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귀환 마교관
16화
“끄어….”
복면인은 희미한 신음만 흘릴 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부상을 입었기 때문인지, 정체를 밝히기 싫어서인지 모호한 상황.
사실 여운진 입장에서도 보통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사건이 커진데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 수모를 당했으니 뒤처리를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몰랐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천세명 일당은 조바심이 날 수밖에.
자칫 여운진의 정체가 드러나면 건진 것도 없이 온갖 힐난을 겪을 수도 있다.
물론, 여운진이 모든 것을 혼자 뒤집어쓴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여운진의 정체가 탄로 나지 않았다는 것만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등부형이 천세명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일이 꼬여 버렸습니다. 어쩌지요?”
“흐음.”
천세명이 굳은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그러는 사이, 주유천이 재차 호통을 쳤다.
“네 이놈! 지금 묻지 않느냐! 정체가 무엇이기에 감히 본관의 교관을 암습한 것이더냐? 어서 복면을 벗지 못할까!”
“끄으으.”
여운진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아무래도 말도 못할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저자를 부신각으로 옮겨 치료를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사람은 바로 천세명.
하지만 사비강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치료라니요? 저를 습격하려고 했던 녀석입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말을 할 수도 없지 않나? 복면을 벗긴다고 하더라도 얼굴만 봐서는 정체를 알 수 있을 리가 없고.”
천세명이 넌지시 좋은 말로 타일렀지만, 내심은 조마조마할 따름이었다.
사실은 치료를 핑계로 여운진을 저곳에서 빼낸 뒤에 달아나게 할 생각이었다.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이 최선이기에.
하지만 사비강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의지가 있으면 뭐든 하게 됩니다. 말을 안 하려는 것은 의지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그가 복면인의 머리채를 다시 움켜쥐고는 윽박질렀다.
“자, 말해라!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런 짓을 꾸민 거냐?”
“끄윽…!”
“네놈의 배후가 누구냐!”
여운진의 시선이 슬쩍 천세명에게 향했다.
구원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사비강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역시 더 맞아야겠구나. 그 전에 우선 네놈의 낯짝부터 확인하고 보자.”
“잠깐! 잠깐!”
마침내 여운진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사비강이 희미하게 웃었다.
“후후. 이제야 말할 마음이 생긴 거냐?”
여운진은 사비강을 매섭게 쏘아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남아 있는 마지막 한 줌의 공력까지 모두 쏟아낸 그가 갑자기 주유천 앞으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방호대 조장이 황급히 주유천 앞을 막아서며 칼을 뽑아 들었다.
“무슨 짓이냐!”
하지만 여운진은 그 앞에 다다르기 직전, 털썩 무릎을 꿇더니 바닥에 머리를 쿵 찧었다.
이마가 깨지면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졸지에 일어난 일에 생도들은 물론 교관들과 주유천도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여운진이 다시 한 번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쾅!
“이, 이게 무슨 짓….”
주유천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는데.
“학장님, 요, 용서해 주싯시오! 하, 하지만 저느 큭, 정으를 위해서 이, 이번 일을… 쿨럭! 꾸몄씃니다!”
여운진이 힘겹게 말을 쏟아냈다.
더 이상 목을 긁어대며 탁한 목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이가 빠져서 그런지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주유천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의? 꾸며? 무슨 소린가? 대체 네놈은 누군가?”
마침내 여운진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복면을 벗었다.
순간 모여든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여 술렁거렸다.
“뭐, 뭐야? 저 사람 교관이잖아!”
“아! 맞다! 여운진 교관! 일년생 권법 교관이잖아!”
“헉! 우리 담임 교관이야!”
“맙소사, 우리 담임 교관이 왜 저러고 있는 거야?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교관 침소를 습격한 자가 또 다른 교관일 줄을.
하나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일수록 방관자의 입장에서는 재미있을 뿐이다.
생도들은 이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적어도 그들이 입관한 이래 최대의 사건인 것만은 분명했다.
반면 천세명을 비롯한 일당들은 그야말로 똥이라도 씹은 표정.
다만, 저렇게까지 하는 여운진에게 어떤 생각이 있겠거니, 하고 약소한 기대를 걸 뿐이었다.
주유천이 놀란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그, 그대는….”
“예, 접니다. 크윽, 여운진입니다.”
“어째서 그대가….”
주유천이 말을 잇지 못하는 가운데, 생도들의 술렁임 때문에 장내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참다못한 등부형이 목청을 높였다.
“이놈들아! 어서 숙소로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무슨 좋은 구경이 났다고 여기서 떠들고 있어!”
하지만 사비강이 제지하고 나섰다.
“아뇨. 여기 생도들 모두가 목격자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이대로 돌아가면 오히려 뜬소문만 돌아다닐 겁니다. 그러니 끝까지 지켜보게 해주십시오. 오히려 견학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끄음.”
등부형이 이를 부득 갈고는 사비강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여운진은 내심 비소를 지었다.
‘훗, 멍청한 놈. 제 무덤을 파는구나!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네놈을 아예 매장시키기 위함이다! 오히려 잘 됐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네놈의 정체를 까발려 주마!’
한편 생도들의 술렁임이 잦아들자, 주유천은 냉랭한 시선으로 여운진을 향해 질문했다.
“어떻게 된 일이오? 여 교관. 정말로 당신이 암습을 시도한 거요?”
“그, 그럿습니다. 제가 저지릉 일…잇니다.”
“어째서 그런 짓을!”
“쿨럭! 학장님. 지근부터 제, 제가 드리는 말쓰믈 자, 잘 드러 주십시오! 점말 중요한 일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란들이 똑똑히 아라 두어야 할 사항입니다!”
비록 발음은 부정확했지만, 여운진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비장했다.
천세명 등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공론화하기로 작정을 했구나. 이렇게 된 이상 그것도 나쁘지 않지.’
한편 주유천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도대체 무엇인데 그러오?”
“학장님, 사비강 저자는!”
여운진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사비강을 꼿꼿하게 가리켰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말을 이었다.
“마공을 익힌 자입니다!”
“뭣이?”
주유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뿐만 아니라 장내에 모여 있던 모두가 술렁거리며 동요했다.
“사 교관이 마공을 익혔다고?”
“어, 어쩐지 사 교관 예전보다 많이 강해지지 않았나?”
“맙소사. 정도맹의 용천관에서 마인이 교관을 하고 있었다는 거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저 말이 진짜야?”
여운진은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내심 웃었다.
‘크크크. 사비강! 네놈의 마공이 내 생각보다 강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네놈은 이제 끝장이다! 정의는 언제나 승리하는 법이지! 크크크!’
주유천이 마음을 가다듬고는 사비강을 똑바로 응시했다.
“사 교관. 여 교관의 말이 사실이오? 정말 마공을 익혔소?”
“제가 마공을 익혔다니요? 절대 그런 적이 없습니다.”
사비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러자 여운진이 얼른 나서며 소리쳤다.
“학잔님, 저, 저 노믈 믿지 마십시오! 사실 저능 저 놈 이마에 탱마인주를 찌그려고 했습니다! 쿨럭, 쿨럭! 실제로 위해를 가하기보단 약, 약간의 위협을 주므로서… 노, 놈이 마공을 쓰도록 유도할 생각이엇슨니다. 다만 제 역량이 부조카여 뜨, 뜻대로 되진 않았습니다. 쿨럭, 쿨럭!”
“그럼에도 마공을 익혔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제 두 눈으로 똑똑키 보았기 때문입니다! 놈, 놈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와 싸우면서 사이한 술법을 사용했씀미다! 그, 그건 절대로 정공이 아니었슷니다!”
이제 모두의 시선이 사비강에게 향했다.
사비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 교관님. 왜 거짓말을 하십니까? 저는 정공으로 당당히 싸웠습니다. 정말 억울하다고요.”
“거, 거짓말! 개소리! 헛소리! 어디서 개수잣질이냐! 내, 내가 다 봤따! 네, 네놈이 요상한 숫법으로 내 눈아페서 거진말처럼 사라지는 거슬! 그, 그리고 거믄 기체가 내 앞에서 폭발하는 것도! 불덩이 창이 나라다니는 거까지 모두 봐써! 사악칸 기운이 너를 감싸며 보, 보호하는 것까지!”
“헐. 아무리 절 모함하고 싶어도 그렇지, 그렇게까지 없는 얘기를 장황하게 지어 내시면 어쩝니까? 제가 무슨 귀신도 아니고.”
“저, 저, 저…! 학잔님! 저 놈의 세치 혀에 노나나셔서는 안 됩니다! 쿨럭, 제, 제가 직접 보았슷니다! 미더주십시오! 네 이놈! 네놈도 인정하지 않았더냐? 마곰을 익혔따고!”
“마곰? 아, 마공… 내가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설사 마공을 익혔다고 쳐도 그런 걸 제 입으로 떠드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예 마인으로 당당히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노오옴! 끄, 끝까지 발뺌을 하는구나! 쿨럭, 쿨럭! 쿠웨에엑!”
격하게 기침을 해대던 여운진이 이내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아무래도 여 교관님이 머리를 다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실 줄은 몰랐군요. 괜히 여 교관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은 것이 죄송할 따름입니다.”
사비강이 정말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여운진은 입에 거품까지 물 지경이었다.
실상 몸이 아파서 죽기 보단, 억울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저, 저 놈이 뻔뻔하게도 거, 거짓망을 하는 겁니다! 학잔님, 제발 저를 믿어 주싯시오!”
“흐음.”
주유천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때 천세명이 한 걸음 나섰다.
“진실을 가릴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천세명이 잠시 사비강을 힐끔거리고는 답했다.
“택마인주를 사 교관 이마에 찍어 보는 겁니다.”
다시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여운진이 독기 서린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맞습니다! 이, 이걸! 이 탱마잉주를 찍게 하믄 됩니다! 허라케주싯시오! 저, 저 놈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곰을 썼으니, 이 탱마잉주를 찡는 순간 불근 방점이 나타날 것입니다!”
“닥치시오! 여 교관은 지금 무얼 잘했다고 큰 소리를 치는 거요?”
문득 주유천이 노기 띤 음성으로 나무라자, 여운진의 표정이 흔들렸다.
“학, 학잔님…? 하지만 저 놈은… 분명 마곰을….”
“아무리 그래도 명확한 증거도 없이 암습을 시도하다니. 그것이 정도를 가르치는 교관으로서 할 짓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이 일의 결과가 어찌 되든 반드시 내 그대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니 그리 알고 계시오!”
주유천은 여운진이 내민 택마인주를 힐끔 본 후 곧 사비강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런 상황에서 사비강에게 특별히 적용할 관칙은 없다.
굳이 관칙에 따른다고 하여도 교관인 사비강에게 택마인주를 찍게 할 강제적인 방도 역시 없다.
“내 아무리 학장의 신분이라지만 택마인주를 찍으라는 강요를 쉬이 할 수는 없소. 게다가 지금으로서는 제대로 된 증거가 없지 않소?”
꽉 막힌 태도에 여운진을 비롯한 천세명 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러나 권유는 할 수 있는 법. 어떤가? 자네가 이 택마인주를 찍어 증명해 주지 않겠는가?”
또 다시 사비강을 향하는 시선들.
사비강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학장님. 저는 지금 굉장한 모욕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저지른 잘못이라고는 열심히 무공을 연마하고 성심성의껏 생도들을 지도한 것밖에 없지요. 한데 이제 와서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며 마공을 익혔다는 모함을 듣다니요. 만약 학장님이 제 입장이시라면 기꺼운 마음으로 택마인주를 찍으시겠습니까?”
“물론, 자네 심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네. 허나 그것이 정말 누명이라면… 나는 분을 참으며 택마인주를 찍을 것이네.”
“그렇다면 누군가 학장님을 마인이라고 누명을 씌우고 사냥한다 해도 용서하실 겁니까?”
“용서할 수 없네. 그럼에도 나라면 이 자리에서 택마인주를 찍을 것이네. 그건 진심일세.”
사비강은 주유천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냈다.
“잠시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여운진은 내심 환호성을 내질렀다.
‘녀석이 드디어 궁지로 몰렸구나. 넌 이제 끝이다!’
이 일이 끝난 후 자신의 암습에 대해 책임을 묻겠지만, 놈이 마인이었다는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별 것도 아닌 일이다.
잠시 후, 사비강이 고개를 들었다.
“좋습니다. 택마인주를 찍겠습니다.”
장내가 다시 술렁거렸다.
상황은 더욱 흥미진진해졌다.
주유천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사비강이 거절했다면 일이 정말 복잡해질 뻔했기에.
“단,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사비강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