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하남성 학벽(鶴壁) 아래쪽 부구산(浮丘山).
산세가 험하거나 기암절벽뿐인 곳은 아니지만 농사를 짓기 힘든 돌길이 많아 인적이 드물었다.
사람 손이 많이 닿지 않아선지 경관은 빼어났고 사방이 고요했다.
사혈명 영역의 끝자락에 위치한 곳이라 용연이 많은 거리를 이동해야 했으나, 막상 와서 보니 무척 마음에 드는 장소였다.
용연은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다 일단의 무리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바위에 앉았다.
―투신, 사황 경오의 무공은 구왕 못지않습니다. 파괴력만 따진다면 파천구령보다 오히려 위라고 합니다. 한음혈우공은 빙공 계열의…….
이곳으로 오기 전에 만났던 묵 노야의 긴장 가득한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안위를 가장 크게 걱정하는 것이다.
구왕이란 산을 넘은 뒤라서 그럴까?
사황 경오의 무공이 아무리 강해도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어차피 호원의 의도대로 살아온 사람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군림단을 조종하지 않는다.’
군림단원 모두가 묵 노야처럼 혼자 힘으로 집단을 성장시킬 수는 없겠지만, 방향은 달리할 수 있다.
타성에 젖어서 정해 주는 임무만 완수하려 하지 않고, 자리 잡은 지역에서 군림단원이 아닌 다른 신분으로 살아간다면?
그렇게 본인들만의 것을 갖게 해 주고 싶었다.
힐끗.
‘왔군.’
생각을 이어 가려 할 때, 몇몇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
열두 명.
사황 경오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노인이 가운데서 뒷짐을 진 채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척.
“기다려라.”
경오는 손을 들어 사패주와 칠사를 멈추게 한 뒤 걸음을 옮겼다.
용연 역시 움직여 사황과 이 장여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혼자 있을 줄 몰랐네. 역시 강호신성다운 배포라고 해야겠군. 사패주와 칠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불편하면 물리도록 하지.”
경오는 미안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먼저 말을 꺼냈다. 물론 미안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용연의 표정과 걸음걸이에서는 긴장이 전혀 느껴지지 않기에 목소리도 그런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단둘이 보자고 청하지 않았으니 몇을 데려왔든 상관하지 않소. 뵙자고 청한 군림단주 용연이오.”
용연은 먼저 자신을 소개하며 포권을 취했다.
예의를 갖추면서 긴장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에 경오의 눈빛이 달라졌다.
용연이 단순히 젊기만 한 것이 아님을 안 까닭이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음 뒤로 산 그림자가 흔들렸다. 좀 더 정확히는, 자신의 기운을 받아 내며 다가왔기에 공간의 왜곡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능력을 가졌음에도 오만함이 아닌 당당함으로 예의까지 갖추었다.
“사황일세.”
경오는 인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용연을 향해 마주 포권을 취해 보였다.
‘사황께서 포권을?’
경오의 뒤에 서 있던 열한 명의 표정에 놀람이 떠올랐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동패주 살엽 장앙이 혼잣말을 꺼냈다.
“군림단주의 경지가 이미 혈주님과 대등하게 설 수 있다는 뜻이겠지.”
파륵도 혼잣말을 꺼냈다.
둘의 혼잣말을 끝으로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청허루를 통해 파 패주에게 연락했다고?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들자마자 바로 말이야.”
경오는 용연의 표정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사실 반신반의했소. 철혈사자맹과 귀암로가 무너졌는데 아직은 멀쩡한 사혈명에서 내 말에 귀를 열어 줄까. 하고 말이오.”
용연은 ‘아직은’이란 말에 힘을 주었다.
곧 무너진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을 텐데 경오는 듣고만 있을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놈도 호원과 같은 말을 하는군.’
경오는 속으로 기차 찼다.
용연에게 만나자고 연락하란 명령을 내린 뒤, 호원이 서찰을 보냈다.
[……(중략)……그렇게 구왕의 죽음이 내 손을 떠났지요. 실수였습니다. 내가 자리를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더 급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지요. 부하들을 시켜 몇 군데만 조사해 보면 아시겠지만, 군림단주는 지금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어요. 아직은 사혈명이 건재하지만 언제 사람들이 등을 돌릴지 모릅니다. 사황, 사패주만 남기고 해체한다고 공표하면……(후략)…….
―사자궁주 호원.]
구왕의 죽음에 호원은 본인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변명과 자신이 공표한 내용에 부합되도록 사혈명의 규모를 축소해 달라는 부탁이 전부였다.
호원도, 눈앞의 용연도 ‘아직은’ 사혈명이 건재하다고 한다.
툴썩.
경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아직은 건재한 내게 군림단주가 무슨 제안을 할지 들어 볼까?”
“호원이 뭘 하려는지 아시오?”
“음?”
“묵자성 맹주를 죽여서 구대문파를 아홉 개로 나눠 놓고, 구왕을 끌어들여 귀암로 여섯 축을 분리시켰소. 다음은 당연히.”
용연이 말을 끊으며 경오를 쳐다봤다.
“나를 죽여 사패천을 흩어지도록 만든다?”
“그래야 호원이 원하는 짓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호원이 원하는 짓?”
“천상천하 유아독존.”
“…….”
경오는 웃으려고 입가를 일그러뜨렸다가 용연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참았다.
용연의 말이 황당해서가 아니라 이미 현 강호에서 그런 존재에 가장 가까운 자가 호원이기 때문이다.
“암중인으로 누군가의 한 걸음 뒤가 아니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던 모양이오.”
“하!”
“호원이 혈주와 내가 만나는 것을 모를 리 없소.”
“안다고?”
경오는 서서히 용연의 말에 호응을 보였다.
호원에 대한 분석을 저 정도까지 했다면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될 방법을 제안할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
사자궁에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됐다.
구대문파 무인들이 빠르게 철수하면서 빈 전각과 숙소들이 생겨났고, 그곳들을 오대세가의 무인들로 채우게 됐기 때문이다.
이전의 사자궁이 철혈문 안쪽에 숨어 있는 구조처럼 보인 이유는 철혈문과 연결된 중문과 담들 때문이었다.
그것들을 없애고 길가에 나무를 옮겨 심자 철혈문의 건물들이 마치 사자궁을 호위하듯 두른 것처럼 보였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빛을 봐야 살 수 있지.”
호원은 사자대전 앞에 나와 며칠 만에 만들어진 화원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궁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남궁세가주, 모용세가주, 제갈세가주를 전주로 내정했고, 휘하의 각주들은 알아서 세 명씩 정하라고 알렸습니다.”
호찬진이 보고할 기회를 찾다 입을 열었다.
“좋다, 좋구나. 그래, 그쪽 담도 없애고 나무도 좀 더 심거라.”
호원은 호찬진의 보고가 좋다는 건지 화원이 좋다는 건지 모를 말을 하고는 손짓으로 일꾼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렸다.
“지금쯤이면 군림단주와 사황 경오가 만났을 것입니다.”
호찬진이 다시 말을 건넸다.
“둘 중 하나가 죽어 주면 좋겠다만, 거리를 보니 좀 더 손해 본 쪽이 군림단주더구나. 똑똑한 자야.”
“더 멀리 갔다는 것은 군림단주가 좀 더 급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궁주님?”
“찬진아, 사황은 몇 십 년 동안 뭔가를 직접 해 본 적이 없다. 한 번, 두 번 시키는 것이 반복되고 십 년, 이십 년 세월을 그렇게 흘려보냈던 거지. 그러다 어느 한 순간 자신의 결정이 옳은지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렇게 되도록 내가 만들었지.”
쿡.
호원이 갑자기 웃음을 토했다.
그런 호원을 호찬진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볼 때, 호원의 입이 다시 열렸다.
“경가 놈의 뇌는 두부거든.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두들겨 주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지.”
“아…….”
호찬진은 이어진 호원의 혼잣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벌린 채 눈치를 봤다.
“나만이 할 수 일이다, 찬진아.”
“물론입니다.”
호찬진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다행이 자신이 혼잣말에 반응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
“아버지, 묵자성 맹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궁금했던 건데, 궁주님 혼자서 구궁위까지 처리하신 건가요?”
남궁명은 아버지 남궁창이 무너져 가는 철혈각을 보며 웃고 있을 때 다가가 물었다.
“음?”
“구궁위의 무공이 오성위보다 월등히 강하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그런 것들이 궁주님 앞에서 무슨 소용이겠느냐?”
남궁창은 쓸데없는 질문을 진지하게 하는 아들을 돌아보며 혀를 찼다.
“당장이라도 사혈명에서 쳐들어오면 뭘 알아야 대처를 할 것 아니에요?”
“그 대처를 네가 왜 해? 전주인 나도 안 하는 걱정을?”
“다음 대 가주가 저라면서요? 그 정도 걱정은 해야지 세가에 대한 도리 아닙니까?”
“허, 그놈 참.”
남궁창은 아들의 갑작스러운 열정에 싫지 않은 듯 혀를 짧게 차고는 다가오라는 손짓과 함께 정보를 주었다.
“그때 철혈전 앞에 구대문파 무인들이 있었다니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있으면 물어봐라.”
“아! 그러면 되겠네요.”
남궁명은 남궁창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 남궁창이 해 준 말 그대로 적어서 남궁산산과 약속한 표식을 담에다 남겼다.
하루 뒤.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맡에 쪽지가 놓여 있었다.
[공동파 주정일 장로로부터……(중략)……열 명이 문을 부수고 들어간 것은 봤으나 나오는 건 못 봤다고 해요. 그 열 명에 관한 정보가 필요해요.]
문체만 봐도 남궁산산이었다.
열 명에 대해 정보는 의외로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남궁명처럼 당시의 싸움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한번 발동하면 반드시 알아내고야 마는 제갈세가의 제갈욱을 만났을 때 듣게 됐다.
“남궁 형, 제가 궁금한 건 못 참거든요. 친구가 공동파 제자인데, 주정일 장로가 하는 말을 들었대요.”
“어떤 말을?”
“궁주님이 만든 미완성 물건, 주정일 장로님이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대요. 그걸로 구궁위를 막은 거죠.”
“그럴듯하구나.”
남궁명이 보기에 제갈욱은 본인의 정보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곧장 남궁산산에게 연락을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
[공동파 주정일 장로로부터 ‘궁주님이 만든 미완성 물건’이란 말을 들었다고 한다. 내가 사자궁에 들어와 있어서 주 장로를 만나긴 힘들 것 같다. 나머지는 네가 해다오.]
서찰에는 남궁산산처럼 남궁명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칫. 일을 두 번 하게 만드네.”
남궁산산은 어디론가 전서구를 보낸 뒤 곧장 공동파로 갔다.
묵성자 중에는 공동파의 제자도 있기 때문이다.
공동산 입구의 한 폐가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고 있던 검은 복면인이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역시나 검은 복면을 쓴 남궁산산에게 건넸다.
“그럼.”
검은 복면인은 눈을 감았다 뜬 후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남궁산산은 바로 서찰을 펼쳤다.
[묵성자가 요구한 정보는, 구대문파 명숙들 사이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소. 한 번 발동되면 멈추지 못하는 미완성 인형. 여기까지 파악한 것으로 아오.]
‘이거다!’
남궁산산은 담영호에게 알릴 전서구가 있는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
[호씨세가로 여전히 많은 약재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호원이 사혈명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아 파 보는 중입니다.
―회주.]
[호원이 묵자성을 죽일 때 데려간 열 명의 무인은, 발동되면 멈추지 못하는 미완성 인형이라고 구대문파 명숙들이 결론을 내렸대요.
―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