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귀환 마교관
1화
정도맹 산하의 용천관(龍泉館).
정도맹에 속한 문파와 가문의 후기지수들을 양성하는, 한때는 명망이 높았던 학관이다.
그리고 용천관 소속 의생들을 가르치거나 환자들을 돌보는 곳.
부신각(復新閣).
그곳 침상에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사비강이 순간 눈을 번쩍 떴다.
“크헉! 헉! 허억! 허억!”
그의 몸이 바닥에 떨어진 장어처럼 요란하게 퍼덕거렸다.
한참이나 경련을 일으키던 그가 이내 잠잠해지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턱 끝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헉, 헉, 헉.”
한동안 심호흡을 하던 그가 자신의 상체를 더듬어 보았다.
여기저기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양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낯선, 아니 낯익은 풍경.
마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문설주와 창호가 시야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곳.
그래서인지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은 낯설면서도 어딘지 낯이 익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살아…있다. 그리고….’
돌아왔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중원으로 돌아온 것만은 분명하다.
몸이 다시 떨렸다.
참을 수 없는 희열이 차올랐다.
“결국은… 해냈다! 쿠쿡. 후후후. 크하하하하!”
사비강이 고개를 꺾어 들고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한으로 찌든 세월이 그의 웃음에 녹아서 허공으로 흩어져 갔다.
그렇게 얼마나 미친 듯 웃어댔을까?
문득 기척을 느낀 사비강이 옆을 돌아보다가 펄쩍 뛰어올랐다.
“헉! 누, 누구냐!”
바로 옆에서 한 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회귀한 직후여서 경황이 없었다.
주변을 살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낯설면서도 낯익은 이 풍경이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한데 바로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사비강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오늘 같은 경우를 대비해서 마계에 있을 때, 중요한 기억들을 마법으로 꼼꼼하게 메모라이즈 해두었다.
덕분에 그는 노인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부신각주…?”
“각주…?”
“…님?”
부신각주 진백(眞伯)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파락호들한테 혼이 나갈 정도로 두드려 맞았다더니, 미쳐 버린 줄 알았네.”
그럴 만도 했다.
눈을 뜨자마자 뱀장어처럼 파닥거리더니, 이젠 느닷없이 앙천광소라니.
진백으로서는 사비강이 주화입마에 걸린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사비강은 다시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멍든 몸.
성한 곳이 없었다.
분명한 것은 마계에서 당한 상처가 아니라는 점.
‘마왕의 칼이 내 심장을 뚫었으니, 이 상처는…’
진백이 혀를 끌끌 차며 물었다.
“기억도 안 나는 겐가?”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파락호들에게 두드려 맞았다고?
그러고 보니….
기억났다. 그래, 그런 적이 있었지.
생도 한 명이 아랫마을 파락호에게 끌려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생도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가 오히려 복면 쓴 자들에게 의식을 잃을 정도로 실컷 두드려 맞았다.
물론 그곳에 생도는 없었다.
자신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생도들의 질 나쁜 장난이었다.
지금이 그때라면….
‘놈들이 나타나기 십 년 전인가?’
가만히 사비강의 눈치를 살피던 진백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까지 그렇게 생도들에게 시달릴 텐가? 마음을 강하게 가져야지. 요즘 애들은 무서울 게 없어. 문파와 가문을 등에 업고….”
말을 이어가던 진백이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대신 벌떡 일어선 사비강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무인치고는 다소 마른 몸.
때문에 사비강은 적당한 키였음에도 어딘지 왜소해보였다.
그런데 사비강의 얼굴이 평소와 달랐다.
늘 죽어 가는 짐승처럼 힘없어 보이던 표정과 달리 지금은 매서운 눈빛으로 주변을 훑고 있었다.
생소한 모습에 진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자네…, 괜찮은가?”
“동경 있습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한 사비강.
전에는 감히 윗사람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도 못할 만큼 배짱이 없던 그였다.
한데 대답 대신 질문을 던져?
진백은 얼떨결에 동경을 찾아 건네주면서도 영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만 같았다.
“여기 있네만…. 자네 정말 괜찮은가?”
사비강은 동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폈다.
젊어졌다.
다소 수척한 모습과 어딘지 유약해 보이는 표정.
‘형편없네. 내가 이렇게 생겼었나? 더 이상은 못 봐주겠네.’
사비강이 동경을 돌려주었다.
“괜찮습니다. 각주님께 신세졌습니다.”
“그, 그래. 아, 관주님께는 내가 이틀 정도 요양해야 할 것이라 말해 두었네.”
“뭐, 고맙습니다.”
사비강이 무뚝뚝하게 대꾸하고는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틀이라. 우선 생각을 좀 정리해야겠군.’
한편 뭔가 달라진 사비강의 뒷모습을 보며 진백이 혀를 끌끌 찼다.
‘아무래도 정신적 충격이 큰 모양이군.’
**
오랜만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사비강은 냉랭한 눈으로 내부를 훑어보았다.
표정은 딱딱했지만, 실제 그는 마음 깊이 동요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때론 즐거워하고, 때론 고민하고, 때론 슬퍼하며 지냈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면 참으로….
“찌질했어. 멍청하고, 형편없었지.”
사비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금 생각하면 과거의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늘 타인의 눈치를 보며 기가 죽은 채로 살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과거를 책망만 할 수는 없다.
이제는 현재를 살아야 한다.
‘모든 것은 지금부터다.’
사비강의 눈빛이 유독 날카로워졌다.
앞으로 십 년.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한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할 시간이다.
하지만 중원을 침공해 올 마왕의 군대와 맞서 싸우기 위해 준비할 시간으로는 빠듯하다.
‘그래도 반드시… 놈을 죽인다. 그때까지 불패의 군단을 만들어 주마. 이래봬도 빚은 무조건 갚는 성격이거든!’
사비강은 가슴께를 손으로 매만졌다.
회귀하기 직전, 마왕의 칼에 찔린 심장이 아직도 아릿하게 저며 오는 것 같았다.
사비강이 의자에 막 앉았을 때였다.
“저어, 교관님 안에 계세요?”
사비강이 문을 바라보았다.
“누구냐?”
“일년생 목화반의 연우경(延祐瓊)입니다.”
연우경?
잠시 눈살을 찌푸렸던 사비강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저 아이가 파락호들에게 끌려갔다고 해서 뛰어갔었다.
“들어와라.”
연우경이 쭈뼛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간 그는 사비강을 보고는 흠칫거렸다.
의자에 앉은 채로 발을 탁자에 올려둔 사비강.
평소 사비강은 누구 앞에서도 저렇게 거만한 자세를 보인 적이 없었다.
설사 생도 앞이라고 하더라도.
연우경이 멍하니 서 있자, 사비강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용건은?”
“아, 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뭐가?”
“저 때문에 많이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러지?”
“네?”
“누가 그러냐고 물었잖아. 내가 너 때문에 다쳤다고.”
“다, 다른 생도들이….”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너 때문 아니니까 신경 쓸 것 없다.”
“하지만 저를 구하려다가….”
“너는 거기에 없었잖아. 내게 죄송할 사람은 네가 그들에게 끌려갔다고 거짓말한 생도 놈들이지. 그게 아니면 따로 죄송할 짓이라도 했다는 거냐?”
“네? 아, 아뇨….”
“그럼, 용무 끝났나?”
“네?”
“더 이상 용무가 없으면 그만 가라.”
“아… 네.”
연우경이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몸을 돌렸다.
마침 문을 나서던 그가 사비강을 돌아보았다.
“참, 용담실(龍談室)에서 학장님 주재로 회의가 열렸다고 들었어요. 아마 그 생도들에게 징계가 내려질 거예요.”
“징계? 징계라. 후후후. 웃기는 소리.”
사비강은 차디찬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곳이 어떤 상태인지 잘 알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지속된 평화에 찌들어 썩을 대로 썩어 버린 곳.
사실 교관들은 후기지수들을 함부로 건드리지도 못한다.
후기지수 뒤에 버티고 있는 문파와 명문가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쁠 터.
그럼에도 과거의 자신은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생도들에게 합당한 징계가 내려지고, 다시는 자신을 괴롭히는 생도가 나오지 않기를.
얼마나 멍청했던가?
“후후후.”
“저어… 교관님?”
웃음을 거두고 돌아보니 연우경이 아직까지 멈춰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 꺼지라고 하지 않았냐? 긴 여행을 한 직후여서 피곤하다.”
“여행이요?”
연우경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사비강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연우경이 방을 나간 후 사비강은 한참이나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에 빠졌다.
잠시 후 그가 손을 불쑥 뻗고는 의식을 집중하자 손바닥에 푸른빛의 기운이 구슬처럼 맺혔다.
치짓. 치지짓.
옥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구슬.
누군가 보았다면 이 기이한 광경에 넋을 놓았으리라.
하지만 사비강은 대수롭지 않은 듯 구슬을 소멸시켜 버리고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쳇, 겨우 2서클 정도잖아? 역시 그게 필요해.”
이나마도 가능한 것은 마계에서 살해당하던 순간, 마왕의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을 어느 정도 떠안으면서 회귀했기 때문이리라.
사비강은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고 다시 생각에 빠졌다.
마계로 납치당한 후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음모와 배신, 암계가 소용돌이치는 곳에서 마계대공의 자리까지 올랐다.
이후 마왕의 견제가 시작되었다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만했다.
대비가 충분하지 못했다.
분신과 다름없던 수하들은 자신을 지키려다가 마왕의 손에 떼죽음을 당했다.
만약 ‘회귀’라는 최후의 보루마저 준비해 두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이렇듯 두 번째 생은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확실한 복수와 대비를 위해 몸을 제대로 만들어야겠지. 그러려면 역시 그것이 있어야 한다. 뭐 일단 가까운 곳에 있는 것부터 하나씩 취하면 될 터.’
마침내 그가 눈을 스르르 감았다.
정말로 긴 여행이었다.
조금은 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