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구왕이 죽었다.
태산으로 몰려든 군중들의 숫자는 무려 십만에 달했고, 그중 군림단주와 구왕의 대결을 끝까지 지켜본 사람들에 의해 소문은 삽시간에 강호로 퍼져 나갔다.
―군림단주와 구왕이 격돌할 때마다 봉우리가 하나씩 사라졌다.
―무너진 봉우리들 때문에 계곡이 평지가 된 곳도 있다.
사람들은 앞다퉈 대결 과정과 귀암로의 몰락에 대해 말을 옮기기 바빴다.
자연스럽게 군림단과 군림단주에 대한 부풀림은 커졌다.
―군림단원 개개인의 무공은 이미 절정고수에 비견되며, 군림단주는 입신의 경지에 올라 있다.
―군림단원 한 명이 종남파로 쳐들어가 장로 한 명을 죽이고 나왔다는 소문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이번 싸움에서도 군림단원 한 명이 구왕의 쌍둥이 동생인 암왕을 상대했고, 돌아온 사람은 군림단원이었다.
태산결전.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군림단주와 구왕의 싸움을 그렇게 불렀다.
“……해서, 태산결전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큼, 잠시 목 좀 축여야겠군요.”
화자는 들려오는 소문들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얘기를 적당히 버무리며 애간장을 태우는 중이었다.
“아으, 감질나! 다음에 군림단주가 움직인다는 소문만 들려 봐. 아주 다리가 작살나도록 쫓아댕길 테니까.”
화자의 말솜씨에 넘어간 중년인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며 울분을 토했다.
“어디까지…… 아! 살아남은 사람들 얘기를 하던 중이었구려. 구왕의 둘째 제자 명진과 신군 둘이 살아서 귀면대와 암천대를 데리고 떠났다고 합니다.”
화자가 말을 이었다.
그러자 주루 안에서 소요가 일었다.
“왜 살려 주지?”
“내 말이. 군림단주 입장에선 후환이 아닌가?”
“조용히 좀 합시다! 그 얘기로 이어 갈 것 같은데.”
조금 전에 울화통을 터트렸던 중년인이 소요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짜증을 냈다.
“군림단주가…….”
화자는 조용해진 틈을 타 입을 열었다.
순간, 사람들이 입에다 검지를 대며 서로 조용히시켰다.
“‘구왕의 진전을 이을 자신이 있느냐?’라고 질문을 했답니다. 대답 여하에 따라 모두 죽일지, 모두 살릴지 결정하겠다고 말이지요.”
화자의 말에 사람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어서 다음 얘길 하라는 뜻이다.
“구왕의 둘째 제자 명진은 고민이 됐겠지요. 자신이 있다고 하자니 다 죽일 것 같고, 자신이 없다고 하자니 비겁한 것 같고 말이지요. 고민하던 명진이 군림단주를 똑바로 쳐다보며!”
탕!
화자가 갑자기 탁자를 두드리며 일어났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당연하다! 내게 시간만 주어진다면 사부님의 모든 진전을 잇고 반드시 네게 복수를 할 것이다!”
화자는 마치 명진에게 빙의라도 한 것처럼 젊은 목소리를 냈다.
“우오!”
“멋지다!”
짝짝짝!
박수소리가 주루 안을 채웠다.
“자자, 진정들 하시고. 진짜는 지금부터입니다. 군림단주가 뭐라고 했을까요?”
―우오, 와아아아.
사람들은 한껏 기대하며 소리를 내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구왕 사도천의 무공을 완성하면 찾아와라.”
홱.
화자는 짧게 말을 마치고는 돌아서서 자리에 앉았다.
“지, 진짜로? 군림단주가 그리 말했다고요?”
“자신이 이긴 자의 제자에게 복수의 기회를 준다고? 으으, 너무 멋진 거 아냐?”
사람들은 소름이 끼쳤는지 손으로 몸을 비비며 호들갑들을 떨어 댔다.
“허허허. 이거 제 얘기를 이렇게 좋아해 주시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군요. 여러분, 투신은 어떻게 됐을까요?”
화자가 슬쩍 말을 건넸다.
모든 신경이 군림단주에게 가 있던 사람들은 투신이란 말에 의아한 표정들을 지었다.
군림단주가 투신을 이겼다는 얘길 초반에 들은 까닭이다.
“곧 새 생명을 받아 이 땅으로 다시 내려온답니다.”
화자의 말이 끝났음에도 사람들은 눈만 끔뻑이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화자를 쳐다보는 것이다.
“에이, 새 생명?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그걸 누가 믿…….”
사십 대 사내가 화자의 말에 올랐던 흥이 식으려 하자 빈정거리려 했다.
그때였다.
“저는 투신께서 살아나실 걸 믿어요!”
앞에 앉아 있던 열서너 살 정도의 소년이 벌떡 일어나며 화난 표정으로 사내를 돌아봤다.
“뭐? 어린놈이 어디서 어른 말을 끊고 있어.”
사내는 당장이라도 소년을 때릴 것처럼 눈을 부라렸으나 소년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만합시다. 애 잡겠네.”
“푸푸풉. 고놈 참 당차구나.”
소년과 사내가 일으킨 소요에 사람들은 한마디씩 하며 웃었다.
화자는 더 이상 얘기를 이어 갈 분위기가 아닌 것을 느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팔짱 낀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삼십 대 사내가 있었다.
끄덕.
정리해 달라는 화자의 고갯짓이었다.
“어이구, 무서워라. 삼정일사회는 이런 소년 데려가지 않고 뭐 하나 모르겠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자, 자리로 돌아가셔서 술이나 마저 드십시오.”
삼십 대 사내는 익숙한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소년은 아쉬운 표정으로 화자를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루 밖으로 나가려 했다.
“아! 너 아까 왜 그랬냐?”
삼십 대 사내는 지나치려는 소년을 잡으며 물었다.
“화나서요.”
“뭐가?”
“투신께서 부활할 수도 있는데, 그 아저씨가 비꼬잖아요.”
“하긴 나도 기분 나쁘더라.”
“그렇죠? 여기도 투신 아니었으면 한류천 놈들에게 다 뜯겼을 걸요? 사람들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소년은 삼십 대 사내가 앉은 탁자를 보며 코를 찡긋거렸다.
‘이놈 봐라?’
사내는 이채를 발했다.
한류천이 사라져서 살기 좋아졌다는 말을 소년에게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이름이 뭐냐?”
“진명. 진명이에요.”
“엄부일이다.”
“예? 아, 예.”
소년은 사내가 이름을 알려주자 당황했다.
어른과 통성명이란 것을 처음 해본 까닭이다.
“내일도 와라. 투신에 대해 조금씩 알려 주마. 어때?”
“오, 올게요. 내일도, 모레도요.”
소년은 얼굴이 환해지며 주루 밖으로 내달렸다.
그 모습에 엄부일은 피식, 웃으며 화자에게로 돌아섰다.
“한류천 덕분에 어린 인재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데요?”
“회주님께서 당분간은 물속에 있다 여기고 숨이나 고르라고 하셨네. 사람들에게 강호 소식을 전해 주다 보면 자연스럽게 때를 맞이할 거라고.”
“군림단이 어디까지 올라갈지 궁금하긴 하네요.”
“어디까지라. 구왕을 꺾은 기세는 쉬이 멈추지 않을…… 음? 회주님이 또 연락을 주셨나?”
화자는 말을 받아 주다 구석진 창가에 내려앉는 전서구를 보고 움직였다.
[사자궁주 호원도 태산에 있었다.
극히 소수만 아는 일이니 적당히.
호원이 급히 철혈사자맹으로 복귀한 이유는 철혈사자맹주 묵자성이 사혈명과 손을 잡으려는 보고 때문이라고 한다.
철혈대전이 무너질 정도의 큰 격돌이 있었고, 호원만 홀로 빠져나왔다.
구대문파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입장을 표명하려 정신이 없다고 한다.
각자도생을 택할 것으로 예측하자.
구대문파는 자파부터 챙기려 할 테고, 호원은 그것을 너그러이 봐주는 척 넘어갈 테니까.]
파르르.
화자의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르신?”
엄부일은 몸을 떠는 화자에게 다가가 진정시키려 했다.
“철혈사자맹주가 죽었다.”
“……!”
엄부일의 몸이 자리에 굳었다.
“자리를 최대한 넓게 만들고 술도 넉넉히 준비해 주게. 나는 연락부터 해야겠다.”
화자는 서찰을 옮겨 적으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기 바빴다.
푸드덕―.
화자의 손을 떠난 전서구는 곧장 위로 올라갔다.
다른 곳에 있는 화자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다.
***
철혈사자맹주 묵자성의 죽음.
용연이 태산을 떠나 하남성으로 내려가는 길에 듣게 됐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호원이었다.
사도천과 싸울 때, 호원이 태산을 떠났다는 정보를 묵 노야가 무투를 통해 알려 주었다.
그러나 서찰로 받아 든 보고에는 예상과 다른 말이 적혀 있었다.
사자궁주 호원이 ‘죽였다’가 아니라 ‘단죄했다’고 적혀 있었다.
[……호원은 곧장 오대세가를 통해 묵자성을 단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공표했습니다.
一. 묵자성이 그동안 사혈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정황을 도처에서 제보해 왔습니다. 일례로는 최근 서패주 파륵을 철혈대전에 들인 것을 본 자가 있다고 합니다.
一.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께서 묵자성의 만행에 치를 떨며 구대문파연합인 철혈문을 탈퇴하기로 만장일치 합의를 봤다고 합니다.
一. 사자궁 역시 묵자성의 일에 무관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오대세가연합을 해체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 강호에 평화를 되찾아 드린 후, 자진 해체토록 하겠습니다.
호원이 공표한 전문입니다.]
“진 대교, 이 전문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용연은 군림단원이 모두 서찰을 읽을 때까지 시간을 준 뒤 진류에게 물었다.
“……읽는 대상에 따라 다르게 읽힐 것 같습니다, 단주님. 사자궁에 반하면 구대문파연합인 철혈문처럼 된다는 경고로도 읽히고, 앞으로 사자궁 외의 모든 세력을 해체시킬 것이란 각오로도 읽힙니다.”
진류는 대답을 하고 나서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남았으나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를 향한 경고는 아닐까?”
“……아! 귀암로 여섯 축을 합칠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경고로 보입니다.”
용연의 질문에 진류는 미진했던 부분이 뭔지 깨닫고 곧바로 대답했다.
군림단원들의 입에서 낮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사혈명에도 해당되고.”
용연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놓고 강호삼대세력을 해체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호원이 왜 서둘러 묵자성을 만나러 갔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자신이나 구왕보다는 사혈명과 손을 잡으려는 묵자성이 더 신경 쓰였을 것이다. 철혈문과 사혈명이 힘을 합치면 얼마나 커질지 모르니까.
결과적으로는 호원이 원하는 대로 철혈사자맹은 해체된 상태가 됐고 귀암로 여섯 축 역시 흩어진 것과 마찬가지가 됐다.
귀암로 여섯 축 중 세 개를 동시에 공략할 때, 구왕이 군림단을 우습게 여겨 지나친 줄 알았더니 그때부터 호원이 손을 썼던 모양이다.
구왕은 뒤늦게 호원의 계략에 빠진 것을 알고 여섯 축을 되찾으러 온 것이다.
“한 가지는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군.”
용연은 손가락으로 전문 세 번째 글을 짚었다.
진류를 비롯한 군림단원들이 일제히 의아한 표정으로 용연을 쳐다봤다.
“은자림, 여우락, 낭협은 군림단의 휘하에 두지 않을 것이다. 은자림은 은영루에, 여우락은 현 여우락주에게, 낭협은 비 협주에게 맡긴다.”
이의를 물을 것도 없었다.
군림단원 모두가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향주는 당분간 머물 근방의 임시 거처를 알아보고 장소가 정해질 때까지 여기서 지낸다.”
용연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군림단원을 둘러싸고 있던 외부 식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