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쩡!
훅, 옆구리가 휘어졌다.
그러나 이전처럼 날아가 처박히거나 고통에 신음하지 않았다.
이기어검의 힘을 담은 도가 낭수련을 뚫지 못한 채 밀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그그그극!
전신을 휘감은 거대한 흐름이 사도천의 도를 감싸고 있는 힘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막아 내던 용연의 신형이 도와 함께 뒤쪽으로 쭉 밀려났다.
그리고 다시 힘과 흐름이 창과 방패의 역할을 하며 공방을 펼쳤다.
그 짧은 움직임으로 공격하려던 다른 다섯 개의 무기들을 잠시 멈추게 만들었다.
‘닿았다.’
용연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사도천의 공격을 먼저 안 이유였다.
군림봉을 떠난 이후 한 번도 수련해 본 적 없는 흐름 덕분에 삼제의 첫 번째 원리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웃는 용연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군림봉은 군림단의 혼이 깃들어 있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군림혼(君臨魂). 좋네.’
용연은 지금 몸 안에서 언제든 발현될 흐름의 이름을 만들었다.
쾌액!
이번엔 검이 용연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러나 용연은 이미 검의 움직임을 느끼고 신형을 옆으로 한참 이동한 뒤였다.
콰콰콰!
거대한 폭음과 함께 검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무기들에 담긴 힘이 파괴하는 영역은 이전과 비교할 수도 없었다.
쿠앙! 쩌그― 쩌저정!
용연이 올라섰던 절벽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사람들이 피신한 부근에 용연과 사도천이 만든 인공 절벽이 생겼다.
움찔.
‘뭐지?’
용연은 다시 짓쳐들 거라 여겼던 공격이 멈추자, 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사도천 쪽을 돌아봤다.
사도천이 뒷짐을 진 채 용연을 보고 있었다.
꿈틀.
용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재빨리 옆을 돌아봤다.
“허, 도대체 삼십 년도 안 되는 시간을 자네는 어떻게 보낸 거지?”
검이 떠 있어야 할 자리에 사도천이 한 손으로 수염을 매만지며 서 있었다.
홱.
용연의 고개가 다시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생을 살아가는 속도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가능해.”
“천고의 기연이 해마다 닿았다고 해도 자네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평생을 보냈어야 해.”
홱, 홱.
용연은 정신없이 고개를 돌려 댔다.
삼제의 첫 번째 원리에 닿았으면서도 사도천은 기척도 없이 사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단지 사도천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모습을 드러낸 자들은 모두 아홉이고 전부 진짜로 느껴졌다.
“파천구령. 이것까지 막아 내면 앞으로의 강호는 자네 걸세.”
―……걸세.
한 명의 입에서 시작된 말이 아홉 명의 입으로 끝을 맺었다.
움찔. 움찔.
용연은 떠는 것처럼 몸을 꿈틀댔다.
아홉 명의 사도천이 노리는 곳들이 느껴진 까닭이다.
각기 취하고 있는 자세가 달랐다.
한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아홉 명인 것이다.
‘군림혼.’
차라락.
용연이 군림혼을 떠올리자 낭수련이 손목에서 벗어나며 검과 도로 변했다.
쿠―우―우―.
자세를 취한 것만으로 아홉 명의 사도천이 내뿜는 기세를 어느 정도 밀어낼 수 있었다.
‘아홉이라.’
용연이 두 개뿐인 무기로 어떻게 아홉을 상대할지 생각하려는 순간,
차라락.
낭수련이 팔꿈치와 어깨, 그리고 무릎에 띠를 둘렀다.
용연은 놀라서 양손에 쥔 검과 도를 쳐다봤다.
검과 도는 조금도 형태가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나만이 아니란 건가?’
군림혼은 용연의 몸만 바꾼 것이 아니라 낭수련까지 그 몸에 적응하도록 만든 모양이다.
한순간, 거대한 기운으로 짠 망이 출렁였다.
이제 전력을 다해 군림혼을 펼칠 일만 남았다.
머릿속 수차가 몸속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미친 듯이 회전했다.
스르.
사도천은 마지막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의 분신들이 밀어내는 힘과 그것을 막아 내는 용연의 힘이 한 점에서 만나며 시간과 공간이 맞닿았다.
소리와 색이 사라지고, 냄새와 촉감 역시 사라져서 빛만 남겨졌다.
보고자 한다고 볼 수 없지만, 보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는 공간.
사도천의 아홉 개의 분신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용연의 낭수련 띠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콰아아악!
사도천들이 짓쳐 들었다.
순간,
용연의 모든 관절을 두른 낭수련 띠가 눈을 뜨며 엄청난 빛을 방출했다.
파아아앗!
그것은 강기로 이루어진 검이었고 도였으며, 용연의 의지에 따라 공간 밖으로 나갔다가 휘돌아 돌아오는 어검으로도 변했고, 무지막지한 주먹질로 사도천의 분신들을 짓이겨 갔다.
***
“모, 모두 봉우리를 벗어나시오!”
용연과 사도천이 싸우는 곳 주위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터졌다.
계곡을 차곡차곡 채우며 올라오는 그르렁거림을 듣자마자 위험을 감지하고 소리친 것이다.
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봉우리들에서도 경고의 목소리가 사방을 울려 댔다.
―모두 오십 장 밖으로 도망치시오!
―……서두르시오!
―……오오오.
덜덜덜.
“내게는…… 이 싸움을 끝까지 볼 자격이 없다.”
조균은 온몸을 떨며 보이지 않는 계곡 아래를 내려다봤다.
바로 앞에서 막기만 하던 투신의 몸에 상처조차 내지 못한 자신이었다.
군림단주의 싸움을 지켜보는 동안 절망이란 끊어지지 않을 것 같은 줄에 온몸이 칭칭 감기는 것 같았다.
그 어떤 노력으로도 평생 좇을 수 없는 존재.
군림단주는 그렇게 조균의 머릿속에 각인돼 버렸다.
***
[……(중략)……지금까지 싸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혈주님, 준비하던 모든 계획을 백지화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군림단주는 이미 구왕과 동급의 고수입니다.
묵자성 맹주와의 동맹 역시 다시 한번 고려해 주시길 간청 드립니다.
―파륵.]
***
주르륵.
묵 노야는 볼을 적신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잊은 채 계곡을 타고 흐르는 진동을 마음껏 느꼈다.
저 여파가 어디까지 퍼져 나갈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고작 귀암로의 한 축에 복수나 꿈꾸던 나를, 투신께서 여기까지 끌고 와 주셨다. 저 광경…… 내 복수를 위해 기꺼이 창이 돼 주겠다던 분의 신위다!’
묵 노야는 눈을 부릅뜨고 자리를 지켰다.
싸움의 결과와 무관하게 가장 먼저 용연에게로 달려가야 하는 까닭이다.
그때였다.
“음?”
묵 노야의 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멍해진 것이 아니라 정말로 계곡 안이 고요해졌다.
돌아보니, 무투들도 당황한 표정으로 묵 노야를 쳐다보고 있었다.
홱.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계곡 안으로 고개를 돌리던 묵 노야가 기함을 질렀다.
창끝같이 생긴 거대한 빛이 절벽들을 가루로 만들며 일직선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무투들이 묵 노야를 재빨리 에워싸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묵 노야의 눈앞으로 거대한 창끝이 지나갔다.
끄드드드드―.
격돌의 여파가 일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무투들의 어깨에 올라간 묵 노야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투신…….’
제발 무사하길.
묵 노야는 말을 삼키며 후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
쿠우―.
현승의 등에서 기음과 함께 거대한 기세가 도신군과 지신군을 압박했다.
“저건…….”
도신군은 모습을 드러낸 천강담도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강기를 저렇게 거대한 형태로 만들어 사용한다고? 그것도 팔신군과 모두 부딪친 뒤에? 사람이냐…….”
지신군은 진저리를 치며 눈가에 경련을 일으켰다.
저 도의 형태를 하고 있는 강기가 자신과 도신군을 횡으로 노린다면?
막을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훙―.
쩍!
천강담도를 막던 도신군의 도와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헉!”
지신군은 기겁을 하며 몸을 날렸으나, 천강담도는 이미 수평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쩔륵!
스슷.
천강담도가 지신군의 허리를 자르자마자 사라졌다.
‘저 미친놈이 아니었으면 곤란할 뻔했어.’
현승은 호흡을 고르며 뒤를 돌아봤다.
자신만만하게 나섰던 몽외가 피항에게 한 팔을 맡긴 채 특유의 윗니와 아랫니를 모두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
권신군의 머리를 부술 때 그나마 남아 있던 전력을 모두 사용한 것이다.
군림단 서열 삼 위란 놈이 저런 미친 짓을 아무렇지도 할 줄이야.
곧바로 시작된 반격에서 장신군의 장력에 맞고 날아가 지금까지 저 상태였다. 물론 그 한 번의 공격 덕분에 그나마 큰 희생 없이 귀면대와 암천대를 유린하고 있었다.
현승이 다른 곳을 돌아보려 할 때였다.
끄드드드드―.
예사롭지 않은 진동이 먼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쉬악!
현승의 신형이 수직으로 솟구친 후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아…….”
거대한 먼지구름이 용암 폭발처럼 솟구치며 밀려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구왕께서 곧 군림단주의 목을 들고 오신다!
아래쪽에서 누군가의 거대한 외침이 터지며 계곡을 울려 댔다.
팟.
현승의 신형이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서둘러야 했다.
쿠콰콰콰콰!
“단주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임무를 완수한다.”
현승이 귀면대와 암천대를 향해 십자강기를 떨어뜨린 후, 내려서마자 도륙을 벌였다.
구신군 중 한 명의 외침에 사기가 일어나던 귀면대와 암천대의 무인들은 반응하기도 전에 죽어 갔다.
“크크. 그런 말은 해선 안 되지. 이 손 좀 놔 봐.”
몽외가 피항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꾹.
“현 선림님께서 내린 명령입니다.”
피항은 몽외를 부축하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조금 전에 소리친 편신군을 노려봤다.
쾅!
편과 륜이 부딪치며 굉음을 만들었다.
혼원륜을 던진 담영호는 자리에 잔영을 남기며 편신군과의 거리를 좁혀 갔다.
“어딜!”
빛으로 감싸인 비도 두 자루가 담영호의 등을 노리고 내리꽂혔다.
콰쾅!
“후욱, 회수할 수 있겠느냐?”
비도 두 자루를 튕겨 낸 소황선이 비신군 앞으로 내려섰다.
힐끗.
비신군은 소매 속에서 다시 비도 두 자루를 꺼내며 담영호를 쳐다봤다.
쩌―엉!
담영호의 륜을 편이 감는 것을 보고 비신군은 편신군이 이겼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반격을 가하려고 움직이던 편신군의 몸이 세로로 쪼개졌다.
번쩍!
비신군의 눈앞도 빛으로 물들었다.
“한눈팔면 그렇게 되는 거야.”
소황선은 비신군의 얼굴을 뭉갠 후 담영호 쪽을 돌아보다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