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귀환 마교관
22화
곡보옥은 소리치고 싶었다.
이딴 식으로 계도하는 법이 어디에 있냐고!
이건 명백한 생도 폭행이라고!
하지만 무감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사비강을 보고 있자니,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맹수.
지금 사비강의 두 눈은 딱 그것과 같았다.
“자, 알아들었으면 어서 안내해라.”
곡보옥은 엉거주춤 일어나서는 연우경을 힐끔 보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사비강이 연우경에게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탁자에 놓인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과연 맛이 좋구나.”
사비강이 연우경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연우경이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훗. 어디 한 번 해보시지.’
한편 곡보옥과 함께 다루를 나선 사비강은 저잣거리를 지나다가 멈칫했다.
“잠깐 기다려라.”
그는 곡보옥을 한쪽에 세워 두더니 길가에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다가가 철전 한 닢을 던져 주었다.
‘뭐야? 이 와중에 선행인가?’
곡보옥이 코웃음을 치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사비강이 다가왔다.
“자, 가자.”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미 그곳에는….”
“닥치고 가기나 해.”
**
“여깁니다.”
곡보옥이 마을 어귀에 다다라서 멈춰 섰다.
그가 마을 어귀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놈들이 저쪽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여기 숲으로 도망쳤습니다.”
“몇 명이었나?”
“세 명이었습니다.”
“사용한 무기는?”
“도와 검이었습니다. 두 명이 환도를 사용했습니다.”
사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염자량이 진술한 내용과 일단 일치했다.
“여기까지 달아난 다음,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넌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연우경을 데리러 갔고?”
“그렇습니다.”
“참 이상하구나.”
“뭐가요?”
“어째서 그놈들은 너희들이 도망가도록 내버려 뒀을까?”
곡보옥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 그거야 도망가지 않는 녀석이 있으니 굳이 쫓아오지 않은 거겠죠.”
“아니. 보통 이런 경우에는 먼저 달아나는 놈을 쫓는 게 일반적이거든. 일이 복잡해지는 걸 원치 않을 테니까. 그런데 그놈들은 너희들 중 누구도 쫓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자량에게만 볼일이 있었다는 것처럼.”
“……!”
“이상하지 않냐? 마치 자량에게 큰돈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이.”
어느새 사비강은 곡보옥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곡보옥이 저도 모르게 뒤로 성큼 물러났다.
“그, 그거야 저도 모를 일이죠. 그놈들이 어째서 그랬는지…!”
“맞아. 넌 모르지. 그걸 알면 큰일 나지.”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숲속을 스윽 훑어보았다.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바닥에 패인 발자국과 흩어져 있는 나뭇가지나 낙엽들이 싸움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군데군데 혈흔도 보였다.
“녀석, 애 썼군.”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리는 사비강을 보며 곡보옥은 미간을 찡그렸다.
‘혼자 뭐라는 거야?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쳇!’
하긴 똥줄이 탈 것이다.
당장 닷새 안에 회비를 찾아내지 못하면 연무기행은 취소될 터.
게다가 회비를 분실했으니, 중징계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마침 사비강이 곡보옥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을 휘휘 저었다.
“넌 이제 필요 없으니 꺼져라.”
“그냥 가도 되는 겁니까?”
“그래. 꺼져.”
곡보옥이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후다닥 달려갔다.
그런 후에도 한참이나 서성이던 사비강은 순간 눈을 빛내고는 허리를 숙였다.
찢어진 천 조각.
그것을 손에 쥔 그가 몸을 일으키고는 말했다.
“왔느냐?”
누구에게 건넨 말일까?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변으로 검은 경장의 사내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슈슈슈슉.
“모두 소집했습니다. 주군.”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춘 사람은 바로 저잣거리에서 사비강에게 철전을 받았던 그 거지였다.
사비강이 천 조각을 휙 던졌다.
민첩하게 그것을 낚아챈 거지가 사비강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뭡니까?”
“찾아라. 모두 세 명이다. 키는 팔 척이 넘고, 한 놈은 검을 썼고, 두 녀석은 환도를 사용했다. 환도를 쓰는 한 놈은 손등을 칼에 찔렸고, 다른 한 놈은 허벅지에 긴 자상이 있다. 모두 오늘 당한 거다.”
사비강은 염자량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정보를 전하다가 잠깐 멈칫하고는 주변의 흔적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바닥을 휩쓴 발자국, 나무기둥에 새겨진 칼자국, 주변에 흩뿌려진 혈흔.
이 모든 것들은 단서가 된다.
그가 미간을 잠시 구기다가 말을 보탰다.
“검을 쓰는 녀석은 검술보다는 도술에 가깝다. 원래 그놈도 도를 주로 쓰는 녀석이었을 거다. 물론 셋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
“이 천 조각이 놈들의 것입니까?”
“그래. 셋 중 하나의 것이다. 정보가 더 있어야 하나?”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거지가 고개를 깍듯하게 숙여 보였다.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그래야지. 도적 새끼들은 도적 새끼들이 잘 알아야지.”
“…….”
“우선 찾아서 보고해. 기한은 사흘 준다.”
“이틀 안에 해결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라고 한 말이야.”
사비강이 걸음을 옮기려다가 문득 돌아보았다.
“너희들 혹시 그 후로 또 사고 치진 않았겠지?”
“말씀하신대로 자숙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난 인간을 믿지 않아. 그러니까 다들 헤이해지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수고. 난 이만 간다.”
사비강이 손을 흔들고는 저만치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흑의 경장 사내 중 한 명이 거지에게 다가왔다.
“대형,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차라리 은밀히 저자의 뒤를….”
“닥쳐라.”
거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 엄중함에 흑의 사내들이 모두 움찔거리고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말을 꺼내던 자 역시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사비강으로부터 철전을 받았던 거지, 그는 바로 귀야채의 총관 고적산(高積山)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와 함께 있는 자들 모두 귀야채의 무인들이었다.
고적산은 눈을 지그시 감고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그날을 겪어 보지 못해서 그렇다.”
“죄송합니다.”
“나는 똑똑히 보았다. 저 분이 화가 나면 어떻게 되는지….”
고적산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날, 사비강은 뜬금없이 귀야채에 나타났다.
무인들이 그를 막아섰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귀신처럼 공간을 이동하며 순식간에 채주 앞까지 다다랐다.
뭔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세상에 그런 무공이 존재한다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사비강은 채주에게 말했다.
“무릎을 꿇으라고는 하지 않겠다. 조용히 해산해라. 그럼 지금까지의 죄는 묻지 않겠다.”
물론 채주는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사비강은 거절하면 채주를 죽이고 부하들을 모두 자기가 거두겠다고 했다.
그야말로 웬 미친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실성한 소리를 해댄다고 여겼다.
채주 바로 곁에 서 있던 총관 고적산은 너무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채주가 코웃음을 치며 거절의 뜻을 보인 순간, 시비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한 줄기 바람이 옆을 스쳐 지나갔고, 그가 다시 사비강을 보았을 때는 곁에 서 있던 채주와 호법이 나란히 목을 잃은 채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호법의 머리는 바닥에 나뒹굴었고, 채주의 머리는 사비강의 손에 들린 채 피를 뚝뚝 흘렸다.
고적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비강이 채주의 머리를 들어 올려 마주보면서 푸념하듯 말했다.
“그러게… 그냥 순순히 항복하면 좋았잖아. 소중한 머리도 잃고 이게 무슨 꼴이냐? 쯧쯧.”
사비강의 시선이 고적산에게 향했다.
“얘 다음으로 높은 놈이 너냐?”
고적산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아혈이 짚인 사람처럼 목구멍이 꽉 막혔다.
사비강은 귀를 파며 투덜거렸다.
“사람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뭐, 곧 죽을 각오라면 상관없겠지.”
털썩!
고적산이 무릎을 꿇고 온힘을 다해 목소리를 쥐어짰다.
“사, 사, 살려… 주십시오!”
“그러니까 묻는 말에 대답을 해. 네놈이 여기서 제일 높은 놈이냐?”
“그, 그, 그렇습니다.”
“어쩔 거냐? 너도 도적의 명예를 걸고 목을 내놓을….”
“저, 저, 저희를 거두어 주셔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주군!”
고적산은 그대로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이마가 깨져서 피가 나왔다.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아프군.’
고적산이 이마를 매만지다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잠시 후, 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행여나 저 분 등에 칼을 꽂을 생각은 마라. 내가 용서치 않는다.”
“명, 명심하겠습니다.”
이럴 수밖에 없다.
그날 사비강은 말했다.
누구 하나라도 배신을 하면, 살아남은 귀야채 전원을 몰살시켜 버리겠다고.
그 눈빛은 진심이었다.
예전에도 그런 잔인한 행동을 몇 번이고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 그 눈동자에서 느껴졌다.
실제로 사비강은 마계에서 그렇게 살아왔다.
마계는 그래야만 살아남는 곳이었다.
사비강의 등에 칼을 꽂을 확률보다 귀야채 전원이 몰살당할 확률이 더 높았다.
적어도 고적산이 보기엔 그랬다.
그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
이틀이 지났다.
염자량의 회복 속도는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아직 완치된 것은 아니지만 숙소에서 부신각을 오가며 치료해도 될 정도로 몸이 좋아졌다.
이 역시 사비강이 그의 몸을 적당히 다듬어 주었기 때문이지만, 염자량은 그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럼, 낼 수 있는 자는 모두 낸 건가?”
“예, 끝까지 버티던 세 사람이 오늘 냈거든요.”
사비강의 질문에 염자량이 대답했다.
“그 세 사람이 누구지?”
“목단화와 민유향, 백미령 생도였습니다.”
“그렇군.”
끝까지 버티던 그 세 사람이 회비를 납부한 이유는 아마도 회비 분실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어차피 자신들이 회비를 내도 연무기행은 취소될 것이라 여겼으리라.
“그럼, 형편이 안 돼서 못낸 녀석들이 두 명이란 거군.”
“네.”
염자량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틀 전 빼앗긴 회비가 생각난 것이다.
하지만 사비강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넘어갔다.
“잘 알겠다. 고생했다. 남은 기간 여행 준비나 잘 해두도록.”
“하지만… 총 경비의 칠 할이나 되는 회비를 잃어버렸습니다. 부족한 경비를 어떻게 하시려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래도 제가 그날 밖에 나가지만 않았으면….”
염자량이 입술을 질끈 씹었다.
이 정도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고 분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사비강이 진중한 표정으로 염자량을 돌아보았다.
“겨우 그 정도 일로 의기소침하면 어디에 쓰겠냐? 아무래도 넌 양기가 부족한 모양이구나.”
“예?”
“너에게 부족한 양기를 좀 채워 주마.”
“부족한 양기라니….”
“따라와라. 좋은 경치를 보여주며 수련을 시켜 줄 테니.”
사비강이 히죽 웃으며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