끼게 된다.

“아프지는 않았냐?”

“이제 적응이 되었는지 괜찮았어요.”

“그럼, 다행이구나.”

“그런데 매일 밤마다 이걸 하고 나면 모든 걸 잘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그냥… 공기, 냄새, 기분… 자연의 흐름이랄까… 앗, 제가 너무 거창하게 말했나요?”

사비강이 웃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능소소는 숨을 멈췄다.

지금껏 사비강이 저렇게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건 처음 보았기에.

‘교관님… 저렇게 웃으실 수도 있구나.’

사비강이 말했다.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거다. 그 감각을 잊지 말아라. 앞으로 더욱 자주 느끼도록 내가 만들어 주마.”

“감사합니다.”

“혼자 있을 때도 자주 해라. 물론, 누구도 방해 받지 않는 곳에서. 그럴수록 감이 살아날 테니까. 그러다 보면 또 다른 뭔가를 느끼게 될 거다.”

“또 다른 뭔가를요?”

“그래, 기존의 것과 다른. 그땐 환상적인 기분을 느낄 거다. 내가 장담하지. 그럼 옷 갈아입고 천천히 돌아가라.”

“네, 교관님.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사비강이 대충 손을 들어보이고는 저벅저벅 걸어갔다.

한편, 그가 숙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어둠 속에 숨어서 지켜보던 매설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가 저만치 걸어가는 사비강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질끈 씹었다.

‘쳇, 뭐야? 도대체 저 두 사람은…!’

오늘쯤 사비강은 자신과 함께 침상에서 뒹굴었어야 했다.

그런데….

매설란은 창문을 슬쩍 열어 숙소 안을 바라보았다.

몸을 돌린 채 옷을 입는 능소소가 보였다.

‘사비강 이 사람 정말…!’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자 슬금슬금 분노가 일어났다.

엿들은 대화 내용 중에서 몇 가지가 머릿속을 떠돌았다.

‘몸은 좀 괜찮으냐?’

‘네, 조금 힘들었지만 문제없어요.’

‘아프지는 않았느냐?’

‘이제 적응이 되어서 괜찮아요. 매일 밤마다 이렇게 하니까 너무 잘 느끼게 됐어요.’

‘앞으로 더욱 자주 느끼도록 만들어 주마. 혼자 있을 때도 자주 해라. 그러다 보면 나중에 환상적인 기분을 느끼게 될 거다.’

‘아아, 더 느끼고 싶어요!’

깊은 생각에 빠진 매설란은 이렇듯 두 사람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조금 각색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녀가 엄지손톱을 살짝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두고 보자. 사비강. 누가 이기는지 두고 보자고.”

교관이 생도와 정을 나눈 것은 명백한 관칙 위반이다.

교관직을 박탈당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건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역시 자신이 직접 해결하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당신 취향이 정 그렇다면…!”

매설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이틀 후 특목반 생도들은 사비강의 인솔 하에 창천문을 나섰다.

그나마 하루 동안 창천문에 머물며 자유 견학을 했기 때문인지, 생도들의 불만은 꽤 잦아든 상태.

창천문주 호요범은 좀 더 머물다 가라며 아쉬워했지만, 사비강이 거절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로서는 이번 연무기행에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에.

결국 호요범은 제자들을 모두 이끌고 마을 어귀까지 배웅을 나왔다.

비단 그 뿐만 아니라, 안강의 모든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 나오며 환송했다.

그렇게 여행길에 오른 사비강은 창문을 닫고는 기지개를 한껏 켰다.

“흐아암! 이제 눈 좀 붙여 볼까?”

그런데 가운데 휘장을 쳐놓고 들어앉은 매설란이 무슨 일인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매 소저, 괜찮으시오?”

“잠시만요.”

휘장 너머에서 매설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이라니….’

사비강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데.

“됐어요.”

명랑한 소리와 함께 휘장을 젖히며 매설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헉.”

순간 사비강이 움찔거리고는 그녀를 보았다.

“매 소저… 어째서 생도 복장을…?”

그 뿐만이 아니다.

머리는 동그랗게 말아서 마치 십대 소녀처럼 꾸몄다.

뭐,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그런데 뺨은 분을 찍어 발랐는지 여기저기 멍이 든 것처럼 붉은 색이 짙게 돌았고, 입술은 병자처럼 희멀겋게 떠 있었다.

결국 사비강이 배를 쥐고 웃어젖혔다.

“풋, 쿠쿡. 크하하하하!”

그야말로 화장이라는 것을 처음 해본 것 같았다.

사실 매설란은 화장이 서툴렀다.

본판이 워낙 아름답다 보니 평소에 화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게다가 귀찮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어려보이도록 한다는 것이 우스운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에 매설란의 얼굴이 곧 빨갛게 달아올랐다.

“크하하하! 이제 보니 매 소저가 이런 장난을 칠 줄도 아는구려! 크하하하!”

이제 사비강은 아예 끅끅 거리며 웃고 있었다.

매설란이 입술을 질끈 씹었다.

‘내가 이런… 치욕을…!’

그녀가 이를 꽉 물고는 씹어뱉듯이 뇌까렸다.

“그만 해요.”

“쿠쿡. 아니, 왜 그러시오? 매 소저의 의도가 날 웃기려는 것 아니었소? 쿠쿠쿡.”

“그만하라고요! 몰라요!”

매설란이 빽 소리치고는 휘장을 치며 들어가 버렸다.

사비강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

포옹.

낚싯바늘이 떨어지면서 수면에 동그란 파문이 일어났다.

기다란 대나무 낚싯대를 쥔 노인.

용천관주 은기륭이 연못가에 앉아서 가만히 수면을 바라보았다.

용천관 태사전 후원의 연못인 청심지(淸心池).

이곳은 은기륭이 즐겨 찾는 장소다.

그의 왼쪽 곁에는 호신위인 여영(呂英)이 시립해 있었고, 오른쪽에는 학장 주유천이 있었다.

청심지에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그 고요를 먼저 깬 것은 은기륭이었다.

“안강의 일은 참으로 안 됐소.”

“이틀 밤사이에 세 문파가 궤멸했으니 예삿일은 아닌 듯합니다. 맹에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습니까?”

은기륭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은 이렇다 할 말이 나오지 않았소.”

“그렇군요.”

주유천이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못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힐끔 본 관주가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혹시, 사 교관 때문이오?”

주유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하긴. 참으로 공교롭게도 시기가 겹치니 나도 조금 신경이 쓰이는구려.”

안강에서 일어난 참사.

묘하게도 사비강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쯤과 시기가 겹친다.

주유천의 어두운 낯빛을 다시 확인한 은기륭이 예의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 교관이 그 일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보시는 거요?”

“물론, 그자에게 그럴만한 이유도, 세 문파를 궤멸시킬 만한 능력도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한데?”

“단지 최근 그의 성정이 묘하게 변한 건 사실입니다. 게다가 안강으로 떠나겠다고 말할 때, 그의 표정은 어딘지 조금….”

주유천이 말끝을 흐렸다.

그 당시 사비강의 눈빛은 마치 뭔가를 벼르는 듯했다.

단순히 연무기행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직감일 뿐이기에 입 밖으로 내기에는 조심스럽다.

“기다려 보십시다. 보다 정확한 소식이 올 테지요.”

주유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원….”

그의 얼굴에 후회의 기색이 스쳤다.

역시 ‘끝까지 반대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무기행을 한 달 이상 떠나면 안 된다는 관칙도 없지만, 그것을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관칙 또한 없기에.

그때 저 멀리에서 천세명이 이곳으로 다가왔다.

그는 꽤 흥분한 표정이었다.

주유천은 벌써부터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된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학장님. 여기 계셨군요!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큰 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그가 흠칫 은기륭을 확인하고는 얼른 포권지례를 했다.

“교관 천세명, 관주님을 뵙습니다.”

“허허, 오랜만이오. 천 교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안강에서 일이 터졌다는 것은 두 분 모두 알고 계셨겠지요?”

은기륭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세명이 바로 말을 붙였다.

“시기가 묘합니다. 사비강 교관이 그곳에 도착한 시점에 세 문파가 궤멸했습니다. 아무래도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

“분명 어떤 식으로든 사 교관이 연관되어 있을 겁니다. 당장 사람을 보내 사 교관을 불러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안강의 일에 대해 추궁하고 책임이 있다면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지 않소?”

주유천의 말에 천세명이 대꾸했다.

“물론, 그렇지만 이대로는 생도들도 위험합니다. 멀쩡한 문파가 세 군데나 궤멸되었는데, 그곳에 있었던 생도들이 안전하리란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어느 쪽으로 보나 불러들여야 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흐음.”

침음을 흘리던 주유천이 은기륭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천 교관의 말도 일리는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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