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귀환 마교관
34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호요범은 턱이 빠져 버릴 듯 입을 벌린 채 눈알만 정신없이 굴렸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들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죽어 버렸다.
그리고 그 중 두 명을 죽인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사비강.
용천관의 교관이라고 했던가?
아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충격적인 것은 단구기와 세 문파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
그리고 앞서 두 문파를 멸문시킨 당사자가 바로 단구기라는 사실!
지금까지 그런 사연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고도 자신은 이들의 친구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호요범이 비틀거리며 겨우 중심을 잡는 사이, 사비강은 죽어 버린 단구기의 품을 뒤적이고 있었다.
품에서 데블 파이어 열여섯 개를 찾아냈다.
‘네 개는 사용했나보군. 보나마나 하나는 우연히 사용했을 테고, 그 후에는 시험용으로 썼겠지. 그렇다면 나머지 두 개는 앞서 두 가문을 멸문시키면서 사용했겠군.’
뭐, 이 정도면 생각보다 양호한 수준이다.
데블 파이어를 챙긴 사비강은 다시 또 품속에서 뭔가를 찾아냈다.
암회색 액체가 너울거리는 약병.
헬라의 눈물이다.
한 방울만으로도 인간의 몸을 돌처럼 굳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액이다.
그리고 옥빛 액체가 담긴 약병.
아칸 포션이다.
신체 마나량을 최대치로 올려주는 귀한 약이다.
‘헬라의 눈물이 하나, 아칸 포션이 다섯 개. 이 정도면 나쁘진 않다.’
물건들을 모두 챙긴 사비강이 넋을 잃은 호요범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보다시피 상황이 좀 그렇게 됐소. 뒷정리를 부탁드리겠소.”
호요범이 사비강을 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말했는데. 용천관 교관이라고.”
“그게 정말이오? 한데 어째서 용천관 교관이….”
“이런 일에 간섭한 거냐고 묻는 거요? 그것도 말했소. 내 물건을 받으러 온 거요.”
“그 물건이라는 것이….”
“방금 내가 챙긴 것들이오. 다른 질문이 있소?”
“저들의 관계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소?”
“흐음. 뭐 어쩌다 보니까 알게 됐소. 말하자면 복잡하오.”
사비강이 대충 둘러댔다.
어차피 미래에서 회귀했다는 말 따위는 믿지도 않을 테니.
“혹시 호 문주께서 보시기에 내가 잘못한 것 같소?”
“아니…, 난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소. 도대체 뭐가 뭔지.”
정말 모르겠다.
친구 한 명은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렀고, 다른 한 명은 두 문파를 괴멸시켜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게다가 이곳에서 그때와 같은 폭발이 일어났더라면, 자신은 지금 이렇게 서 있지도 못할 터.
그런데 이자의 잘못을 지적하라고?
무리다.
사비강이 고개 숙인 호요범을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이해하오. 머릿속이 복잡하겠지. 시간을 가지고 차분히 생각해 보시오. 난 호 문주가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있으니.”
걸음을 옮기던 사비강이 장내를 벗어나기 전에 멈칫하곤 돌아보았다.
“가능하면 이곳 뒷정리도 좀 부탁드리겠소.”
호요범은 그를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기에.
지금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사비강이 나가고 나서 한참이 지나자 조금씩 생각이 정리됐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죄책감.
“아아, 구기! 자네는 왜 나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건가?”
결국 상실감에 젖은 호요범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단구기가 딸을 찾아 헤맬 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본 적이 없다.
그저 마음속으로나마 격려할 뿐.
하긴, 단구기가 자신에게 타들어가는 속내를 말했다고 한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러고 보니 단구기는 자신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까맣게 잊고 있었을 뿐.
물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단구기가 느닷없이 웃으며 질문했다.
“자네는 만약 안강의 나머지 세 문파가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면 어찌 대처하겠는가?”
그때 자신은 정말이지 멍청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걸 누가 밝혔는가가 중요하겠지.”
“그들의 시종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그 시종을 때려죽이겠네.”
“어째서?”
“나는 친우들을 믿네. 한낱 시종이 세치 혀를 내둘러 모함하는 말은 결코 믿지 않을 걸세. 그리고 생각해 보게나. 백가, 진가, 금정이 그런 짓을 하겠는가?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할 걸세.”
“그래, 그렇겠지.”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하는 단구기를 보고 그가 물었다.
“자네라면 어쩌겠나?”
“나 역시 그 시종을 때려죽이네.”
그 대답을 할 때의 단구기 표정은 어딘지 달랐다.
심연의 증오 같은 것이 느껴졌다.
다만, 기분 탓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 질문의 의도가 그저 자신의 우정을 시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그때 자신의 처지를 처음으로 얘기한 것이었다.
그때 자신이 조금만 더 깊게 대화를 나누었더라면?
이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단구기… 못난 친구를 용서하게!’
결국 호요범은 그 자리에 엎드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구슬프게 흐느꼈다.
**
“하아아.”
매설란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마차 지붕 위로 올라와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 인간은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었다.
마을 복판에서 불기둥이 치솟은 그 순간, 옆에 있던 사비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잠을 청하던 생도들이 마차 옆으로 달려와 먼발치 불기둥을 보며 떠들어대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맙소사, 저게 다 뭐야?”
“무슨 일이지? 저기 어디야?”
“가보자!”
자고로 불구경보다 재미있는 것도 없는 법.
염자량을 비롯한 생도들이 들떠서 소리쳤다.
결국 매설란이 얼른 나서며 제지했다.
“다들 자리를 지키도록 해! 누구도 허락 없이 이탈해서는 안 된다.”
“교관님, 저희들도 알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맞아요. 궁금하다고요.”
매설란이 이마를 곱게 찌푸렸다.
“너희들의 알 권리보다 안전이 우선이야. 잠자코 말 들어. 모두 자리로 돌아가.”
그 후로도 생도들은 어린아이마냥 투덜거리며 떼를 썼다.
결국 매설란이 목소리를 높이고 나서야 저마다 구시렁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고분고분 말을 따르기만 할 생도들이 아니었다.
염자량을 비롯한 상당수의 생도들이 틈만 나면 교관 몰래 마을로 내려갈 궁리를 했다.
때문에 매설란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그들을 감시했다.
마침내 동이 트고 시들해진 생도들도 잠이 들자, 매설란은 겨우 마차 지붕 위로 올라와 몸을 눕힌 것이다.
‘내가 도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담?’
다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때.
“무슨 고민이라도 있소?”
불쑥 들려온 목소리.
매설란이 눈을 치뜨고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당신…!”
어느새 사비강이 마차 위에 우뚝 서서는 매설란을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매설란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
“아무래도 마을에 소란이 일어난 것 같아서 좀 확인을 해보고 오느라.”
“아무리 그래도 말도 없이 그렇게 가시면 어떡해요?”
“음, 그건 미안하게 됐소. 워낙 급한 상황이다 보니.”
“생도들도 내팽개치고 너무하신 것 아닌가요? 사과 한 마디로 끝날 문제인가요?”
“나보다 뛰어난 매 교관이 함께 있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세요! 적어도 어딜 가는지 말은 해주셨어야죠!”
“흐음. 혹시… 화나셨소?”
사비강의 말에 매설란이 흠칫거렸다.
‘이런…! 나도 모르게 그만….’
너무 감정적으로 나갔다.
이렇게 애매한 관계에서 화를 냈다간 죽도 밥도 안 될 수가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긍정적으로 흐르지 않았던가?
지금 이렇게 차갑게 몰아세우면 사비강이 자신을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어젯밤의 그 달달한 분위기를 잊게 만들어선 안 된다.
“화, 화가… 아니라….”
“흐음, 화가 많이 난 것 같소만?”
“그, 그건….”
“아무래도 내게 불만이 많은 것 같으니….”
“그, 그런 문제가 아니라 걱정이 돼서 그런 거라고요. 전… 혹시나 사 교관님이 어딜 가서 다치신 건 아닐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사 교관님이 없으면 제가 이 생도들을 모두 책임져야 하는데…, 그건 정말 자신도 없고….”
매설란은 감정이 복받쳐 오른 듯 울먹이기까지 했다.
물론, 그녀의 내심은 다른 이유로 복받쳐 오르고 있었다.
‘제기랄! 내가 왜… 이런 녀석한테…!’
남자를 유혹하는데 있어서 실패라고는 겪어 보지 않은 그녀였다.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자 은근히 조바심이 일어났다.
한편, 사비강은 짐짓 감동한 표정으로 매설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날까지 날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은 처음이오. 매 소저, 그대의 심정은 참으로 곱소.”
“그러니 다시는 절 걱정시키지 말아주세요.”
“알겠소. 약속하겠소.”
“정말… 몰라요…!”
매설란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슬쩍 피했다.
사비강이 흐뭇한 표정으로 매설란을 내려다보았다.
“매 소저.”
“네?”
“혹시 날 좋아하고 있소?”
‘뭐야? 갑자기…!’
뜻하지 않은 기습 질문에 매설란이 당황하자 사비강이 부드럽게 웃었다.
“사람을 마음에 품는 일은 결코 부끄러운 감정이 아니오. 특히 나처럼 남자답고 준수한 외모를 가진 자라면 누구라도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
‘뭐야? 이 인간…? 넘겨짚는 것도 정도껏이지… 뭐가 어째?’
“하나, 우리는 교관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소. 내 지난 며칠간 고민이 많았소. 나에 대한 매 소저의 연정을 어찌 해야 할까? 물론, 나도 하룻밤 눈 딱 감고 몸이 가는대로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생도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교관이라는 신분 아니겠소?”
“저어… 무슨…?”
“적어도 나는 그렇소. 여행 도중에 매 소저의 간절한 바람처럼 내가 그대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면….”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매설란이 빽 소리쳤다.
흠칫거린 사비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왜 소리를 지르시오?”
“사 교관님이 하는 말씀을 못 알아들어서요. 무슨 소리죠? 사랑을 나눈다는 게?”
“그러니까 남녀가 사랑을 나눈다 함은… 뭐랄까, 자연으로 돌아가 음양이 화합하는….”
“단단히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제가 그걸 원한다고요? 그것도 간절히?”
“아니었소?”
매설란은 기가 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건 네가 간절히 원한 거겠지!’
분명 어제 낮까지만 해도 발정이 난 수캐처럼 헥헥 거렸으면서 이제 와선 뭐가 어째?
이상하게 이 남자는 자신을 흥분하게 만든다.
물론, 매우 안 좋은 의미로.
‘적어도 내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선 안 돼!’
부드럽게 대해 주려고 했더니, 이렇게 단단히 착각을 할 줄이야.
다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하게 두어서는 곤란하다.
‘뭐? 내가 사랑을 나누길 원해? 기가 차서!’
매설란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절대 아니에요! 사 교관님은 제가 좋아하는 유형의 남자가 아니랍니다. 정말 큰 오해를 하고 계시는군요.”
“그게 정말이오? 내가 그대의 이상형이 아니란 말이오?”
“당연하죠!”
“이상하군. 그쪽 세계에서는 다들 나만 보면 환장을 했는데.”
“무슨 소리죠?”
“아, 아무것도 아니오.”
“아무튼 전 사 교관님께 전혀 연정을 품지 않고 있으니 알아 두세요!”
매설란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후회하고 말았다.
‘제길, 마지막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조금 더 참았어야 했다.
이래서야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것도 모자라 밥상을 스스로 뒤엎은 꼴이 아닌가?
“하하하!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오. 나는 매 소저가 자꾸 날 유혹하는 것 같아서 오해했소.”
“제가 유혹하다니요?”
“뭐, 아니면 됐소.”
사비강이 히죽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왠지 저 모습이 더 꼴 보기 싫어!’
속으로는 약이 바짝 올랐지만, 매설란은 애써 침착함을 되찾았다.
더 이상 상대방의 화법에 말려들어선 곤란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작전을 변경해야 한다.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여자로 다가가려고 했다.
대다수의 남자들은 그런 여자에게 약할 수밖에 없기에.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틀어진 이상 계획을 조금 변경해야 한다.
소위 말하는 나쁜 여자 유형으로 접근해야 한다.
겉으로는 쌀쌀하면서 내심으로는 챙기는 부류의 여자들.
‘썩 내 방식은 아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매설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쨌든 밤새 고생했을 테니, 좀 쉬시죠?”
**
정오가 되어서야 사비강은 생도들과 함께 떠날 채비를 마쳤다.
“여기까지 와서 사대 문파를 구경도 못하고 가는 겁니까?”
“도대체 우린 여기에 왜 온 거죠?”
생도들의 불만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견학할 만한 문파가 남아 있질 않으니.
창천문이 아직 건재했지만, 외부인을 살갑게 받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불똥은 사비강에게 튀었다.
생도들 사이에서 사비강에 대한 근거 없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어젯밤 폭발이 일어나자, 사비강이 생도들을 버리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 소문의 근원지는 연우경과 곡보옥 무리였지만, 밤새 사비강을 보지 못한 생도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비강은 생도들을 이끌고 다음 행선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마을을 거의 벗어날 때였다.
붉은 무복을 갖춰 입은 일단의 무리들이 뒤를 쫓아오며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멈춰라!”
앞장 서 가던 단리정이 마차를 멈춰 세우자 무리 중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어딘지 경직된 분위기.
생도들이 바짝 긴장하고는 지켜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마을에는 벌써 악재가 세 번이나 겹치지 않았나?
괜한 불똥이 튈까 봐 내심 조마조마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무인이 생도 한 명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에 ‘사비강’이라는 자가 있는가?”
“그, 그렇습니다만.”
“누구지?”
“난데. 무슨 볼일이냐?”
어느새 육두마차에서 내린 사비강이 이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며 미간을 찡그렸다.
민유향과 백미향이 수군거렸다.
“혹시 교관이 사고라도 친 거 아닐까?”
“분명히 그럴 거야. 어젯밤에 계속 보이지 않았잖아? 이럴 줄 알았어.”
그런데 그때.
무인들이 일제히 포권을 취하더니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창천문의 제자들이 귀하신 은인께 인사 올립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근방 숲속의 새들이 후드득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