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귀환 마교관
35화
“들었어? 방금… 은인이라고….”
백미향이 민유향을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어… 응….”
민유향도 얼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힐끔 목단화의 눈치를 살피니, 그녀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갑자기 무인들이 쫓아와 사달이 벌어질 줄만 알았다.
한데 사비강을 향해 고개를 숙이더니 은인이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다른 생도들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매설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죠?”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우두머리 무인이 저도 모르게 흠칫거렸다.
태어나서 처음 본 아름다움.
화용월태의 미모를 넋 놓고 바라보던 그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는 소리쳤다.
“저희 창천문과 안강 사람들은 사비강 교관님께 크나큰 신세를 졌습니다. 이에 사비강 교관님께 사례를 하고 싶습니다!”
“신세라뇨?”
“사비강 교관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들 모두 이곳에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안강 사람들 모두가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쯤 되자 매설란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들을 보았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자들, 사람 잘못 본 거 아냐?’
그녀의 시선을 받은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마치 “내가 좀 그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듯.
매설란이 눈썹을 슬쩍 일그러뜨리며 사비강을 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뭐, 말하자면 좀 길어서.”
사비강이 대충 둘러대는데, 우두머리 무인이 입을 열었다.
“저는 창천문의 적랑대주(赤狼隊主) 강능초(姜菱草)라 합니다. 사비강 교관님을 본문으로 모시고자 하니, 부디 저희와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짜고짜 나타나서 데려가겠다니. 나도 갈 길이 먼 사람이야.”
사비강이 짐짓 기분 상한 투로 말하자, 강능초가 한쪽 무릎을 털썩 꿇으며 소리쳤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부디 저희와 함께 본문으로 돌아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문주님께서 반드시 은인을 모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럼, 왜 문주께서 직접 오시지 않고?”
“문주님은 현재 상황을 수습하느라 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문주님의 진심만은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흐음.”
사비강이 팔짱을 끼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뭐, 훗날을 위해서 한 번쯤 대면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창천문의 장문인인 호요범은 그리 뛰어난 무공을 지니진 않았지만, 의협심이 높은 자였다.
때문에 먼 미래에 그는 정도맹의 신뢰를 얻어 여러 중요 임무를 도맡기도 한다.
어려운 때일수록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적어지기 때문에, 그의 정직성은 무림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마침내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곤 정중히 대꾸했다.
“좋소. 함께 가겠소. 단 조건이 있소.”
“무엇입니까?”
“나는 생도들을 인솔하는 책임자요. 나 혼자만 갈 수는 없으니, 생도들을 모두 데리고 가야겠소.”
강능초가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용천관 교관님과 생도들을 안내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
생도들은 입을 딱 벌리고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려진 음식들을 넋 놓고 보았다.
물론 평소에도 진귀한 음식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집안 자제들이 대부분이지만, 연무기행의 강행군을 이어가던 중이었기에 입가에서 침이 절로 고였다.
“자, 마음껏 드십시오. 여러분은 강호의 미래입니다. 이처럼 우수하신 분이 여러분을 가르치고 계시니, 우리 정도의 미래가 아주 밝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호요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생도들은 앞에 놓인 음식들을 마구 먹어대기 시작했다.
삶은 닭고기를 손으로 들고 뜯는가 하면, 향이 짙게 밴 육고기를 정신없이 먹어치우는 생도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호요범이 옆에 앉은 사비강에게 포권을 취했다.
“사 교관께서 그때 나서 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이 날 뻔 했었소.”
“뭐, 내가 죽기 싫었기에 당연히 나설 수밖에 없었소.”
“허허허. 그리 말씀하시더라도 우리 창천문과 안강 사람들이 사 교관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흐음, 하긴 나 때문에 모두가 살았다는 건 사실이긴 하니까.”
사비강의 말에 호요범은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렸다.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이로고.’
그가 일격에 단구기와 철도정을 죽였을 때는 심정이 복잡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다.
과연 자신이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손을 쓸 수 있었을까?
아니다.
망설였기에 자신은 그 순간 아무것도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사비강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안강은 풍비박산이 나 있을 터.
“창천문은 사 교관의 은혜를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거요.”
“알고 있소.”
“어찌 알고 있다는 말씀이오?”
우적우적 음식을 먹으며 대꾸하는 사비강을 보며 호요범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냥 알고 있소. 호 문주께서는 그럴 분이시니까.”
“나를 알고 계셨소?”
“그런 셈이오.”
호요범은 그저 웃기만 했다.
은인을 상대로 꼬치꼬치 따져 묻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여겼기에 그는 거기서 질문을 거뒀다.
배가 터지도록 먹은 생도들은 모처럼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호요범은 사비강 일행에게 최고의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불편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그는 끝까지 예를 다했다.
**
쒜에에에엑!
샤악!
화살 한 대가 나뭇잎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치고는 저만치 하늘로 솟구쳤다.
‘아… 아깝다.’
단리정은 내심 탄식을 뱉고는 다시 시위를 잡아당겼다.
사두마차에 실어 둔 병장기 중 적당한 활을 골라 연습을 시작한 것이 해가 질 녘부터였다.
확실히 예전에 활 수업을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감각.
진지한 마음으로 활을 드니, 보이는 것부터가 달랐다.
‘이번에는…!’
패앵!
쒜에에엑!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화살이 이번에는 나뭇잎을 꿰뚫었다.
비록 가지에 달린 나뭇잎이지만 바람에 흔들리던 것이었다.
‘아!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느껴야 하는 거였어.’
대상과 나의 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뭔가로 꽉 채워진 느낌을 가져야 한다.
그것들이 전달해 주는 그 감각을 믿어야 한다.
“좋구나.”
불쑥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사비강이 단리정 옆에 섰다.
단리정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직 멀었습니다.”
“아니, 일단 좋아. 확실히 넌 재능이 있다.”
“감사합니다, 교관님!”
“자, 받아라.”
사비강이 커다란 활을 내밀었다.
세공으로 다듬어진 활은 누가 보더라도 보통 물건이 아닌 듯했다.
“이걸… 왜?”
“이제부터 네 것이다.”
“예?”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하, 하지만….”
“싫으냐?”
“아닙니다. 그런 건!”
“그럼, 받으면 되지 뭔 말이 많아?”
“가, 감사합니다, 교관님!”
“열심히 해야 한다.”
“예? 아, 예!”
“여러모로 계획이 어긋났어. 네가 그걸 메워야 해.”
“무슨 뜻인지….”
“그냥 그런 게 있다. 어쨌든 넌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연습해라. 떨어지는 잎사귀 두 개를 동시에 꿸 수 있는 수준이 되면 내게 다시 오거라.”
“떨어지는 잎 두 개를요?”
단리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사귀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데, 떨어지는 잎 두 개를 무슨 재주로 맞추란 말인가?
하지만 사비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었다.
“너라면 별로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그리고 그 궁이라면 더 빨라질 거다.”
“하지만 이 활을 정말 제가 받아도….”
“돼. 어차피 네가 가질 거였다.”
단리정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커다란 활을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사비강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건….
‘그 선배님이 가지고 계시던 것?’
안강 어귀에서 우연히 만났던 죽립을 쓴 강호인.
그가 분명 이것과 똑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사비강이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불쑥 말했다.
“이제부터 네가 그 활의 주인이다. 원래 그 활의 주인은 잘못된 생각을 품다가 죽어 버렸으니, 네가 그 활을 제대로 된 용도로 쓰도록 해라.”
“하지만…!”
“정, 네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사비강의 표정은 매우 진중했다.
때문에 단리정은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다.
대신 침을 꿀꺽 삼키고는 이유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사비강이 그런 단리정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주고는 몸을 돌렸다.
사비강은 걸어가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계획이 많이 어긋났군.’
단구기는 미래에 쓸 중요한 재목이었다.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기 전에 만났어야만 했다.
그런데 간발의 차로 늦어 버린 것이다.
이제 그 전력 손실을 단리정으로 채워야 한다.
‘뭐, 저 녀석이라면 잘 해내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둘 다 쓸 수 있는 재목으로 키웠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일.
지금부터 단단히 준비하면 된다.
**
어둑한 밤.
마구간으로 세 그림자가 은밀히 움직였다.
목단화와 민유향, 백미령이었다.
어느 순간 민유향이 나직이 소리쳤다.
“여기야! 여기!”
목단화와 백미령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과연 그곳에 말 여섯 마리가 있었는데, 육두마차를 끄는 그 녀석들이었다.
목단화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제 시작하는 거야.”
그녀가 턱짓을 하자 백미령이 목검을 들고 천천히 말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마구간 문은 활짝 열어 두었다.
남의 집에서 오밤중에 말들이 미쳐 날뛰면 사비강의 표정이 과연 어떨까?
능소소 또한 사색이 되리라.
‘감히 나에게 뒷간으로 쓰던 건초더미를…!’
누구도 그녀에게 그것을 내밀진 않았지만, 꼬일 대로 꼬인 심성을 가진 목단화는 그런 피해망상을 가지고 있었다.
“시작할게!”
백미령의 말에 목단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백미령이 말 한 마리의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
이히히히힝!
그 순간 말이 펄쩍 뛰어오르며 울음을 토해냈다.
목단화와 백미령, 민유향은 얼른 그 자리를 피해 달렸다.
그런데….
이히히힝!
이히히히힝!
같은 마구간에 있던 여섯 마리의 말들이 저마다 미쳐 날뛰면서 그 중 한 마리가 목단화에게 달려드는 게 아닌가?
“화야! 위험해!”
백미령과 민유향이 깜짝 놀라 동시에 소리쳤다.
“꺄아아악!”
목단화가 쓰러지며 일장을 내질렀다.
하지만 워낙 급한 상황인데다 말이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장력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말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이제는 꼼짝없이 말발굽에 차일 판이었다.
“안 돼! 화야!”
“꺄아아아악!”
세 사람이 동시에 눈을 가리며 비명을 터뜨렸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목단화가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녀 앞에는 왜소한 체구의 소녀가 서 있었다.
“소소…?”
머리를 곱게 땋은 소녀는 바로 능소소.
그녀 앞에 멈춘 말이 투레질을 하며 진정을 되찾아 가는 것이 아닌가?
능소소가 말의 콧잔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쉬이. 쉬이. 괜찮아.”
푸르르르.
마치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말이 투레질을 했다.
녀석뿐만이 아니라, 사방팔방 날뛰던 다른 말들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곧 차분해지면서 곁으로 모여드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목단화 등이 그런 능소소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제야 능소소가 목단화를 돌아보았다.
“괜찮아? 다치진 않았어?”
“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응?”
“네가 말 관리를 똑바로 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냐!”
갑자기 쏟아진 핍박에 능소소가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커다란 눈망울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혀 떨어질 것만 같았다.
‘정말 짜증나!’
목단화가 혀를 차고는 몸을 일으키는데.
“무슨 일이냐?”
사비강의 목소리가 들렸다.
능소소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목단화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말이 미쳐 날뛰는 바람에 다칠 뻔했다고요!”
“흐음, 그래?”
사비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마구간을 둘러보았다.
“말이 왜 갑자기 미쳐 날뛰었을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럼, 너는 이 시간에 왜 마구간을 기웃거렸지? 그건 알겠지?”
“기, 기웃거리다니… 누가요!”
“기웃거린 게 아니라면 왜 여기에 있는 거냐?”
“그, 그건 잠깐 볼일을 보러…!”
“마구간에서 할 짓이 뭐가 있지? 설마… 너 여길 뒷간으로 쓴 거냐? 아니면 음란한… 뭔가를…?”
“무, 무슨 소리예요! 그런 것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왜 여기에 있는 거냐고 묻잖아.”
순간 사비강의 눈초리가 싸늘하게 굳었다.
‘이익…!’
목단화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금방 떠오를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짜증나….”
결국 그녀는 싸늘하게 중얼거리고는 걸어가 버렸다.
“화야.”
백미령과 민유향이 얼른 목단화를 따라 나섰다.
능소소가 고개를 꾸벅 숙이는데.
“네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는 건 예를 다하거나, 잘못이 있을 때만 하는 거야.”
“네….”
“그럼, 오늘도 해야지?”
“아, 네! 저 방금….”
“알아. 나도 봤으니까.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훌륭했다.”
“그럼, 오늘 밤도 잘 부탁드릴게요.”
“그래, 갈아입을 옷은 챙겨 왔느냐?”
“네.”
능소소가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말을 덧붙였다.
“저어, 교관님.”
“음?”
“오늘은… 좀 아프지 않게… 부탁드려요.”
“그래, 최대한 부드럽게 하마. 그럼 가자. 내 방으로.”
사비강이 앞장서자 능소소가 그 뒤를 얼른 따라나섰다.
두 사람이 나선지 한참이 지났을 때, 한 여인이 다른 입구를 통해 마구간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매설란.
그녀는 두 사람이 걸어 나간 곳을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갈아입을 옷을? 뭐야, 설마 사비강의 취향이 그런 쪽이었나?”
그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