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귀환 마교관
29화
화창한 날씨.
늦겨울 치고는 모처럼 따뜻한 날이었다.
“떠나기 딱 좋은 날씨군.”
사비강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특목반 앞마당에 모인 생도들을 둘러보았다.
몇몇 기대에 찬 표정으로 사비강을 바라보는 생도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불만 어린 얼굴이었다.
물론, 사비강은 그런 생도들의 표정을 가볍게 무시한 채.
“다들 들떠 있을 거다. 하지만 연무기행은 실전이다. 너희들은 앞으로 강호를 돌아다니며 많은 일을 겪을 것이다. 운이 나쁘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니 매사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알겠나?”
“예….”
생도들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걸음을 뗐다.
“자, 그럼 출발할까?”
“잠깐만요.”
불쑥 튀어나온 낭랑한 목소리.
생도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목단화.
그녀가 팔짱을 낀 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있는 모든 생도가 연무기행을 떠나는 건가요?”
“물론이지. 특목반 생도 모두가 간다.”
“왜죠?”
“왜라니?”
“제가 알기엔 능소소(陵素素)와 단리정(段里正)은 회비를 내지 못했는데요?”
그 말에 생도들이 나직이 술렁거리며 능소소와 단리정을 보았다.
그렇잖아도 학관의 부적응자로 찍혀 특목반에 배치된 두 사람이었기에, 목단화의 지적을 받고는 완전히 기가 죽은 듯 어깨를 움츠렸다.
사비강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회비를 내지 않았지만 경비는 충분해.”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이건 경비가 충분한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에요. 형평성의 문제라고요. 회비를 내지 않고도 연무기행에 참가할 수 있다면 돈을 낸 우리는 바보인가요?”
또박또박 따지는 내용마다 공감이 가는 탓에 생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뭐라고요?”
“저 두 녀석을 공짜로 여행시킬 생각은 없으니까.”
“그럼…?”
“일을 시킬 거다. 저 두 녀석은 여행을 하는 동안 내 심부름을 전담하고, 각종 허드렛일을 맡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래도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면 회비를 환불해 줄 수 있다. 대신 너도 잡역을 도맡으면 돼. 내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군말 없이 하고. 뭐, 일손은 많을수록 좋고, 내게 경비는 차고 넘치니까.”
목단화가 입술을 꾹 씹고는 노려보았다.
사비강이 생도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니 누구든 몸으로 때우고 싶은 자는 나서라. 내 종자(從者)로 삼아 주마. 흐흐흐.”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목단화를 슬쩍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물론,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저 변태 같은 교관…!’
목단화가 치를 떨며 고개를 휙 돌렸다.
물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지금 나섰다간 사비강의 눈에 찍힐 것이며, 여행 도중 온갖 험난한 일을 도맡게 되리라는 것을.
“자, 그럼 더 이상 이의가 없는 것으로 알고 출발!”
마침내 특목반 생도들이 걸음을 옮겼다.
여러 전각을 지나고 정문 안마당으로 걸어가니,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특목반이었기에 여러 생도들과 교관들이 구경을 나온 것.
“엇, 저것 봐. 특목반의 사비강 교관이다.”
“저 교관이 그렇게 악질이라며?”
“무슨 소리야? 엄청 재미있다고 하던데?”
“그나저나 연무기행을 석 달이나 간다니. 한편으로는 부럽다.”
생도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마침 매설란과 주유천이 중앙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는 학장에게 연무기행을 떠난다는 보고를 올리고 나오는 길이었다.
주유천이 사비강에게 다가왔다.
“사 교관의 뜻이 완강하니 내 허가는 했네만, 어떠한 불미스러운 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네. 무엇보다 생도들의 안전이 최우선일세.”
“알겠습니다. 걱정 마시지요.”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어찌 보면 믿음직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하게 만드는, 묘한 미소였다.
그때였다.
두두두두두…!
정문 바깥쪽에서 뿌연 먼지가 휘날리면서 육중한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뭐지?”
“무슨 일이야?”
갑자기 일어난 일에 생도들과 교관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먼지가 차츰 가라앉으며 대략의 형상이 드러났을 때.
“맙소사, 저게 다 뭐야?”
“마, 말이잖아? 둘, 넷… 여섯… 여, 열 마리? 열 마리다!”
생도들이 뜨악한 표정으로 외쳐댔다.
주유천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정문에 세워진 그것들을 보았다.
육두마차 한 대와 사두마차 한 대.
두 마차 모두 화려한 외관을 자랑했는데, 특히 육두마차는 그 규모만 보아도 혀가 내둘러질 정도였다.
마침 육두마차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고적산이 사비강에게 다가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이제 막 출발하려는 참이었으니까. 수고했다.”
“그럼.”
고적산이 물러가자 주유천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다 뭔가?”
“아무래도 장기간 여행이다 보니 필요할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화려한 마차가 왜 필요한….”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부상자가 여럿 발생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이보다 안전하게 이동할 방법도 없을 테니까요.”
“그렇긴 하네만… 이건….”
마차 내부를 확인한 주유천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야말로 초호화 객실이 따로 없다.
마치 홍등가의 기방을 보는 듯하다.
어딘지 난하고 화려한 장식들.
왠지 야릇한 생각이 떠오르는 내부다.
사실 이 마차들은 흑사방에 현금 대신 요구해서 받은 것이었다.
사비강이 말을 붙였다.
“물론 제가 매 소저와 여기서 뭔가를 할 생각으로 준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커험! 뭐, 일단은 알겠네.”
관칙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기에 주유천도 더 이상 뭐라고 하진 않았다.
그러는 사이 사비강은 생도들에게 사두마차에 짐을 싣도록 지시했다.
구경 나온 생도들이 그 모습을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건 그렇고, 어딜 갈 생각인가?”
“최종 목적지는 정해져 있습니다만, 우선은 안강(安姜)부터 들릴 생각입니다.”
“안강이라? 하긴. 그 지역에 네 개의 정도 문파가 자리 잡고 있으니, 생도들에겐 공부가 될 지도.”
“예, 반드시 가야만 하지요.”
사비강은 조금 다른 의미로 눈을 빛내며 대꾸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곳에 가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으니까. 늦지나 않았으면 좋겠군.’
**
여정 첫날밤은 노숙이었다.
생도들의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으로 투덜거리는 사람은 바로 목단화.
그녀는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으며 아랫입술을 꾹 씹었다.
“짜증나는 인간.”
물론 사비강을 두고 한 말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이번 노숙만 해도 그렇다.
늦은 오후, 마을 한 군데를 지났지만 사비강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강행군을 이어 갔다.
첫날부터 거의 쉬지 않고 걸은 셈이다.
몇몇 생도들이 투덜거렸지만 사비강은 “기운이 가장 팔팔할 때 많이 걸어야 하지 않겠냐?”라고 말하며 히죽거릴 뿐이었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초호화 육두마차에서 편안하게 여행을 즐겼다.
매설란과 함께.
화나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생도들은 모두 걷는데, 능소소는 육두마차를 몰았고, 단리정은 사두마차를 몰았다.
물론 능소소가 모든 말의 관리를 도맡았고, 단리정이 각종 심부름을 맡았지만, 강행군에서는 열외된 것이나 마찬가지.
‘누가 봐도 불공평하잖아!’
그렇다고 사비강에게 가서 자신도 종자로 써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이래저래 짜증이 치미는데, 마침 저만치 단리정이 건초더미를 들고 지나가고 있었다.
‘말에게 먹일 건가?’
목단화가 턱짓을 하자, 옆에 있던 민유향이 얼른 나서서 그를 불렀다.
“야, 너!”
“음… 나?”
단리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너!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니?”
“아, 미안….”
“이리와.”
강압적인 태도에 단리정이 잠깐 머뭇거렸지만 곧 다가왔다.
백미령이 그의 발을 슬쩍 걸어 넘어뜨렸다.
“엇!”
그 바람에 단리정은 건초더미를 놓치며 넘어지고 말았다.
“아야야.”
민유향과 백미령이 까르르 웃었다.
“호호. 너 그렇게 약한 몸으로 어떻게 무공을 익히는 거니?”
“말먹이 먹이려다가 네가 먹히는 건 아니니?”
두 생도가 노골적으로 놀려댔지만, 단리정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목단화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침 목단화가 팔짱을 끼고는 단리정 앞으로 다가왔다.
“말 관리는 능소소가 전담한 걸로 아는데, 이걸 왜 네가 들고 가는 거지?”
“아, 그건 사실….”
단리정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목단화가 내심 조소했다.
‘끼리끼리 노는군.’
그녀가 우아하게 걸어와 건초더미에 털썩 앉았다.
단리정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안 되는데….”
“깔아.”
“뭐?”
“여기 깔아. 이건 내 잠자리로 써야겠어. 말먹이는 다시 가져와.”
“아, 하지만 그건 안 돼. 왜냐하면….”
“시끄러워! 넌 잡역꾼 아니니? 우린 돈을 냈으니까, 우리 말을 들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그 건초더미는….”
“됐어. 깔라면 깔아.”
목단화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몰아세웠다.
단리정이 다시 뭐라고 말하려고 하자, 목단화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군말 말고 깔라니까!”
단리정이 깜짝 놀라서 뻣뻣하게 굳어있자, 목단화가 검을 뽑아 들더니 건초더미의 매듭을 끊어냈다.
마침 둘둘 말려 있던 건초더미가 두루마리처럼 펼쳐졌다.
“뭐야? 마침 깔고 자기 좋게 매듭 되어 있잖아?”
목단화가 피식 웃고는 그 위에 드러누웠다.
조금 구린 냄새가 나긴 해도 땅의 한기를 막기에는 충분했다.
한편, 단리정의 표정은 사색이 됐다.
목단화가 그 모습을 즐기듯 말했다.
“이제 가 봐.”
“건초더미….”
그러자 민유향과 백미령이 단리정의 가슴을 밀어냈다.
“안 들리니? 가 보라잖아.”
“가서 소소에게 말해. 우리에게 빼앗겼다고. 호호호.”
그때였다.
“정아, 거기서 뭐하냐?”
“아, 교관님.”
마침 사비강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민유향과 백미령이 멈칫거리고는 노려보았다.
목단화 역시 몸을 비스듬히 세우고는 사비강을 당당히 쳐다보았다.
마침 가까이 다가온 사비강이 이맛살을 잔뜩 구기고는 목단화를 보았다.
“너, 내 뒷간에서 뭐하는 거냐?”
“뭐라고요?”
“거기 누워서 뭐하는 거냐고.”
“자려고 그러는데, 왜 그러시죠?”
“내 뒷간에서?”
“그러니까 그 뒷간이라는 게 무슨 말이냐고요!”
사비강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단리정을 보았다.
“너, 말 안했냐?”
“잠깐. 무슨 말이에요? 지금!”
목단화가 다시 끼어들었다.
단리정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 저기… 그게… 그건 말에게 먹일 건초더미가 아냐.”
“뭐? 그럼?”
“내 이동식 뒷간이다.”
사비강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동식 뒷간이라니….”
“인솔자인 내가 똥을 싸느라 모든 생도들이 멈춰서 기다리면 비효율적이지 않느냐? 그래서 사두마차 별실에 깔아 둔 내 전용 뒷간이란 말이지. 뭐, 건더기는 바로바로 치우도록 했지만.”
“그, 그런….”
“그런데 아무래도 역시 좋은 생각은 아니었나봐. 마차에 냄새가 배는 것 같아서 버리려던 참이었지.”
“그, 그럼… 이게….”
단리정이 안절부절 못하며 대답했다.
“사실 버리려고 가던 참이었어. 그런데 네가….”
순간 목단화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제야 그녀는 아까부터 은근하게 풍겨 오는 구린 냄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꺄아아아악!”
그녀가 기절할 듯 비명을 지르며 튀어 올랐다.
“이거 좀 부끄럽군.”
사비강이 뒤통수를 긁적이자, 단리정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교관님, 차라리 마차 바닥에 구멍을 뚫는 건 어떠세요?”
“음… 그러면 내가 똥을 쌀 때마다 생도들이 마차 아래로 떨어지는 내 똥을 볼 거 아니냐? 역시 그냥 밖에서 싸련다.”
“네… 그게 좋겠네요.”
한편, 목단화는 혼이라도 털린 표정으로 나무에 등을 털썩 기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비강이 단리정을 끌고 가며 물었다.
“소소는 어디에 있느냐?”
“마차에 밴 냄새를 없애려고 지금 향을 피우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고생이 많구나. 그럼, 끝나는 대로 소소에게 내가 있는 마차로 들어오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아참.”
사비강이 목단화를 슥 돌아보더니 히죽 웃었다.
“그게 정 마음에 들면 잠자리로 써도 된다. 취향이라는 건 존중받아야하는 법이니까.”
“누, 누가… 이딴….”
목단화는 멀어져 가는 사비강의 뒤통수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평생… 저주할 거야! 사비강! 저주할 거야!’
어느새 그녀의 눈이 붉게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