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청허루?”
경오는 보고한 희사(嬉邪)를 돌아봤다.
그러자 희사는 자신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파륵을 쳐다봤다.
“……몇 년 전에 군림단과 거래를 하던 곳입니다.”
파륵은 희사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생각을 떠올리는 것처럼 한 호흡 쉬고 입을 열었다.
“거래?”
“군림단의 상황을 파악해 둘 생각으로 받아 주었고 한두 번 연락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파륵의 대답이 모자랐는지 희사가 바로 말을 받았다.
“파 패주가 주시해야 할 정도의 대단한 요구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랬구나. 파 패주,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모른 척 넘어가라고 시켰을 게야.”
경오는 파륵의 시선이 희사를 향하자 손을 흔들어 자신에게로 돌린 뒤, 말을 이었다.
“희사, 얼마나 된 일이더냐?”
“칠, 팔 년 전 일입니다. 사자궁주가 동태병이란 자를 지원해 달라며 연락을 했습니다. 철혈사자맹과 귀암로에서도 나선다고 해서 혈주님께서 파 패주에게 일임하라고 하셨습니다.”
“칠, 팔 년 전?”
희사의 대답을 들은 경오는 튀어나온 눈을 빙그르 굴리며 의아해 했다.
“예. 좀 더 정확한…….”
“아니, 아니.”
경오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희사의 말을 막았다.
대전 안이 순간적으로 고요해졌다.
뽁―.
한쪽 구석에서 종유석 끝에 맺혔던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군림단주. 이십 대로 보인다는 거야, 이십 대라는 거야?”
경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십 대였습니다.”
파륵이 대답을 했다.
“이십 대? 그럼 조금 전에 칠, 팔 년 됐다는 사건이 있은 후에 군림단주가 됐다는 건가?”
경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순간, 파륵도 희사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군림단주 같은 고수가 더 나올 수도 있다는 소리 아닌가?”
경오는 돌출된 눈동자를 다시 한번 빙그르 굴렸다.
이제는 먹이들로 가득하던 강호를 다르게 봐야 했다.
최후 비기는 파천구령까지 사용하고도 죽은 구왕.
자신은 파천구령을 경험한 적 없지만, 선대의 혈주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그 무공의 무서움은 잘 알고 있었다.
[몇 개의 분신을 혈우(血雨)로 부순다고 해도 하나라도 남겨 두면 곤란한 무공이라 파천구령은 기피해야 하는…….]
[현음혈우공만으로는 동수, 한 가지를 더 준비하지 않으면 파천구령과는…….]
아홉 가지의 무공을 개개의 분신이 펼칠 수 있다는 파천구령.
선대들조차 꺼리던 그 무공의 주인을 죽인 자가 이십 대라고 한다.
천재.
그 나이에 구왕을 죽였다면 분명 그렇게 불려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한 명일까?
비슷한 경지는 아니라고 해도 몇 명 더 준비해 놓은 건 아닐까?
‘이럴 때 호원…… 하! 이 중요한 순간에 호원이라니!’
지끈.
경오는 갑자기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머리가 아파 왔다.
사패주와 칠사는 지금 자신이 떠올린 고민을 이해하지 못한다.
호원이기에 자신과 구왕의 바닥까지 파악하며 조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민이란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다.
그동안 사혈명 내의 대소사 외에 다른 결정을 내려 본 적이 있던가?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도 딱히 떠오르는 일이 없었다.
―……허허허, 세 분께서는 아랫사람들만 잘 다루세요. 강호의 자잘한 일 따위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지요. 사자궁주가 그런 일 하라고 만든 자리인 것을…….
호원 이전의 사자궁주가 했던 말이었다.
그가 떠나고 난 뒤, 호원이 사자궁주가 되면서 강호삼대세력의 대회합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고,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모든 연락을 이전의 사자궁주가 만들어 놓은 대로 하기만 하면 됐으니까.
누구를 상대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
자신만의 공간에서 지내며 무공만 익혔지 보고를 듣고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감각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오싹!
‘아! 내가, 사혈명의 혈주인 내가, 그것도 빙공을 극한까지 익힌 내가, 오한을 느꼈다.’
힐끗.
경오는 눈동자만 돌려 수족이나 마찬가지인 사패주 넷과 대전 문을 지키고 있는 여섯 명의 칠사를 쳐다봤다.
모두가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뭔가 결정을 내려 줘야 하는데, 머릿속은 점점 하얘지고 입술은 열리지 않는다.
척.
손가락으로 희사를 불렀다.
“예, 혈주님.”
“다 돌려보내고 혼자 있게 해다오.”
“……존명.”
희사는 경오의 입 가까이 귀를 댔다가 떼어낸 후, 사패주들에게 다가가 밖으로 나갈 것을 권했다.
그러자 사패주들은 어리둥절해져서 태사의를 돌아봤으나, 이미 경오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옆으로 돌린 상태였다.
“나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희사가 다시 한번 사패주들을 종용했다.
꾸웅!
석문이 닫히자 경오의 눈이 떠지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
“혈주님께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요?”
파륵이 석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희사를 멈춰 세운 후 다급하게 물었다.
“……다들 보셨잖습니까? 잠시 기가 흐트러지셨던 것 같습니다.”
희사가 나름 말을 꾸며냈다.
그러자 파륵을 비롯한 사패주들이 낭패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지금 강호가 얼마나 빠르게 요동치고 있는지 사방에서 정보를 모은 사패주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제가 제안 하나를 드려야 할 것 같군요. 군림단주와 사자궁주가 현 강호를 뒤엎을 기세라고는 하지만, 구왕조차 한 수 접어 두는 혈주님이십니다. 정보가 아니라, 이것 아니면 저것, 이렇게 결정을 내리실 수 있도록 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희사는 제안을 하고 나서 마른침을 삼켰다.
거리상으로 지금 나누는 모든 얘기를 경오가 듣고 있다고 봐야 한다.
―다 돌려보내고 혼자 있게 해다오.
자신이 모셔 온 경오는 결단코 다른 사람에게 ‘해다오’란 부탁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아주 간단한 실수라도 떠올리면 반드시 그 일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죽였다.
지금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잘 처신했다는 기억으로 되돌려야 하는 것이다.
부릅.
희사는 파륵을 향해 눈을 크게 뜬 뒤 길 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제야 파륵은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하고 나직이 숨을 내쉰 뒤, 다른 세 패주들에게 입을 열었다.
“회의 시작부터 나 때문에 세 패주들만 곤란하게 만든 것 같소. 동패에서 마련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고 정보를 모아서 희사의 말대로 다시 찾아옵시다.”
“길을…….”
“젊은 군림단주와 오랫동안 뒤에서 강호를 움직이던 사자궁주 호원. 둘 중 하나부터 정합시다.”
파륵은 북패주의 입을 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북패주가 가장 먼저 몸을 돌렸다.
***
“그래, 그렇게 해야지. 희사, 역시 현명하구나.”
경오는 석문 앞에 대고 있던 귀를 떼고 태사의로 돌아갔다.
이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때였다.
수십 년 동안 해 오지 않은 일이 집중한다고 해서 될 리가 없었다.
몇 가지 서찰만 본 후 희사를 불렀다.
“희사, 밖에 있느냐?”
경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석문이 열리며 희사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혈주님?”
희사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호원이 무슨 의도로 이런 글을 공표했을까?”
경오가 서찰을 건드리자 날아가 희사의 손으로 들어갔다.
호원이 묵자성을 죽이고 난 뒤에 공표한 전문이었다.
“파 패주도 말했듯이, 호원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왜? 구왕은 군림단주로 하여금 죽이고, 묵자성은 직접 처리하고, 남은 것은 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도 이루겠다는…… 음?”
“……!”
경오가 어이없다는 듯 말을 꺼내다 입을 다물었고, 희사 역시 눈을 크게 치떴다.
무의식적으로 꺼낸 경오의 한마디가 모든 추측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준 까닭이다.
“파 패주, 파 패주를 불러라.”
“바로 들어오라고 전하겠습니다.”
희사는 곧바로 대전을 나갔다.
“호원이 군림단주를 구왕 제거에 이용했다면, 나라고 못 할 이유는 없지.”
경오가 손바닥을 펴 들어 올리자 그 안으로 종유석에서 떨어진 물들이 빨려 들어갔다.
츄릅.
말랐던 목을 적시자 개운함이 전신을 감쌌다.
“이제 제대로 군림단주란 자에 대해 좀 볼까?”
쌓인 서찰들 중 태산과 관련된 것들을 추려서 한 장씩 넘겼다.
군림단주와 투신의 대결을 볼 요량으로 사람들 수만 명이 태산으로 몰려들었다는 글.
대결 결과에 태산의 많은 봉우리들이 환호했고, 또 다른 많은 봉우리들이 슬퍼했다는 글.
[……(중략)……군림단주는 투신을 계곡 바닥에 처박은 뒤 곧바로 군림단을 모아 태산을 떠나려 했으나 추격해 온 구왕의 구신군들이……(중략)……군림단주는 단신으로 구왕이 내려다보고 있는 절벽 위로 올라가……(후략)…….]
“이놈 처음부터 구왕을 노리고 힘을 분배했던 거구나.”
경오는 군림단주란 글자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초반에는 호원이 어떤 계략을 태산에 꾸며 놓았는지 찾아보려 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대놓고 막아서는 모든 조건들을 부숴 버리는 군림단주의 행보 외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무심코 경오의 머릿속에 떠오른 한 글자였다.
자신처럼 앞뒤좌우 사방을 살피는 노강호보다는 오로지 앞만 보며 달려가는 군림단주가 호원의 상대로 제격일 수도 있었다.
군림단주를 이용하기보다는 응원해 주는 것이 나았다.
―파 패주가 도착했습니다.
문밖에서 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해라.”
경오의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파륵은 영문을 몰라 조심스럽게 경오 앞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파 패주, 안 하던 일을 하려니 시간이 꽤 걸렸다. 이런 글들로는 한계가 있더구나. 호원을 만나 담판이라도 지어 볼까 했지만, 무슨 짓을 꾸밀지 몰라 저어되더군. 그런데 청허루? 군림단과 파 패주가 연락한 적 있다던 곳이 떠올랐다. 호원보다는 강호 신성의 패기를 보고 싶어졌다. 자리를 마련해 보겠느냐?”
“혀, 혈주님, 단 둘이 말씀이십니까?”
“태산에서의 활약을 보면 나올 정도의 배짱은 차고 넘칠 것 같구나.”
“아…….”
파륵은 경오의 전혀 예상하지 못하다 놀라서 입을 벌리고 말았다.
“파 패주?”
“……아! 희사?”
경오가 다그치자 파륵이 희사를 돌아봤다.
그러자 희사가 품에서 붉은 띠를 편 쪽지를 경오에게 건넸다.
[파 패주, 사혈명 혈주 사황과 만났으면 하오.
―군림단주.]
“파하하하!”
경오는 쪽지를 보자마자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자신에게 먼저 만나자는 제안을 했을 줄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강호신성의 패기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