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25화 (25/670)

# 25

귀환 마교관

25화

“이거 생각보다 일이 좀 이상하게 꼬이는데?”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던 곡보옥의 표정에 근심이 스며들었다.

밤중에 사비강이 염자량과 함께 학관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

직후 곡보옥은 연우경과 함께 그 뒤를 쫓아왔다.

그런데 사비강이 찾은 곳은 바로 흑사방.

어떻게 이곳을 찾아냈는지 모르겠지만, 정문에서 기도 못 펴고 쫓겨날 것이란 예상과 달리 흑사방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곡보옥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 교관… 무공이 저 정도였나?”

비록 먼발치이긴 하지만 이렇게 직접 지켜본 건 처음이었다.

“설마 일이 잘못 되진 않겠지?”

“잘못 되어도 우리가 알 바는 아니지.”

곁에 선 연우경이 냉랭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이게 우리 짓….”

“우리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저 염자량과 밖에서 만날 거라는 걸 떠들어댄 것 외에는.”

“하긴. 그건 그렇지.”

곡보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늘 여유 있는 연우경을 보면 왠지 안심이 된다.

그런데 그때.

“네놈들은 여기서 뭐하는 거냐?”

서늘한 목소리.

곡보옥과 연우경 뒤로 시커먼 그림자가 덮였다.

**

등부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하필 이곳에 사비강이 있을 줄이야.

사비강의 시선이 힐끔 승룡도로 향하자 등부형이 얼른 소리쳤다.

“나, 나는 그저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서 왔소. 그러는 사 교관은?”

“나 역시 개인적인 볼일이오.”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한편,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 것을 깨달은 위상탁이 미간을 구겼다.

“용천관의 교관… 이셨소?”

“그렇소.”

“한데 어째서 빌리지도 않은 돈을 받으시겠다고….”

“저자가 우리 생도의 돈을 빌려 갔소. 그러니 이자를 포함해서 모두 받아야겠소.”

옳거니, 이놈이 그놈이로구나.

위상탁이 힐끔 돌아보자 등부형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위상탁이 내심 조소를 지었다.

등부형이 허구한 날 골치 아프다고 말하던 녀석.

교관의 자격도 없으면서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서는 용천관의 물을 다 흐려 놓는다는 바로 그 녀석.

‘오히려 잘 된 걸지도.’

위기는 곧 기회다.

이는 흑사방을 이끌어 온 그의 평소 신념이었다.

이 위기를 잘 넘긴다면, 오히려 흑사방은 더 큰 기회를 얻으리라.

어찌 알고 여기까지 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회비 강탈 사건을 두고 찾아온 것일 터.

하지만 사비강에게는 어떠한 물적 증거도 없을 것이다.

위상탁이 차분한 표정으로 포권을 취했다.

“제 아들 녀석은 돈을 빌린 적이 없다고 하니, 교관께서 잘못 찾아오신 듯하오. 그만 오해를 풀고 돌아가 주시길 바라오.”

“그럴 리가. 틀림없이 저 녀석이 돈을 빌려 갔으니 돌려받아야겠소.”

그러자 위덕천이 발끈해서 다시 소리쳤다.

“닥쳐라! 아무런 증거도 없이 본방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다니! 오히려 위자료를 받아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러고도 당신이 어엿한 정도의 교관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물론이지. 어엿한 정도의 교관이니까 이딴 사파 무리들을 계도하러 온 것 아니겠나?”

“말씀이 심하시오!”

이번에는 위상탁도 참지 못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흑사방을 사파로 치부하다니.

그가 평소에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사비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틀린 말을 했소? 아비라면 자식을 감싸기만 하지 말고 잘 타일러주셔야 하지 않겠소? 뻔뻔하게 돈을 빌려가 놓고 저렇게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데, 그저 자기 새끼라고 감싸기만 할 거요? 이러고도 정파라고 할 수 있소?”

위상탁의 인내심이 단숨에 한계까지 치달았다.

그가 부르르 떠는데, 위덕천이 다시 소리쳤다.

“노옴!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냐? 나는 돈을 빌린 적이 없다!”

“그럼? 빌린 게 아니라 빼앗은 거냐?”

“뭣이?”

“그렇다면 이자가 좀 더 센데. 원금의 두 배는 받아야 해.”

“뭐 이런 개 같은…!”

“지금이라도 인정하고 갚겠다면 이자를 오 할로 깎아 주겠다.”

위덕천은 검을 쥔 채로 바들바들 떨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칼부림을 해서 녀석을 자근자근 다져놓고 싶은 심정.

마침 지켜만 보던 등부형이 나섰다.

“사 교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만하시는 게 어떻소?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렇게 강짜를 부리면 어쩌자는 거요?”

“저 녀석들이 증거요.”

사비강이 바닥에 나뒹구는 두 무인을 가리켰다.

자량에게 상처를 입은 녀석들이었다.

위상탁이 얼른 나섰다.

“그것도 확실한 증거라고는 할 수 없지 않겠소?”

“그럼, 뒤져서 확실한 증거가 나오면 어쩔 거요?”

“뒤져서…?”

“그렇소. 우리가 뒤져서 돈주머니라도 나온다면 인정할 거요?”

“하! 설마 지금 장내를 다 뒤져보겠다는 거요?”

“못할 것도 없지.”

위상탁은 기가 찼다.

겨우 두 명이서 이 너른 장내를 샅샅이 뒤져보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아직 그 돈주머니가 있을 리도 없지만, 있다고 해도 겨우 두 명이 어찌 찾아낸단 말인가?

‘생각보다 멍청하군.’

위상탁은 내심 조소를 지었다.

“흐음. 그럼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어쩌시겠소?”

“그럼… 뭐, 사과하겠소.”

굳이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기에 별로 할 말이 없는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위상탁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농을 하시는 거요? 난데없이 나타나서 이런 소란을 일으키고도 사과만 하면 끝이다? 게다가 장내를 온통 뒤지겠다고 하시면서?”

“흐음.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걸렸다.

위상탁은 까칠한 수염을 한 차례 쓰다듬고는 등부형을 돌아보았다.

“글쎄올시다. 등 교관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우리가 억울하게 오해를 산 것이라면.”

“흐음.”

등부형의 표정에 비로소 여유가 찾아왔다.

위상탁이 이리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일 터.

“만약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사 교관은 큰 실수를 저지르는 셈이오. 그럴 경우 본관의 명예를 훼손하고, 생도의 회비를 잃어버린 사 교관에게 엄벌이 불가피하오.”

“그럼, 사 교관님은…?”

“응당 교관직에서 물러나고, 흑사방의 피해 복구에 드는 일체의 비용을 전부 지불해야 할 것이오. 또한 흑사방이 원한다면 위자료 또한 지불해야 하오.”

“…라고 하시는군요. 어떻소? 정말 한 번 해보시겠소?”

위상탁은 이제 희미한 웃음까지 머금었다.

이제 네놈이 걸어 볼 차례다.

지금이라도 꼬리를 말고 물러나겠느냐?

물론 그렇다고 한들 징계는 피할 수 없을 터다.

‘그래도 보통의 경우라면 여기서 멈추기 마련….’

“좋소. 대신 돈주머니가 나오면 그쪽도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요.”

“대가라면?”

“강탈한 돈의 두 배를 받겠소.”

“뭣이?”

“어차피 상관없지 않소? 소방주가 그처럼 결백하다면 물증이 나타나진 않을 테니.”

위상탁이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물증이 나타나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상대의 저런 오만방자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왠지 모를 찝찝함이란….’

그때, 위덕천이 버럭 소리쳤다.

“오냐!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보아라! 하지만 물증이 나오지 않을 때는 네놈도 책임을 져야 한다!”

“바라던 바다.”

위상탁이 나설 겨를도 없었다.

위덕천은 자신 만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염자량에게서 빼앗은 돈은 지난 이틀 동안 기루에서 전부 탕진했다.

돈주머니 역시 아무 기녀에게 줘 버렸으니 발견될 리가 없었다.

다소 불안한 예감을 가졌던 위상탁도 곧 마음을 정리했다.

어차피 찾아내지도 못할 물증에 마음 쓸 필요가 없지 않나?

사비강이 위상탁을 돌아보았다.

“그럼 이곳을 좀 살펴봐도 되겠소?”

“좋소. 단, 시간은 한 식경(30분)만 드리겠소. 우리도 생활을 해야 할 것 아니겠소?”

위상탁이 희미하게 비소를 지었다.

사실 이 너른 가장을 한 식경 동안 뒤진다고 해봐야 얼마나 살펴보겠는가?

방 하나를 뒤지는데도 그 정도 시간은 걸리리라.

사비강이 싱긋 웃었다.

“뭐, 그 정도면 충분하오.”

‘충분?’

위상탁이 눈썹을 구기는데,

“들어와라, 적산.”

사비강이 허공을 향해 읊조리듯 말했다.

위상탁을 비롯한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참이 지났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자, 위상탁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금 누굴 기다리는….”

때마침.

슈슈슉! 쉭! 쉬쉬쉭!

대략 서른 정도에 달하는 무인들이 담장을 넘으며 사비강 앞에 새카맣게 모여들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흑의 무복을 입은 자들의 목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위상탁을 비롯한 흑사방의 무인들은 얼이 나간 표정으로 그들을 보았다.

‘저, 저들이 어디서…? 아니, 그보다 어떻게 그 말을 듣고…?’

사비강은 가만히 읊조렸을 뿐이었다.

전음(傳音)도 아니다.

그냥 단순한 중얼거림.

그런데 바깥 어딘가에 있던 자들이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적어도 흑사방 근방에는 없던 자들이다.

사실 이는 먼 거리까지 말을 전달하는 매직 마우스(Magic mouth) 마법인데, 여기서 알아 볼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사비강이 고적산을 보다가 이마를 찌푸렸다.

“저건 왜 데리고 왔어?”

그의 눈길이 향한 곳에는 바로 연우경과 곡보옥이 머리에 자루를 뒤집어 쓴 채 쓰러져 있었다.

아마도 혈을 짚여 꼼짝하지 못하는 듯했다.

“언덕 위에서 이곳을 염탐하기에 잡아왔습니다.”

“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만.”

“죄송합니다.”

“그건 됐고. 자량.”

“예… 아, 예?”

“회비를 담은 돈주머니가 어찌 생겼다고 했지? 모두가 듣도록 큰 소리로 대답해라.”

“아, 그게… 매화 자수가 놓인 주머니입니다.”

“자, 다들 들었지? 찾아라. 한 식경 주겠다.”

“일각 안에 찾겠습니다.”

“그래, 그러라고 한 말이야.”

사비강이 손을 휘젓자 흑의 무인들이 일시에 흩어지며 장내를 뒤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하던 위상탁이 곧 기분 나쁜 표정으로 말했다.

“보시오, 교관! 저렇게 많은 자들이 장내를 수색할 거라곤 말하지 않았잖소!”

“난 우리 둘이 뒤지겠다고 말한 적도 없소만?”

“그런….”

“에이, 설마 우리 둘이 뒤지는데 겨우 한 식경으로 제한하신 건 아니겠지요? 그건 누가 봐도 억지인데….”

“끄음!”

위상탁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사비강을 노려보았다.

‘오냐, 그래 어디 한 번 마음대로 설쳐 보아라! 그런다고 없는 돈주머니가 나올….’

“찾았습니다!”

고적산이 경신법을 펼쳐 빠르게 사비강 앞으로 나왔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는 것과 동시에 손으로 돈주머니를 받쳐 들었다.

“확인해 주십시오.”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매화 자수가 새겨진 돈주머니.

마침 옆에 있던 염자량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어? 마, 맞아요! 이게 제가 회비를 거둘 때 사용한 주머니입니다!”

“액수 확인해라.”

은자로 채워진 돈주머니는 꽤나 묵직했다.

염자량이 얼른 그것을 바닥에 놓고 돈을 세기 시작했다.

한편, 위상탁과 위덕천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입을 척 벌렸다.

‘말도 안 돼! 어째서 저것이!’

분명 밖에서 모두 사용한 것이다.

이 집에서 나올 까닭이 없다!

‘설마…?’

위상탁과 위덕천의 눈길이 사비강에게 향했다.

사비강이 히죽 웃어 보였다.

“이거 아무래도 물증이 나온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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