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콰콰콰콰!
“허!”
굉음과 함께 대전이 들썩이며 열아홉 개의 인영이 뒤섞였다.
묵자성은 기가 찬 표정으로 호원이 부른 호천위들 중 한 명을 쳐다봤다.
쩡!
호천위가 이 궁위의 검을 양팔의 팔찌로 막는 동시에 발을 뻗었다.
쾅!
이 궁위가 날아가 벽에 박혔다가 흘러내렸다.
그러자 호천위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이 궁위를 끝장내지 않고 다른 구궁위를 찾는 것이다.
‘음?’
묵자성은 호천위의 행동에 이채를 발했다.
“아직 모자라거든. 미완성. 그러고 보니 묵 문주와 닮은 것도 같고.”
호원은 묵자성의 눈빛을 보고 웃으며 말을 꺼냈다.
“미완성? 스스로 미완성이라 부르는 종자들을 데리고 왔다고? 당신이?”
“너무 촉박하더라고. 원래는 구왕에게 써먹으려고 데려왔는데, 묵 문주가 사혈명과 한배를 타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더 급한 쪽으로 오게 됐소.”
“촉박? 아아, 그동안 호씨세가를 드나들었던 이유가 저 호천위란 자들을 만들기 위해서였던 거요?”
“백 개를 만들었지.”
“배, 백!”
묵자성은 아직도 구궁위와 싸우고 있는 호천위들을 쳐다봤다.
저 정도 고수들을 몇 년도 안 돼서 백 명이나 만들었다고?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나는…….”
호원은 말을 꺼내 놓고 뒤를 돌아봤다.
오성위의 뒤쪽으로 수십 명의 구대문파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누가 봐도 내가 시작한 싸움인데 아무도 대전 안으로 들어오려는 자가 없군. 참 신기한 일 아니오, 묵 문주?”
“…….”
“장로들을 내치고 일대제자들로 구성해서 새로운 철혈문을 만들겠다! 후후후.”
호원은 묵자성을 흉내 내듯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이며 낮게 조소했다.
“지금 뭐 하는 거요, 호 궁주?”
“내게 변화가 일어난 것을 감지한 것까지는 좋았소, 묵 문주. 허나 그런 방법으로는 구대문파처럼 지독하게 폐쇄적인 곳들을 설득할 수 있을 리가. 아니다, 사부와 제자 사이를 이간질해서 자리나 지키려고 하는 무능력한 맹주라는 말이나 들으려나? 아마도 구대문파에 기록될 묵 문주의 평가가 아닐까 싶군요.”
호원은 묵자성이 짜증을 내든 말든 할 말을 끝냈다.
“……나만 그런 평가를 받을까? 당신은?”
“후후.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사혈명이 강호를 일통시키는 것보다는 내가 하는 걸 원할 테니까. 구대문파에서도 나를 지지해 주지 않을까?”
히죽.
호원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묵자성을 보며 활짝 웃었다.
“가, 강호 일통?”
묵자성은 황당한 얼굴로 호원을 쳐다봤다.
대대로 사자궁주는 강호의 균형을 맞춰 왔고 그 정점을 찍은 사람이 호원이었다.
그런 사람이 강호 일통이란 말을 입에 담고 있는 것이다.
“딱 하나, 지난 삼십 년 동안 내가 마음먹어서 못 이룬 일은 그것밖에 없었소. 지금껏 강호의 평화를 위해 헌신했으니 그 정도는 욕심 내 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강호를 균형 있게 만드는 것이 사자궁주의 임무란 걸 잊으신 거요?”
“임무. 그렇지, 임무였었지. 그런데…… 누가 준 임무였더라?”
호원은 생각이 안 난다는 듯 묵자성을 보며 물었다.
“대대로 사자궁주는 호씨세가에서 맡았으니 더 잘 알 것 아니오?”
“알지, 잘 알지. 내 선대의 작품이지.”
호원은 미미하게 고개까지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철혈사자맹은 이렇게, 귀암로는 저렇게, 사혈명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등등. 후후후. 각 세력을 다루는 세부 규칙만 수백 권에 달하는데, 나는 그걸 모두 외우고 실천해 왔소.”
묵자성은 속으로 기함을 했다.
수백 권의 지침서를 모두 암기하고 적용해 왔다?
진정 치가 떨리는 일가가 아닐 수 없었다.
“군림단주를 만난 것도 사실은 책에 적힌 과정을 한 번 더 반복하면 되는 일이었소. 적어도 그가 자신을 ‘임주’가 아닌 ‘군림단주’라고 소개하기 전까지는 말이오.”
“음?”
“묵 문주, 이백 년도 더 된 규칙을 어기면서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자신은 우리들이 만든 규칙 따위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 규칙이 이백여 년 동안 군림단을 모욕했다나? 푸푸풉.”
호원은 격앙된 목소리와 달리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대전을 찢고 부수고 있는 호천위 열 명과 구궁위의 싸움도 격해져 갔다.
―콰쾅! 콰콰콰콰!
구궁위들이 승기를 잡지 못한 채 밀리기만 했다.
“호 궁주, 더 할 말 없으면…….”
“그 말이 딱, 머릿속에 박히더라고.”
호원이 묵자성의 말을 자르며 손가락 하나를 자신의 머리에 갖다 댔다.
“아! 나도 그동안 모욕을 받았구나. 라고.”
말을 마친 호원의 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미친.’
묵자성의 머릿속에 그 한마디가 떠올랐다.
그 외에는 눈앞의 호원을 설명할 말이 없었다.
정작 모욕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호원은 묵자성의 일그러진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명령을 내린 사람은 나였는데, 다들 내 이름 대신 사자궁주란 신분에 대해서만 말을 하더군. 내가, 이 호원이가 지켜 준 강호인데 말이야!”
끄등!
호원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자 대전 천장에서 돌 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파스슥.
돌 조각들이 호원과 묵자성의 머리 위에서 먼지로 화했다.
쩌저― 쩡!
“커흑!”
꽈직!
“허억, 허…….”
연달아 신음이 들려왔다.
‘구궁위.’
꿈틀.
묵자성의 구겨졌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러나 호원을 눈앞에 두고 시선을 돌린다거나 할 수도 없었다.
쾅! 꾸득!
이번엔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구궁위.’
묵자성은 구궁위 중 한 명이 죽었음을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으려 이를 악다물었다.
“사람처럼 싸우면 안 되지. 쯧.”
슥.
호원은 짧게 혀를 차고는 천천히 발을 들었다 내렸다.
꾸―웅!
끄드등!
호원의 등 뒤에 있던 땅이 일어나더니 부서졌던 대전 입구를 막았다.
보는 눈을 가리려는 것이다.
그 순간, 묵자성의 손에서 시작된 거대한 힘이 호원을 덮쳤다.
차리릭.
호원은 피하지 않고 어두워진 틈에 왼손에서 빠져나온 백린을 움직였다.
쩡!
강력한 힘을 품은 한 점과 다른 한 점이 정교하게 맞부딪치며 거대한 소리를 냈다.
쿠핫!
빛이 번지듯 공간을 삼키더니 대전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콰콰콰콰콰!
사라진 대전 위로 위층이 내려앉았다.
한 층이 사라진 것이다.
드드드― 끄드드―.
전각 전체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사방으로 먼지폭풍이 퍼지며 내려앉은 층 바닥 위로 호원과 묵자성이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카라락.
호원의 왼손 손등에서 빠져나온, 촉수처럼 움직이는 백색 선들이 마구 꿈틀댔다.
“다, 당신이 데려온 자들까지 왜 죽인 거지?”
묵자성은 피가 흐르는 왼쪽 어깨의 상처를 오른손으로 막으며 기가 막힌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봤다.
호원이 주저앉는 천장을 피하려던 구궁위와 호천위를 저 백색선들로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왜? 말했잖소, 미완성 물건들이라고. 어차피 구궁위들을 처리한 뒤에 죽일 생각이었소.”
“저 정도의 고수들을 미완성이라고 부르면 도대체…….”
“……놀라긴. 저 정도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괜찮군. 그래 봐야 두 시진이 다지만. 머리 좋고 근골도 좋은 놈들이라 그런지 제대로 힘을 쏟네.”
“그런 인재들을 저렇게 만든 거요?”
묵자성은 호원이 혼잣말을 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호천위의 정체를 말하자 눈을 부릅뜨며 따졌다.
“음? 인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묵 문주?”
호원은 자신의 말을 묵자성이 들었다는 것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들의 한계가 두 시진이라고 했잖소?”
“두 시진?”
호원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좁혀졌다. 그러고는 백린에 이마가 뚫린 채 죽은 호천위 중 한 명을 돌아봤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을 한 것이 아니고?”
호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호천위들이 아까워서 잠시 생각을 떠올리긴 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말로 꺼냈던 것인가?
“하여간 묵자성, 당신은 그런 점이 문제야. 내가 저것들을 만드느라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알았으면 바로 공격을 해야지, 뭘 망설이는 거야? 그것도 힘까지 풀면서. 쯧.”
‘또.’
묵자성은 호원의 혼잣말에 다시 인상을 썼다.
그때였다.
퍽!
“억!”
묵자성의 양쪽 발등을 뚫고 백색 선이 나왔다.
“뭐에 당했는지 궁금한가 보군. 백린이라고 하오, 묵 문주. 이런 것도 가능하지.”
호원이 자랑하듯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대전 바닥 곳곳이 들썩이며 수십 줄기의 선들이 묵자성을 향해 다가갔다.
쇄액!
호천위와 구궁위를 죽일 때 사용했던 백린사(白鱗絲)를 움직인 것이다.
“헉!”
묵자성은 뒤늦게 막아 보려 전력을 다해 양손을 휘둘렀으나, 이미 수십 개의 창끝처럼 변한 첨(尖)들이 박혀 들었고, 수십 개의 선들이 몸을 지나갔다.
퍼버벅! 스악!
***
펑!
호원은 한 층이 내려앉은 전각을 부수며 나왔다.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싸우는 소리에 대전이었던 공간으로 모여든 구대문파의 제자들은 복잡한 눈으로 호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묵자성 맹주는 사혈명과 모종의 일을 꾸미려 했음을 인정하면서도 끝끝내 잘못이 아니라고, 반드시 성공시킬 것이라더군요.”
호원은 어쩔 수 없이 묵자성을 죽여야 했다는 말을 삼키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저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맹주님께서 그런 자들과 교류를 하셨다니요?”
“아닙니다.”
“아닐 겁니다!”
구대문파의 젊은 제자들은 곧바로 호원의 말을 부정하며 분개했다.
“무량수불, 그런 정황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외면했던 빈도의 잘못입니다.”
무당파 일대제자 해벽 진인은 반장의 예를 취했다.
“청성의 진 모도 해벽 진인과 같은 심정입니다.”
청성파 일대제자 진오도 반장의 예를 취했다.
모인 구대문파의 일대제자들은 해벽 진인과 진오와 마찬가지로 자파의 어린 사제, 사질 들을 당기며 호원에게 명분을 주었다.
사냥당하는 짐승의 심정으로 사제, 사질 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내 말을 믿어 주니 그나마 마음이 가벼워지는군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사자궁은 구대문파와 협력해서 강호의 평화를 지키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호원의 말에 구대문파 제자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구대문파와 협력?
강호의 평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 호원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원은 구대문파 제자들의 표정과 상관없이 당당하게 자리를 떠났다.
그 뒤를 오성위가 난감한 얼굴로 서둘러 뒤따랐다.
그때, 앞서 가던 호원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후후후.”
‘아! 궁주님…….’
호찬진은 사색이 되어 눈을 감았다.
호원이 의식하고 내는 웃음소리가 아님을 아는 까닭이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구대문파 제자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앞으로 저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