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귀환 마교관
3화
화륵. 화르륵. 화르륵.
사비강이 동혈 안으로 들어서자 어두컴컴하던 동혈(洞穴) 안쪽에서 횃불들이 저절로 타올랐다.
돌아보니 여전히 협곡 바깥의 모습이 보였다.
밖에서는 그저 암벽으로 보이지만, 들어오면 동혈이 있는 구조.
결계의 효과다.
저벅저벅.
사비강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 정도의 결계는 마계에서 숱하게 겪었다.
그 중에서도 굳이 등급을 따진다면 하급에 속하는 결계.
동혈은 생각보다 깊었다.
그렇게 한참을 들어갔을 때였다.
쑤아앙!
정면에서 어둠을 뚫고 창이 불쑥 날아왔다.
하지만 사비강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쑤욱!
매섭게 날아든 창이 사비강의 복부를 뚫으며 지나쳤다.
환영(幻影).
복부를 뚫고 지나간 창은 온데간데없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마계에서 사용하는 결계는 중원의 기관진식과 거의 흡사하다.
다만 기관진식은 물질적인 공사가 꽤나 중요하지만, 결계는 오로지 마나의 힘으로 유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쒸엥! 쒸에엥!
화르르르륵!
이번에는 느닷없이 불길이 치솟더니 두 개의 창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마찬가지로 사비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환영.
불은 뜨겁지 않았고, 날아드는 창살은 여전히 그의 몸을 뚫고 지나치더니 사라졌다.
만약 눈에 보이는 것들로부터 조금이라도 위협을 느끼게 된다면, 그 순간 실제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걸음을 옮기던 사비강이 우뚝 멈춰 섰다.
공기가 달라졌다.
이제부터는 환영만으로 공격해 오지 않을 터.
사비강은 눈을 감고 심장에 쌓인 마나를 느꼈다.
아직은 중단전이 형성되지 않았기에 마나와 내공이 서로 섞이지 않은 상황.
때문에 모든 공력을 경공에 쏟아 붓고도 마왕으로부터 흡수한 마력이 심장에 오롯이 남아 있었다.
마침내 눈을 뜬 사비강.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실드.”
그 순간 전신에 희미한 기운이 형성되면서 얇은 막을 형성했다.
이윽고 다시 걸음을 뗐다.
찰나,
파지짓! 치짓!
전방에서 전기 파장을 일으키며 구슬 두 개가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환영이 아니다.
실체다.
라이트닝볼트.
사비강은 얼른 보법을 밟으며 라이트닝볼트를 피했다.
하지만 곧이어 불덩이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화르륵! 화륵! 화르륵!
이것 역시 실체다.
환영이라고 생각하고 멀뚱히 서 있다간 타 죽기 십상이다.
최대한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두 개의 불덩이가 그의 몸에 작렬했다.
퍼펑! 화르르륵. 화르륵!
불덩이는 얇은 막을 태우며 소멸했다.
‘쳇, 성가시군.’
그래도 이걸로 어지간한 함정은 극복한 셈이다.
‘이제 마지막 하나만 남은 건가?’
사비강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저벅저벅.
어느 순간 감미로운 선율과 함께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뒤이어 쏟아지는 지독한 졸음.
사비강은 눈을 감기 직전, 단검으로 제 허벅지를 강하게 찔렀다.
“큭!”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찰나, 선율과 향기도 사라졌다.
막다른 길.
“후후후. 드디어 왔군.”
허벅지를 타고 피가 뚝뚝 떨어졌다.
언뜻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중원인이라면 이곳을 발견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마나를 느낄 수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결계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체내의 마나와 상성을 맞춰야 한다.
천운이 따라서 결계 안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마나의 속성을 모르는 중원인이라면, 결계 안에서 목숨을 잃을 확률이 팔 할 이상이다.
막다른 길을 가만히 응시하던 사비강은 심호흡을 하고는 그대로 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벽을 뚫고 지나가자 커다란 공동(空洞)이 나타났다.
사방이 횃불로 밝혀진 공동.
“마나 포인트.”
사비강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계에서 부르던 용어다.
공동 한가운데에 상자가 놓여 있다.
상자를 열어 보자 푸른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이 들어 있었다.
보석 안쪽으로는 빛이 이리저리 떠돌 듯이 움직였다.
마공석이다.
그 중에서도 특상급.
“후후후. 드디어 취하게 됐군. 특상급 마공석!”
사비강의 입매가 치켜 올라갔다.
마공석 옆에는 작은 약병에 붉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힐링 포션.
모두 다섯 개.
“꽤 쏠쏠하군.”
히죽 웃은 사비강이 마공석을 손에 들었다.
치짓. 찌리릿.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돌 안에서 떠도는 빛이 이따금씩 요동을 쳤다.
물론 생물은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다.
“후후후. 잘 먹겠습니다!”
순간 사비강의 손등에 핏대가 굵게 두드러졌다.
파지지짓!
강렬한 기의 파장이 마공석으로부터 일어났다.
곧이어 새하얀 기운과 푸른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사비강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
마왕의 군대는 어느 날 갑자기 중원에 나타났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혈겁이 일어났다.
단 육 개월.
육 개월 만에 모든 중원인의 씨가 말랐다.
죽거나 납치를 당한 중원인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마계는 이 일을 하루아침에 벌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계획하고 준비를 해두었다.
하지만 차원 이동을 함에 있어서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생물과 무생물이 이동하는데 다소간의 시간차가 발생한 것.
동시에 차원 이동을 시도하더라도, 무생물의 이동 속도가 훨씬 빨랐던 것이다.
평균 20년 정도의 차이.
즉 동시에 차원 이동을 하더라도 무생물의 경우 20년 일찍 중원에 나타나는 것이다.
게다가 공기 중에 마나가 존재하지 않는 중원이다.
그런 만큼 마나를 보충할 수 있는 포션이나 마공석, 드래곤하트 등은 그들에게 필수적이었다.
결국 그들은 각종 필수 물건들을 미리 중원 곳곳에 뿌려 두었다. 그리고 결계를 이용해서 그것들을 보호하였다.
즉 중원에서는 적어도 십 년여 전부터 이미 마법 물품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었던 셈이다.
물론 마계가 실험을 하는 기간까지 포함한다면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곳에 존재한 마계 물건들도 있었다.
정도맹에서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결계들을 찾아내기도 했지만, 함정에 빠져 대다수가 죽고 말았다.
마나를 이용하는 결계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나는 상황이 다르지.”
사비강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슬쩍 감돌다가 사라졌다.
“후우우우.”
그가 긴 숨을 토해냈다.
전신에서 뜨거운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이틀이 꼬박 흘렀다.
심장에 쌓인 마나가 격동하면서 혈로를 뚫고 쏟아져 나갔다.
전신 혈맥을 따라 시원하게 일주천한 마나가 하단전으로 내려가며 내공으로 치환됐다.
중단전도 개방됐다.
내공을 단련하며 중단전을 개방하는 건 몹시 힘든 일이지만, 마나를 이용하면 보다 쉽게 뚫린다.
마나 자체가 처음부터 심장에 쌓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나를 담는 그릇이 중단전은 아니다.
심장 그 자체라고 보아야 한다.
사비강이 중단전을 개방한 이유는 마나와 내공을 고루 단련하기 위함이다.
회귀하면서 마왕으로부터 흡수한 마력이 생각보다 도움이 됐다.
“언제나 느끼지만… 마공석을 흡수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야. 후후.”
나공심법(羅功心法).
그가 마계에서 개발하여 익히고 이름 붙인 독문 심법이다.
어떤 대상으로부터 마나를 흡수하는 심법이다.
중원에서 기연을 통해 얻는 영약들과 달리 부작용이 거의 없다는 것도 장점이다.
특상급 마공석이니 이틀 정도 나공심법으로 운기하면 무리 없이 마나를 취할 수 있다.
사비강은 상자 속의 힐링 포션 다섯 개를 품에 갈무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른손을 들어 의식을 집중하자 푸른빛의 구슬이 손바닥 위에 맺혔다.
파지지직! 파지직!
기의 파장이 거칠게 일어났다.
학관에서 생성했던 작은 구슬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고 강렬했다.
다음 순간 사비강이 손을 불쑥 뻗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 맺혀 있던 푸른 구슬이 거침없이 날아가더니 공동의 벽에 부딪쳤다.
꽈광! 꽈과과과앙!
요란한 폭음에 이어 지축이 뒤흔들렸다.
공동 한쪽 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구멍 끝에서 희미하게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출구였다.
“앞으로 하나씩 하나씩 잘 건져 주지. 하하하!”
사비강이 호탕하게 웃으며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
“흐음. 늦는군.”
학장 주유천이 턱수염을 쓸며 눈살을 슬쩍 구겼다.
용호실 앞마당에 마련된 임시 단상.
그곳에 앉은 주유천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곁에는 일년생을 가르치는 정교관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임시 비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주변으로 꽤나 많은 사람들이 구경꾼처럼 몰려 있었다.
대부분은 학관의 생도들이었다.
“오늘 비무가 펼쳐진다고 하지 않았어?”
“일년생에게 창법을 가르치는 부교관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비무라던데.”
“창법 교관이면 별 볼일 없잖아? 요즘 누가 시시한 창법을 익혀? 혹시 사비강이라는 그 교관인가?”
“맞아. 사실 누가 되든 알 바 아니지만, 교관들의 비무 대회를 볼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그런데 왜 안 하는 거야?”
생도들이 떠드는 소리로 앞마당은 시끌벅적했다.
그 중에는 연우경과 곡보옥 무리도 끼어 있었다.
곡보옥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혹시 상대가 누군지 눈치 채고 튀어 버린 거 아냐?”
“그럼 영 재미없는데.”
연우경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이번 비무에 참가할 맹손덕이 서 있었다.
그는 창대를 양손으로 쥐고 몸을 이리저리 꺾었다.
마침 그가 비무대로 오르더니 단상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존경하는 학장님과 교관님. 비무는 언제 시작할 수 있는지요?”
“흐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주유천이 그제야 눈을 뜨고는 대꾸했다.
그러자 곁에 앉은 천세명이 몸을 기울이곤 귓속말을 해왔다.
“학장님, 미시초(未時初 : 13시~14시)에 비무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벌써 미시정(未時正 : 14시~15시)이 다 되어 갑니다. 본관의 규율을 무시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이대로 실격 처리를 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그 곁에 앉은 여운진도 부추겼다.
학장은 가만히 침음을 흘리고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늦어지는 비무 때문에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물론, 이번 비무는 눈요기용 행사가 아닌, 일종의 실기 시험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렇듯 규율이 바로 서지 않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 좋을 것은 없다.
‘어쩔 수 없군.’
주유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침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숨을 죽이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이 자리는 일년생 창법 부교관을 선발하는 중대한 자리였소. 하나, 비무 참가자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실격 처리….”
“잠깐!”
갑자기 우렁찬 고함 소리가 앞마당에 쩌렁쩌렁 울렸다.
주유천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건물 지붕 위에 한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사비강?’
주유천이 눈살을 슬쩍 구기는데, 사비강이 몸을 훌쩍 날리더니 순식간에 비무대 위로 착지했다.
쿵!
주유천의 눈동자가 짐짓 커졌다.
‘방금 그 신법은….’
투박하면서도 무척 괴이한 신법이었다.
사비강을 본 다른 교관들과 생도들 역시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이었다.
“방금 뭐야? 어떻게 저기로 내려온 거야?”
“글쎄. 보고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지금까지 저런 경신법은 본 적도 없다고.”
술렁거리는 생도들을 향해 주유천이 외쳤다.
“다들 조용!”
사람들이 입을 다물자 주유천이 사비강을 향해 물었다.
“자네는 왜 이렇게 늦은 건가?”
“잠시 다녀올 곳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비강이 정중히 사죄했지만, 표정만큼은 별로 뉘우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흐음. 이자가 이렇게 맹랑했던가?’
주유천은 사비강의 낯선 모습에 내심 당황스러웠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단상에 앉은 교관들과 생도들도 사비강의 달라진 모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저 교관 성격이 원래 저랬나?”
“아냐. 엄청 순박했다고.”
한편 맹손덕은 사비강을 보고는 히죽 웃으며 나섰다.
“처음 뵙겠소! 너무 늦어서 혹시나 어디 도망이라도 간 줄 알았소.”
맹손덕이 너털웃음을 보였다.
그의 농에 주변 사람들도 그제야 키들거리며 웃음을 찾았다.
사비강은 맹손덕을 힐끔 보았다.
‘역시 이 녀석이군. 후후.’
기억하고 있었다.
연우경이 파락호들에게 끌려갔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갔을 때, 복면을 쓴 저자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흠씬 두드려 맞고 나는 정신을 잃었지.’
문득 잊고 싶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과거의 자신은 비무대에서 맹손덕을 보자마자 투지를 잃었다.
그의 섬뜩한 웃음과 목소리에서 바로 그 복면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해서, 싸우기도 전에 항복을 선언했다.
그날로 자신은 학관에 머물며 허드렛일을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바뀔 거다.’
사비강이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주유천을 보았다.
“저겁니까?”
“음?”
“제 비무 상대가 저기 서 있는 쓰레기 맞습니까?”
사비강은 왠지 신이 난 표정으로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