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귀환 마교관
23화
“회비를 분실해?”
천세명이 걸음을 멈췄다.
그 곁에 나란히 걷던 매설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략의 사정을 전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천세명이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 정말이지 그자가 정교관이 되고 나서 바람 잘 날이 없소.”
“호호호. 그런가요?”
“오죽하면 내가 매 여협을 불렀겠소?”
“만약 이대로 그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제가 나설 일도 없겠네요.”
“뭐, 그렇기야 하지만 또 어찌될지 알 수 없지. 최근엔 워낙 이변이 잦아서 말이오.”
“그렇다고 해도 연무기행이라…. 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잘 되다니?”
천세명이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매설란을 돌아보았다.
매설란이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원래 남녀 사이는 여행하다가 정이 싹트는 법이잖아요?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잠자리도 어수선할 테고요.”
그녀가 어깨를 움츠리며 쑥스러운 듯 말했다.
그 바람에 그녀의 가슴이 가운데로 모이며 깊고 보드라운 계곡이 만들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천세명이 얼굴을 붉혔다.
그가 얼른 내공을 운기하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매혹적이로다.’
깊게 파인 가슴골과 골반 옆으로 길게 찢어진 하의.
걸을 때마다 그녀의 허벅지가 힐끗힐끗 드러났다.
자칫 정신을 놓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정도로 아름답다.
그렇기에 그녀는 위험하다.
매혼섭공(魅魂攝功).
그녀의 독문무공이다.
원래 그녀는 연검(軟劍)을 쓰는 실력자지만, 매혼섭공으로 더 유명했다.
때문에 그녀의 별호 역시 섭혼천녀(攝魂天女)가 됐다.
누구라도 그녀와 신체를 접촉한 후 욕정을 느끼게 되면 그 기의 흐름이 순식간에 그녀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애초에 호신용으로 익혔던 것이지만, 타고난 아름다움이 워낙 대단했기에 검공보다는 매혼섭공을 자주 사용하게 됐던 것.
그러다 보니 이젠 아예 그녀 스스로도 그러한 방식을 애용하게 됐다는 소문이다.
‘정신 차리자!’
천세명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자칫 욕정을 품고 자제력을 잃었다간 패망의 지름길이 열린다.
그 길은 자신이 아닌, 사비강이 걸어가야 한다.
두 사람은 용천관 후원에 마련된 정자 위로 올라섰다.
정자는 절벽 끝에 위태롭게 세워져 있었는데, 산세가 훤히 내려다보여 경치가 무척 좋았다.
때문에 매설란은 용천관에 부임한 후 줄곧 이곳을 찾곤 했다.
“어찌 됐든 연무기행을 떠나게 되면 잘 좀 부탁드리겠소. 이 용천관과 생도들을 위해서 말이오.”
“걱정 마세요. 아마 다시는 무공을 쓰기 힘들어질 테니.”
매설란이 생긋 웃었다.
천세명이 뛰는 가슴을 자제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그때.
수군수군.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
순간 천세명이 흠칫거리고는 주변을 살폈다.
매설란 역시 낌새를 채고는 얼른 돌아보았다.
천세명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누구냐?”
그때.
“아우, 교관님. 전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인마, 내가 겨우 기를 차단했는데 말을 하면 어떡해?”
“하지만 팔이 떨어질 것 같다고요!”
“이것도 수련의 일환이라니까!”
“젠장, 수련은 무슨! 매 교관님 속옷 보려고 그러는 거면서!”
“닥치지 못해!”
옥신각신하는 소리.
천세명과 매설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자 난간으로 다가가자, 마침 아래쪽에 매달려 있던 사비강과 염자량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올려다보았다.
히죽.
“꺄악!”
매설란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천세명이 뭐라고 할 겨를도 없이 사비강이 염자량에게 으르렁댔다.
“네놈 때문이다!”
“그런 소리 좀 그만하고 저 좀 올려 보내 달라고요! 부상자를 너무 막 다루시는 것 아닙니까?”
“제기랄! 약골 녀석!”
사비강이 염자량의 목덜미를 낚아채더니 정자 위로 훌쩍 날아올랐다.
“후아아!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는 줄 알았네!”
“커험, 험! 이제 알겠느냐? 기의 운용을 제대로 펼치면 보다 더 오래 매달릴 수 있는 거다.”
“명, 명심하겠습니다.”
염자량이 우선 상황 수습을 위해 진중한 표정으로 포권했다.
하지만 천세명의 붉어진 얼굴은 이미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사 교관!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였소?”
“보다시피 생도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교육을 이따위로…!”
“말씀드렸을 텐데요. 전 저만의 교육 방식이 있다고.”
“닥치시오! 도대체 정자 난간에 매달려 있는 게 무슨 교육이라고…!”
“좋은 경치를 보면서 기를 운용하면 보다 기의 흐름이 원활하여 양기가 보충되고….”
“시끄럽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하시오! 당장 매 교관에게 사과하시오!”
“음? 왜요?”
“그야 당신이 매 교관의… 그… 그러니까…! 다리 사이를… 아무튼!”
“이해할 수가 없군요.”
사비강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매설란에게 포권했다.
“이곳에 오실 줄 알았소. 무척 좋은 경치요. 그럼 좋은 감상하시길 바라오. 뭐 하냐? 자량. 너도 부담임께 인사드려라.”
“아, 네! 훌, 훌륭하고 아름다운 경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비강이 염자량의 뒤통수를 탁 치고는 끌고 가다시피 정자를 내려갔다.
“저런…!”
천세명은 이제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가 매설란을 휙 돌아보았다.
“이제 아시겠소? 저 녀석이 저런 놈이오. 용천관의 품위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매 여협의 도움이 필요하오.”
“호호. 사비강… 재미있는 남자네요.”
매설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갔다.
**
고적산은 명령을 성실히 이행했다.
그는 정확히 이틀 만에 놈들을 찾아냈다.
“흑사방(黑謝幇) 녀석들입니다.”
“흑사방?”
처음 듣는 방파였다.
그런 곳이 있었던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변변찮은 곳이리라.
딱히 기억이 날 만한 사건조차 없었던.
고적산이 고개를 숙이며 보고를 이었다.
“예, 이웃마을에 거주하는 녀석들인데, 원래는 저잣거리에서 자릿세를 받거나 도적질도 일삼던 곳이었죠.”
“그런데?”
“최근 상단 하나를 인수하면서 정도맹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런 놈들이 감히 용천관 생도의 회비를 뺏어?”
“크크. 제 버릇 개 못 주는 법이죠. 앞으로는 정도를 지향하나 뒤로는 여전히 온갖 더러운 짓을 하는 녀석들입니다.”
고적산의 눈빛에 경멸이 어렸다.
그는 도적이나 다름없는 귀야채의 일원이었지만, 흑사방처럼 두 얼굴을 가진 가증스러운 놈들을 가장 혐오했다.
“우선 검을 썼던 녀석이 위덕천(魏德天)이라는 놈인데, 흑사방의 소방주로 나이는 서른셋입니다.”
사비강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염자량을 습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놈들이 그렇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믿는 구석이 있어서일 터. 그 일을 무마시켜 줄 만 한 자를 알고 있거나, 그게 아니면 오히려 종용을 당했거나.’
어느 쪽이든 혼나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
밤이 깊은 시각.
염자량은 무릎을 쥐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무릎이 부들부들 떨리고 입에서 침이 늘어졌다.
“헉, 헉, 헉.”
가까스로 허리를 편 염자량이 원망 가득한 눈길로 사비강을 보았다.
“도대체 여기까지 왜 데려오신 겁니까? 정말 아픈 사람을 상대로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시끄러. 아플수록 운동을 해야지.”
염자량은 자신이 괜한 말을 꺼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비강은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저만치 언덕 아래의 가장을 바라보았다.
제법 호화로운 곳이었는데, 입구에는 무인 두 명이 번을 서고 있는 것이 평범한 장소는 아닌 듯했다.
사비강이 턱짓을 했다.
“지금부터 저길 갈 거다.”
“저기가 어딘데요?”
“우리가 수금할 곳이지.”
“수금이라뇨?”
“받아야 할 것 아니냐? 빌려 준 돈을.”
“예? 그럼 혹시…?”
사비강은 대꾸도 없이 저벅저벅 걸어갔다.
염자량이 얼른 그 뒤를 따라갔다.
마침 입구를 지키고 있던 무인 두 명이 두 사람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비강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무인 둘이 그 앞을 거칠게 막아섰다.
“멈춰라! 웬 놈들이냐?”
무인 둘이 사비강과 염자량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사비강이 그들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비켜라.”
“허! 술도 처먹지 않은 녀석이 어디서 행패야?”
“이놈아, 죽기 싫으면 썩 꺼져라!”
사비강이 염자량을 힐끔 돌아보았다.
“들었지? 얘들이 이만한 일로 사람을 죽이려고 하네? 우린 우리 나름대로 살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겠냐?”
염자량이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문지기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미친놈이 뭐라고 씨부렁거리는 거야? 줘 터지기 싫으면…!”
팍!
꽈당!
쿠당탕탕!
사비강의 발길질에 얻어맞은 문지기가 그대로 문을 부수며 안마당까지 튕겨 날아갔다.
그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는지 더 이상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비강이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고는 시선을 다른 문지기에게 옮겼다.
히꾹.
문지기가 딸꾹질을 했다.
염자량은 그저 사비강 뒤에서 넋을 놓은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문지기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뉘, 뉘신지… 무슨 용무로….”
“돈 받으러 왔다.”
“도, 돈이라니… 무슨….”
“위덕천. 그놈이 우리 돈을 빌려 갔거든. 이제 갚을 때가 돼서 말이다.”
“잠,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문지기가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곧 몸을 돌리고는 후다닥 달려갔다.
사비강이 안마당으로 성큼 들어서더니 돌아보았다.
“뭐하냐? 돈 받으러 가야지.”
“예? 아, 예.”
염자량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사비강 뒤에 바짝 붙었다.
**
기루 삼 층에 위치한 특실.
등부형이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혀를 찼다.
“쯧쯧. 참으로 한심하지 않습니까? 생도들이 낸 회비를 홀라당 날려 먹다니 말입니다.”
“허허. 그러게 말이오. 아무래도 그자의 교관 자격이 의심되는구려. 등 교관께서 그리 신경을 쓰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소.”
마주 앉은 흑사방주 위상탁(魏相卓)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얼굴 표정은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위상탁이 등부형의 술잔을 채워 주며 말을 이어갔다.
“자, 드시오. 어차피 그런 교관은 이제 곧 잘릴 판이니. 더 이상 신경 쓸 게 뭐가 있겠소?”
“하긴. 오히려 잘 됐지요. 이 기회에 그런 근본 없는 교관은 정리되는 게 용천관을 위해서도 좋은 일일 테니.”
“내 말이 바로 그 말 아니겠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오히려 그런 사고가 일찍 터져서 다행인 듯하오.”
“그러게 말입니다. 행여나 연무기행 중 생도가 다치는 일이라도 발생하면…. 어휴,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픕니다.”
등부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술잔을 들이켰다.
그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거 이렇게 되면 오히려 회비를 빼앗아 간 그자에게 큰 상을 내려야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등 교관도 참. 아주 재미있는 농을 하시는구려.”
“하하하. 그런가요? 어쨌든 이번에야말로 그 망나니 같은 교관이 더 이상 본관의 물을 흐리지 못하겠군요.”
“만약 그가 그만두게 되면 자리가 비겠구려.”
위상탁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부터가 본론이다.
등부형이 그 속내를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빈자리는 곧 인재로 채워질 겁니다. 그렇잖아도 도검을 고루 잘 다루는 인재를 제가 눈여겨보고 있지요.”
“혹시 그 사람이….”
“제가 방주님께만 살짝 귀띔해드리자면, 나이는 서른 줄에 위 씨 성을 가졌지요.”
“허허! 허허허헛!”
위상탁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술병을 들었다.
“자, 드시오. 오늘따라 술맛이 좋소.”
“그러게 말입니다.”
두 사람은 덕담을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잠시 후, 닥치게 될 일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