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24화 (24/670)

# 24

귀환 마교관

24화

염자량이 사비강에게 호의적으로 돌아서자, 그 여파는 등부형에게까지 미쳤다.

지금까지 은근한 후원을 해오던 천화상단의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깨져 버린 자하낙인도를 대신해 더 좋은 보도를 선물하겠다는 지부장은 그 후로 연락조차 잘 되지 않았다.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때문에 등부형은 다른 후원자를 찾기 위해 은근히 주변 실세들을 더듬고 다니던 때였다.

그러다가 흑사방과 연을 맺었다.

마침 흑사방은 정파로 공인받기 위해 안달이 난 터였다.

상단을 무리 없이 이끌고 여기저기 거래처를 확보하려면 역시 정도맹과 연을 맺는 것이 유리했기에.

그러던 중 연우경이 찾아왔다.

“흑사방을 잘 이용하면 사 교관에게 중징계를 내리고, 교관님은 더 큰 후원을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연우경의 은밀한 계획을 들은 등부형은 무릎을 탁 쳤다.

흑사방을 이용해서 연무기행 경비를 강탈한다.

물론, 대놓고 사주해서는 곤란하다.

넌지시 의중만 알리면 된다.

눈치 빠른 흑사방주라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길 것이다.

애초에 정도(正道)와 거리가 먼 자들.

위험이 높아도 그만한 대가가 주어지면 일단 행동에 나서는 무리들이다.

밑밥은 연우경도 깔았다.

소방주가 자주 드나드는 객잔에서 염자량이 회비를 가지고 언제쯤 아랫마을에 나타날 것인지 알 수 있도록 은근히 떠들어댔다.

현직 교관이 은근히 묵인한 일.

그리고 나름 신뢰성 있는 정보.

흑사방으로서는 기회였다.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총관이 제지했다.

그러나 위험이 높을수록 대가도 큰 법.

“소방주가 교관만 될 수 있다면….”

등부형은 인사권이 강한 천세명 교관부장과도 친분이 높다.

즉 등부형이 확실히 추천해 준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결국 흑사방이 나섰다.

**

‘참 무서운 아이로고.’

등부형은 술잔을 들이켜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연우경.

여러 교관들을 골탕 먹이고 애먹인 녀석이다.

하긴 요즘 생도들은 워낙 영악해서 조심하지 않으면 오히려 된통 당하고 만다.

‘우리 때는 교관의 그림자도 밟지 못했거늘. 참, 말세로다.’

그나마 연우경이 자신에게 만큼은 호의적으로 대하기에 다행이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위상탁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등 교관. 우리 흑사방이 오해를 참 많이 받고 있소. 예전이야 좀 지저분한 일도 했지만, 요즘은 또 그게 아니거든. 여러모로 좋은 일도 하고 말이오.”

“하하. 이제 방주님의 덕망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유명하긴 개뿔.

등부형이 내심 조소를 지었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다.

황하의 물이 백년이 흐른들 맑아질까?

뭐, 그렇다고 해도 흑사방의 소방주가 교관이 되는 건 그로서도 나쁘진 않다.

일단 다루기 쉽고, 개인적으로 지속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을 테니.

“자, 받으시오. 내 등 교관에게 무척이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오.”

“오히려 제가 다 감사하지요.”

위상탁은 껄껄 웃으며 등부형의 잔에 술을 채우더니 손뼉을 쳤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긴 상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건 뭡니까?”

“내가 등 교관께 드리는 선물이라오.”

“선물이라니….”

등부형은 상자의 덮개를 천천히 열어보았다.

금빛 문양이 새겨진 도집.

붉은 수실이 달린 손잡이.

금룡이 승천하듯 도집을 휘감아 오르고 있었다.

“이건…!”

등부형의 눈동자가 떨렸다.

위상탁이 까슬까슬한 턱수염을 쓸며 말을 이었다.

“오래 전, 어렵사리 구한 물건이라오. 등 교관이 얼마 전에 보도를 잃었다는 소식을 들어서 말이오.”

“이건… 승룡도(昇龍刀)가 아닙니까?”

“그렇소. 혹시 마음에 안 드시오?”

“아니오! 그럴 리가요! 세상에 이렇게 귀한 보도를 어찌 제게…!”

“허허허, 귀한 보도일수록 제 주인을 찾아가야 하는 법. 이제야 그 보도가 주인을 찾았구려.”

등부형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승룡도.

자하낙인도에 버금갈 정도의 보도다.

아니, 자하낙인도보다 한 급 위로 쳐주는 이들이 더 많다.

자하낙인도가 차분하고 단아한 인상이라면, 승룡도는 화려하고 위엄 있는 분위기를 풍긴다.

그야말로 허리에 패용하고 다닌다면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으리라.

“승룡도라니…, 한 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허허. 이미 등 교관 것이 되었는데, 어찌 내게 묻는단 말이오?”

등부형이 천천히 승룡도를 꺼내 들었다.

스르르릉.

도집에서 뽑혀 나오는 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아아, 아름답구나!’

시린 빛을 뿜어대는 도신을 보며 등부형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오.”

“세상에 승룡도를 보고 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너무나 귀한 물건, 감사한 마음으로 잘 받겠습니다.”

“많이 부족하나,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 주시길 바라겠소.”

“이를 말씀입니까? 혹시라도 부탁하실 일이 있으면 이 등 아무개에게 언제든 연락 주시지요.”

“허허허! 참으로 든든….”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위상탁이 기분이 상한 듯 이마에 주름을 깊게 새겼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지금 등 교관님과 함께….”

“큰일 났습니다, 방주님!”

사내가 다급하게 외쳤다.

일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위상탁이 등부형을 잠깐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웬 남자가 찾아와서 장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남자? 그게 누구야?”

“저, 정확히는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빚을 갚으라며 하도 난리를 쳐서….”

“빚을 갚아? 그게 무슨 소리야!”

“자,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소방주님이 그자에게 돈을 빌려 가셨다고….”

“뭐?”

위상탁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돈이라면 차고 넘치는 녀석이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그건 저도 잘….”

“됐고! 상대가 몇 놈이나 되느냐?”

“두… 명입니다.”

쾅!

위상탁이 식탁을 내려쳤다.

“겨우 빚쟁이 두 놈을 막지 못해서 이 난리라는 것이야?”

“그것이 무척 괴이한 무공을 사용하는지라… 도저히….”

“한심한 녀석들! 어디냐? 내 직접 가겠다!”

“죄, 죄송합니다, 방주님.”

위상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등부형에게 포권을 취했다.

“미안하게 됐소, 등 교관. 아무래도 집안에 문제가 생긴 듯하구려.”

“아닙니다. 방주님에게 생긴 변고는 제게 일어난 일과 다름없지요.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너무 미안한데….”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미 방주님과 저는 형제 같은 사이 아닙니까?”

등부형이 승룡도를 꽉 붙들며 대답했다.

“고맙소, 등 교관. 큰 힘이 되오.”

**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인가?”

흑사방 총관 만해력(萬海力)은 낭하를 따라 성큼성큼 걸으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의 곁을 따르는 수하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움직여 대니….”

“아무리 그래도 어찌 단 한 명을 제압하지 못해 이 난리란 말이냐!”

“흑인당주(黑印堂主)님이 직접 막아섰지만, 제대로 칼을 겨루지도 못하고 쓰러지셨습니다.”

만해력이 멈칫하고는 돌아보았다.

“흑인당주가 직접?”

“그,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상대는 적어도 절정 고수 이상의 실력이란 말이다.

“방주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기루에 계십니다만, 지금쯤 보고를 받으셨을 겁니다.”

“소방주께서는?”

“이제 막 도착하셔서 그놈과 대적하고 계십니다.”

그 말에 만해력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마침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자 안마당이 훤히 보였다.

만해력은 헛바람을 삼키며 멈칫하고 말았다.

여기저기 부상을 입고 쓰러져서 나뒹구는 자들.

모두 흑사방의 무인들이었다.

그리고 안마당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두 명의 남자.

그 중에서도 팔짱을 낀 채 소방주를 마주보고 있는 남자가 바로 원흉이리라.

“소방주님!”

만해력이 얼른 위덕천에게 다가갔다.

“총관 오셨소?”

“죄송합니다, 방비에 신경을 더 썼어야 했는데….”

“뭐, 괜찮소. 어차피 저자는 내게 볼일이 있는 것 같으니.”

만해력이 위덕천의 시선을 따라 남자를 보았다.

그가 짐짓 엄중하게 소리쳤다.

“이놈! 네놈은 누구기에 감히 이런 행패를 부리느냐!”

“내 이름은 사비강. 저 놈에게 빌린 돈을 받으러 왔다고 정확히 네 번째 말하고 있다.”

사비강이 꼿꼿이 선 채로 위덕천을 노려보았다.

위덕천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글쎄, 나는 네놈에게 돈을 빌린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봐. 이 녀석 얼굴 정말 모르겠어?”

사비강이 염자량의 어깨를 두드렸다.

위덕천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저놈들이 도대체 날 어떻게 찾았지? 하지만 증거는 아무것도 없어!’

마치 그 속생각을 듣기라도 한 듯 사비강이 부상자 두 명을 위덕천 앞으로 던졌다.

철퍼덕! 철퍽!

“끄으으.”

두 무인이 신음을 토해 내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녀석 손등에 난 상처와, 저 녀석 허벅지에 새겨진 자상. 저건 전부 이놈 작품이거든.”

염자량이 짐짓 어깨를 펴고 당당한 척했다.

하지만 위덕천은 인정하지 않았다.

“흥!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군. 이 녀석들은 서로 대련을 하다가 다친 것이다.”

“이래서 돈을 함부로 빌려 주면 안 된다니까. 알겠냐? 자량?”

“예, 뭐….”

염자량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하자, 위덕천이 다시 소리쳤다.

“글쎄, 나는 돈을 빌린 적이…!”

“우린 하루에 이 할씩 이자가 붙는다. 그래도 복리는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말고.”

“뭣? 지금 무슨 개소리를….”

“빌려간 지 이틀이 지났으니까, 총 사 할의 이자를 지불하면 되겠군. 아,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지?”

“자시(子時 : 자정)가 막 지났는데요.”

염자량이 대꾸했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럼, 하루가 더 지났으니 총 육 할의 이자를 내면 되겠군.”

“이 새끼가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를….”

“아아, 그러게 왜 인정을 안 하고 자꾸 시간을 끌어? 이자만 쌓였잖아. 돈 아깝게.”

“이런 미친 새끼! 더 이상은 못 참는다!”

결국 위덕천이 바닥을 차고는 사비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런데 그때.

“멈춰라!”

우렁찬 고함소리.

“방주님이 오셨다!”

“방주님이시다!”

흑사방의 무인들이 반색을 하며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정문을 지나 안마당으로 흑사방주 위상탁이 성큼성큼 들어섰다.

그는 함께 온 등부형을 의식해서인지 나름의 예법을 갖춰 물었다.

“어디서 오신 고인이시오?”

사비강이 몸을 돌렸다.

마침 함께 온 등부형이 눈을 크게 떴다.

“어… 어…? 사 교관이… 왜?”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제가 더 궁금하군요. 등 교관님이 왜 여기에 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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