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귀환 마교관
21화
주유천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보게. 사 교관. 자네 그럼 매 소저를 부담임으로 인정하는….”
“물론입니다!”
주유천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사비강이 빛나는 눈동자로 주유천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격하게 따지던 사비강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주유천이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네는 매 소저를 부담임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제가요? 크하하핫! 학장님도 참. 그것은 학장님의 지나친 배려에 제가 몸 둘 바를 몰라….”
“아니. 그건 지나친 배려가 아닐세. 응당 관례에 따라 특목반에도 부담임을 배정하려는….”
“하하하! 정말 그렇게 신경 써 주시니, 제가 어찌 매몰차게 거절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이….”
“아니, 마뜩찮다면 거절해도 괜찮….”
“학장님!”
“음? 왜 그러는가?”
사비강이 돌연 진중한 표정으로 주유천을 쏘아보며 진지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를 정녕 학장님의 호의마저 뿌리치는 무정한 녀석으로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지는 않네만.”
사비강이 느닷없이 포권을 취했다.
“학장님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렇잖아도 일손이 부족했던 실정이었습니다. 사실 저희 특목반에는 부담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흐음. 그렇다면 매 소저를 특목반 부담임으로 배정해도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오히려 매 소저께서 그런 하찮은 자리를 맡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매설란이 빙그레 웃었다.
“저는 어떤 일이든 영광스럽게 생각한답니다. 많이 부족하겠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사 교.관.님.”
사비강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소, 낭자! 아니, 매 소저. 아니, 매 교관이라고 불러야겠구려.”
“호호. 편하신 대로 불러 주세요.”
“정말 매 소저의 마음씨는 선녀도 울고 가겠소!”
학장이 수염을 쓸고는 말했다.
“커험. 그럼, 그 일은 정리된 걸로 알고 처리하겠네.”
“감사합니다, 학장님. 아, 매 소저.”
사비강이 매설란을 돌아보았다.
“우리 반은 조금 있으면 연무기행을 떠날 거요. 그건 혹시 알고 계셨소?”
“네, 그렇잖아도 얘기 들었답니다. 무척 설레는 걸요? 생도들과 함께 연무기행이라니. 이곳저곳 많은 곳을 둘러보게 되겠죠?”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곳저곳 많은 곳을 둘러보고, 이것저것 많은 것을 맛보며, 이것저것 많은 곳을 만지고 느끼고….”
“네?”
“아, 아무것도 아니오. 아무튼 환영하오.”
“고마워요. 교관님.”
매설란이 싱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한편,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등부형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며 조소를 지었다.
‘후후. 마음껏 즐겨라. 사비강. 그렇게 서서히 패망의 길로 걸어가도록 해라.’
그때였다.
“교, 교관님! 사비강 교관님!”
앳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생도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오며 다급히 외쳤다.
무릎을 쥐고 숨을 몰아쉬는 생도는 바로 조문탁.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사비강이 미간을 좁히고는 물었다.
“무슨 일이냐?”
조문탁은 잠깐 학장과 등부형의 눈치를 살피는 듯 머뭇거렸다.
사비강이 다시 일렀다.
“말해라.”
“저, 그게…. 자, 자량이….”
**
“여섯 군데 자상이 있어서 약을 발라 두었네. 당분간 격한 움직임은 무리일세. 타박상도 꽤 많아.”
부신각주 진백이 안쓰러운 눈길로 침상의 염자량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곁에 선 사비강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연무기행은 떠날 수 있겠습니까?”
“의원으로서는 권하지 않는 바이네. 좀 더 쉬면서 몸조리를 하는 게 회복도 빠를 테니.”
“아니요! 갈 수 있습니다!”
염자량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러다가 다시 통증을 느낀 것인지 얼굴을 찡그리며 드러누웠다.
“크윽.”
“조심하렴. 많이 다쳤구나.”
맑은 목소리가 울리며 향긋한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슬쩍 돌아보니 웬 여인이 어깨를 손으로 받치며 말을 건네 왔다.
허리를 숙이고 있으니 그렇잖아도 눈에 띄는 가슴골이 더욱 훤히 들여다보였다.
‘헉! 이, 이 사람은… 낮에 만났던…! 이름이… 매설란이라고 했던가?’
염자량의 얼굴이 빨개지자 매설란이 화들짝 놀랐다.
“어머, 열도 있는 것 같아요!”
“커흠.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만.”
진백의 말에 매설란이 고운 손을 염자량 이마에 댔다.
“하지만 이렇게 뜨거운데….”
“매 소저. 그렇게 계속 손을 대다간 더 뜨거워질 거요.”
사비강의 말에 매설란이 ‘어머, 정말요?’ 하며 손을 걷어냈다.
염자량이 어딘지 아쉬운 표정으로 침착함을 되찾아가는 동안, 사비강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연무기행은 데려가도록 하마.”
“예. 아, 그런데….”
염자량의 표정이 다시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제야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빼앗겼다는 사실이 떠오른 탓.
그의 표정을 읽은 사비강이 물었다.
“말해라. 어떻게 된 일인지.”
“그게… 사실은 제 잘못입니다. 회비를 가지고 마을로 내려가는 바람에….”
“마을까지는 왜?”
“연우경 생도를 만나려고 했습니다.”
“연우경을?”
사비강의 표정이 잠깐 꿈틀거렸다.
연우경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놈이 얼마나 약아빠진 녀석인지.
염자량이 자초지종에 대해서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교관님. 제가 학관을 나서지만 않았어도…!”
염자량이 입술을 꾹 씹었다.
사비강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자책할 일은 아니다. 진짜 나쁜 새끼들은 그 도적놈들이지.”
물론 연우경 그놈에게서도 냄새가 나지만.
그 생각을 속으로 삼키는데, 마침 매설란이 염자량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교관님 말씀처럼 너무 자책하지 마렴. 자량이 잘못한 건 없어.”
“자량을 알고 있었소?”
사비강이 놀라 물었다.
“아니에요. 오늘 낮에 잠깐 만났을 뿐이랍니다.”
“겨우 그 정도로 이름까지 기억하다니. 역시 매 소저는 대단하시오.”
“어머, 너무 칭찬하시면 부끄러워요.”
사비강이 다시 매설란의 손을 잡았다.
“매 소저. 우리 함께 이 생도들을 지켜 줍시다!”
“전 교관님만 믿을게요.”
“매 소저.”
한편 어딘지 끈적끈적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염자량의 표정은 점차 식어 갔다.
‘지금 아픈 생도 앞에서 저 둘이 뭐하는 짓이야? 어휴, 변태 교관….’
마침 사비강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지더니 염자량을 돌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곡보옥은 어디에 있느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연우경을 데리러 가겠다고….”
“그럼 다루로 갔단 말이겠지. 잘 알겠다.”
사비강이 조금 전의 모습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섰다.
마침 매설란이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 기회에 부족하던 것 좀 메우려고 합니다.”
“부족한 거라니….”
“그럼, 저 녀석 좀 부탁드리겠소.”
사비강이 슬쩍 돌아보고는 미소 지었다.
순간 매설란은 아주 잠깐 흠칫거렸다.
두근.
‘이 남자… 뭐야?’
낯선 느낌에 당황하는 사이 사비강은 이미 부신각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
마을에서 가장 큰 찻집인 신선루(神仙樓) 이 층.
“하하하하! 정말 이럴 때 보면 넌 천재 같다니까.”
곡보옥이 호탕하게 말하자, 연우경이 피식 웃었다.
“어쨌든 수고했어. 이걸로 사 교관은 한동안 난처해지겠군.”
“흐흐흐. 회비를 홀라당 잃어버렸으니 학관에서도 징계가 내려질 걸?”
“연무기행도 취소될 확률이 높겠지.”
“이제 닷새밖에 안 남았는데, 이런 대형 사고가 일어났으니, 뭐. 아아, 네가 그때 염자량의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안 봐도 눈에 훤하다.”
“그 녀석 엄청 당황하더라고. 지금쯤이면 염자량 녀석이 부신각에 실려 갔을 거야. 이제 교관도 알게 되겠지. 회비를 날려 먹었다는 걸. 난 사 교관 표정이 무지 궁금하다.”
“너무 설쳤어. 고작 창술 부교관이었던 주제에.”
“그러게 말이야. 아마 이번 일도 우리가 꾸민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할….”
말을 꺼내던 곡보옥이 연우경의 차디찬 시선을 느끼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연우경이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일렀다.
“입 조심해라. 뭐, 교관이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증거는 없겠지만. 모든 일은 왼손도 모르게 해야지.”
“미, 미안해. 너무 들떠서 그만….”
“아무튼 수고들 했다. 이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자고.”
그때였다.
“뭘 지켜보겠다는 거냐?”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마침 사비강이 다루 이 층으로 올라서며 연우경에게 다가왔다.
곡보옥을 비롯한 연우경이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됐다.
‘교, 교관이 여기에 왜…? 설마 벌써 염자량을 보고 여기까지 내려온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빨랐다.
생도들이 멍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사비강이 서늘하게 말했다.
“뭘 그리 놀라느냐? 죄 지은 사람처럼.”
“여긴 어떻게…?”
곡보옥이 용기 내어 물었다.
사비강이 냉랭한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자량이 부신각에 실려 왔다. 아니, 제 발로 부신각까지 찾아왔다. 온몸이 난자당한 상태로. 여기저기 베이고, 찢어지고 얻어터졌지.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고 버티다가 제 발로 겨우 부신각까지 피신한 거다.”
곡보옥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사비강이 빈 의자 하나를 끌고 와서는 식탁 옆에 철퍽 앉았다.
그리고 접시에 놓인 다과를 집어 우적우적 씹으며 말을 이어갔다.
“실로 대단하지. 내 제자지만 칭찬하지 않을 수 없군. 상대는 세 명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녀석은 가진 회비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어. 비록 이기진 못했지만 잘 싸운 거다. 그 자리에서 동료를 부르겠다며 줄행랑을 친 놈에 비하면 말이다.”
사비강의 시커먼 눈동자가 곡보옥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그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곡보옥은 숨이 턱 막혀 오는 것 같았다.
“그, 그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물어보자.”
사비강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그, 그건….”
“동료를 부르겠다며 떠났다는 놈이 왜 아직도 여기서 희희낙락거리고 있는 거냐? 내가 알지 못할 복잡하고도 미묘한 사정이 있는 거냐?”
“그, 그게… 나, 나도 이제 막 도착한 거여서….”
“그래? 이제야 여길 도착했다고?”
“어느 다루에 있는지 몰라서….”
사비강의 시선이 곡보옥 자리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았다.
마침, 연우경이 끼어들었다.
“그건 제가 미리 시켜 두었던 겁니다.”
“시켜 둔 잔이 벌써 비었구나.”
“보옥이 늦어서 제가 그냥 마셨습니다.”
“네 찻잔은 채워져 있는데?”
“다시 주문했지요. 제가 차를 좋아해서요.”
연우경이 생긋 웃었다.
사비강이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너냐?”
“무슨 말입니까?”
“이 일을 꾸민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연우경이 시선을 피하고는 찻잔을 들었다.
“기회가 흔치는 않다. 지금이라도 잘못한 게 있다면 엎드려 용서를 빌어라. 그럼 용서해 주마.”
“글쎄, 저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염자량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저 뻔뻔함.
“후후. 마음에 드는군. 그래, 그 정도로 뻔뻔하게 나와야 계도하는 사람도 즐거워지지. 안 그래?”
“…….”
“너희들은 방금 마지막 기회를 걷어찬 거다. 이제부터 내가 알게 되는 사실에 있어서 너희 잘못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면 엄벌하겠다.”
“뭐, 그러시죠.”
연우경이 픽 웃었다.
사비강은 다시 곡보옥을 돌아보았다.
“너.”
“왜 그러십니까?”
곡보옥이 짐짓 허리에 손을 얹고는 당당하게 일어났다.
사비강이 턱짓으로 계단을 가리켰다.
“앞장서라.”
“앞장서라니… 어딜….”
“그 복면인들과 맞닥뜨린 곳으로 안내해라.”
곡보옥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만하시죠? 어차피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을 거고. 이미 늦어 버렸으니 전 그냥 여기서 차나 좀 더 마시고 싶….”
짜악!
쿠당탕탕!
뺨을 얻어맞은 곡보옥이 탁자와 의자를 부수며 나뒹굴었다.
생도들은 물론, 주변 손님들도 놀라서 웅성거리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충격을 받은 곡보옥이 뺨을 어루만지며 사비강을 쳐다보았다.
사비강이 그에게 저벅저벅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안내해라. 좋은 말 할 때.”
“지, 지금 폭행하시는 겁니까! 생도를!”
“그럴 리가? 나는 계도하는 거다. 교관의 말을 거역하고 버릇없이 군 네놈을. 어엿한 교관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