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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232화 (완결) (232/232)

232화

[……(중략)……이것이 십 년 전, 사자궁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날, 호원이 세상에서 사라지며 엄청난 변화가 강호에 찾아왔다.

첫 번째는 당연히 구왕에 이어 호원까지 죽인 군림단주에 대한 명성이다.

천하제일고수 군림단주.

강호사를 통틀어 몇 안 되는, 이름이 아닌 신분에 천하제일이란 수식어가 붙은 것이다.

두 번째는 군림단주가 이끄는 군림단을 대하는 강호인들의 반응이다.

먼저 구대문파는 이 대 군림단주가 죽을 때까지 사천성 내에서는 그 어떤 싸움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철혈문주의 복수를 자신들 대신 군림단주가 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이라고 하던가?

구대문파의 선언에 이어 귀암로 여섯 축이었던 네 곳과 혈록, 어부하, 그리고 사혈명 사패천에 속했던 중소 문파들 역시 앞다퉈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세 번째는 강호 곳곳에서 작고 큰 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대개 강호삼대세력에 빌붙어 살아온 중소 문파들의 무인들이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몰락하는 일들이었다.

하루아침에 끈 떨어진 연이 된 그들은 이전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암암리 세력을 만들어 갔지만,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모으기만 한다고 하던가?

……(중략)…….

자, 강호 정세는 여기까지 하고.

나는 투신을 섬기는 사람이다.

또한, 군림단주를 흠모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호원이 죽고 난 뒤 나는 호씨세가를 면밀히 조사해 봤다.

왜 호원의 심경이 갑자기 바뀌었는가?

이 의문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호씨세가의 몇몇 자손들에게 전해지는 천형(天刑)이 있음을 알게 됐다.

대대로 사자궁주는 양자를 들이지만, 그 대상은 호씨세가에 한정되기에 천형도 이어지는 것이다.

매병(呆病:치매).

뛰어난 머리를 갖고 태어나지만 결국은 평생 이룬 모든 것을 스스로 망치게 하는 병을 함께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여기까지 알아낸 나는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호씨세가의 머리와 군림단주의 의지가 한 몸에 담긴다면?

한 번 더 적지만, 나는 투신을 섬기는 사람이다.

이 마음가짐은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가져갈 것이다.

그러나 이놈의 반골 기질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십 년 전, 군림단주가 사자궁을 무너뜨렸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선 사람이 투신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몹시 컸다.

아! 이 글이 후대에 전해질 테니 간단히 설명은 하고 넘어가야겠다.

나는 투신만큼은 아니지만 군림단주를 존경한다.

다만, 언제고 십 년 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군림단주가 아니라 투신이 만인 앞에 서길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십 년 동안 나의 바람이 실재할 수 있도록 많은 정보를 수집해 왔다.

이제 계획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그 시작은, 호씨세가에 대한 강호의 비난을 옅게 만드는 것부터……(후략)…….

―초대 삼정일사회주.]

***

탁. 타닥.

똑바로 서면 겨우 말의 허벅지에나 닿을 수 있는 키로 열심히 숲을 누비던 소년은 개울 앞에 멈춰 서며 양손으로 물을 들이켰다.

“맛있다아!”

다섯 살은 물 한 모금에도 감동할 나이였다.

소년은 크게 소리친 뒤 신이 나서 주먹까지 불끈 쥐며 허공을 마구 때려 댔다.

그러다 햇볕이 반사되는 수면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헙! 예뻐다아!”

조막만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소년은 제자리를 뱅뱅 돌았다.

몇 바퀴까지는 괜찮다가 이내 중심이 무너지며 발을 헛디뎠다.

기우뚱.

“어어…….”

턱.

“빈아, 다쳐.”

언제 다가왔는지 오십 대 중년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소년을 받아 들었다.

“예쁜 할미다, 우아!”

소년은 할미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 중년 여인의 목을 힘껏 껴안았다.

이곳까지 도망친 것과 달리 격하게 애교를 부렸다.

“어이구, 우리 강아지.”

중년 여인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으로 소년의 등을 보듬어 주었다.

“아냐, 아냐. 빈아는 강아지 아냐.”

안겨 있던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년 여인의 품에서 내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럼 뭐야?”

“빈아는 사내대장부야! 아빠가 이거 갖고 있으면 사내대장부랬어. 봐 봐!”

소년은 중년 여인이 말릴 새도 없이 바지를 훌러덩 내리며 배를 내밀었다.

“아빠가 그랬어? 할미 속상하네. 우리 강아지가 벌써 사내대장부 됐네?”

중년 여인은 아랫입술을 내밀며 곧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아, 할미 슬퍼?”

“응, 슬퍼.”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아!”

소년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을 하다 갑자기 손뼉을 치며 눈을 크게 떴다.

“음?”

“할미하고 빈아하고 둘이 있을 때는 강아지 하고, 아빠 있을 때는 강아지 안 하고. 그럼 되지이.”

소년은 큰 눈을 끔뻑이며 자신 있게 중년 여인을 쳐다봤다.

“역시 우리 강아지야. 머리도 좋아. 웅웅웅.”

중년 여인은 소년의 볼을 엄지와 검지로 누르며 행복해 했다.

“히…….”

씰룩씰룩.

소년은 웃으며 연신 엉덩이를 흔들었다.

‘천하제일고수 군림단주를 아빠로, 은영루의 주인을 엄마로 둔 우리 강아지.’

용빈은 엄마인 인이예에게서 얼굴형과 입술을, 아빠인 용연의 이마와 코를 쏙 빼닮았다.

이 상태로 큰다면 지금 들어오는 매파는 새 발의 피가 될 것이다.

그때, 개울 위쪽에서 인이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빈!

“힉!”

용빈은 인이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재빨리 추영영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추영영은 얼른 돌아서며 용빈을 등 뒤에 감춰 주었다.

찡긋.

모습을 드러낸 인이예를 보고 추영영이 모른 척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부님, 빈이는 어디에 두고 혼자 계세요?”

“나도 찾고 있는 중이야. 우리 강아지가 한 번 숨으면 찾기가 힘들잖니?”

“아이 참, 사부님께서 자꾸 강아지라고 해 주시니까 빈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알고 말을 안 듣잖아요.”

“어린애 맞잖아?”

“다섯 살이에요, 다섯 살.”

“그래, 다섯 살.”

“흠, 안 되겠어요. 내일부터 빈이는 바깥출입 금지예요.”

“그럴래? 그럼 할 수 없지.”

“예? 뭘 하시려고요?”

꿈틀.

인이예는 추영영이 자신을 편들어 주지 않자,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봤다.

“우리 강아지 뛰어놀 곳으로 데려가야지.”

추영영은 인이예의 시선을 외면하며 손을 뒤로 해 용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부님, 빈이가 제 아들인 건 아시죠?”

“내 손자기도 하지.”

“아! 미리 말씀을 못 드렸네? 어쩐다?”

추영영이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쳐다보자 인이예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난처해했다.

‘뭐지? 왜 안 하던 예쁜 짓…… 아!’

평소라면 벌써 덤벼들고도 남았을 인이예가 손으로 입을 가리기까지 한다는 것은, 그 모습을 봐 줄 누군가가 근처에 있다는 뜻이다.

“예 매, 빈이가 안 보이는데?”

인이예의 뒤에서 용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다아!”

용빈이 추영영의 뒤에서 나오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어머, 우리 빈이 여기 있었네? 연 랑, 사부님이 빈이를 데리고 계셨어요.”

인이예는 용연을 부르고는 재빨리 내려와 용빈과 눈높이를 맞춘 뒤 안았다.

“이예야, 그 말만 들으면 내가 빈이를 납치한 것 같잖아?”

딱.

추영영은 용빈의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며 인이예의 정수리를 때렸다.

“아!”

인이예는 깜짝 놀라 추영영을 쳐다봤다.

“미안. 나도 나이를 먹나 보다. 생각이 숨겨지질 않네? 호호호.”

“사부님, 일부러 그러셨죠?”

“실수였어. 미안하다고 했잖니.”

“빈아, 있잖아? 할머니가…….”

인이예가 용빈에게 추영영의 행동을 고자질하려 할 때, 용연이 세 사람 앞에 내려섰다.

“태루주님, 매번 와 주셔서 감사해요.”

용연은 추영영에게 목례로 인사를 건넸다.

“내가 좋아서 오는 거니 감사는 됐고. 이예에게 들으니 단주가 십 년째 이맘때면 같은 곳을 간다던데, 특별한 곳이라면 이예와 빈이도 데려가지 그러나?”

추영영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숨기지 못하는 성격대로 용연을 보자마자 바로 말을 꺼냈다.

“그럴까요? 빈이도 다섯 살이 됐으니 이젠 데려가도 될 것 같기는 하네요.”

용연은 추영영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당황하거나 말을 꾸며 내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연 랑, 빈이가 다섯 살이 되는 것과 관계있는 곳이었어요?”

인이예가 의아한 표정으로 용연을 쳐다봤다.

중요한 일이라면 용연이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을 리 없기 때문이다.

용연은 대답 없이 용빈을 번쩍 들어 품에 안고 인이예와 추영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 가족사, 어릴 때 익힌 무공 원리, 군림단까지 모두 이어져 있거든요. 십 년 동안 만나고 온 사람은 오색창 백달이에요. 그와…….”

“자, 잠깐! 단주, 지금 누구라고 했나?”

추영영은 용연이 꺼낸 이름을 듣고 깜짝 놀라 말을 끊었다.

“오색창 백달이라고 했습니다.”

“……왜? 아니, 그 이름이 왜 단주 입에서 나오는 거지? 왜?”

“사부님, 왜 그렇게 놀라세요?”

인이예는 처음 보는 추영영의 반응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세력을 빼고 일대일 대결로는 꺾을 자가 없다는 고수다.”

“예? 저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네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이미 은거했으니까. 아! 단주는 어떻게 그를 알고 찾아간 거지?”

추영영은 인이예에게 설명을 해 주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다시 용연을 쳐다봤다.

“할아버지께서 진 빚을 갚아 주러 갔다가 백 대협을 보고 엉뚱한 내기를 걸게 됐지요.”

“빚이라니요?”

“할아버지께서 백 대협의 창에 찔려 오랫동안 고생을 하셨거든.”

“아…… 몰랐어요, 연 랑.”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용연은 인이예의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고는 말을 이었다.

“백 대협과 대화를 나누게 됐고, 내가 알고 있던 내용과 다른 부분들을 듣게 됐어요. 할아버지는 전대 임주의 복수를 하려 했지만, 백 대협은 할아버지의 의리와 처음 겪어 보는 무공이 마음에 들어서 죽일 생각 자체가 없었다는 것을.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복수 따위는 잊게 되더군요. 대신, 다른 욕심이 들었지요. 백 대협의 제자와 내 아들 빈이를 대결시켜 보자는.”

피식.

용연은 용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러자 용빈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용연의 귀에다 입을 댔다.

―아빠, 빈이가 이길 거야.

용빈은 조막만 한 손을 야무지게 쥐어 보였다.

“안 그래도 내년에는 같이 가자고 하려 했어요.”

용연은 추영영을 보며 활짝 웃었다.

‘현 강호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강호삼대세력은 이미 잊혀졌고, 사람이든 세력이든 언제나 군림단주 아래를 자처하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천하제일고수인 단주는 그런 허례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구나. 큰 사람이야. 많은 싸움과 그에 따른 희생들이 생겨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호는 들떠 있다. 이전의 죽어 있던 강호를 단주가 살아나게 만든 거야.’

추영영은 평범한 가장처럼 행동하는 용연을 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세상을 바꾼 사람이 제자의 남편이라니.

흐뭇함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그때, 용빈이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끼꾸다아!”

모두 하늘을 올려다봤다.

매 한 마리가 네 남녀의 머리 위를 빙 돌고 있었다.

[군림단주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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