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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216화 (216/232)

216화

[……(중략)……건너편에서는 엄청난 싸움이 벌어지고 있고, 군림단주는 단원들과 모여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저러다 절벽이라도 무너뜨리면 모두 몰살……(후략)…….]

“흘흘흘.”

묵 노야는 서찰을 받자마자 웃었다.

용연이 단원들과 모여 있다는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쓸 수 있는 내용이었다.

잠유기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군림단원 중 교림과 학림만 움직여도 웬만한 문파 하나쯤 날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스물아홉 명이, 그것도 군림단주를 중심으로 모여 있다고 한다.

구왕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파악은 되지 않고 있지만, 작정하고 덤벼들지 않는다면 이번 싸움을 주도하는 쪽은 군림단이 될 것이다.

“군림단주의 능력은 사람들에게 보여 준 것보다 훨씬 강하다. 만약 구왕이 투신과의 싸움을 보고 나선 것이라면…… 오늘로 귀암로라는 이름은 사라질 수도 있다.”

반짝.

묵 노야의 눈에서 빛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림 총사, 군림단을 쫓아간 삼정일사회원들을 모두 계곡 아래로 소집시켜라. 회원들의 간절한 염원만이 투신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을 잊지 말고.”

묵 노야는 말을 마치고 뒤를 돌아봤다.

“……살아 계십니까?”

단림은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용연이 살아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물론이다. 오늘 일로 인해 더욱 강해지실 것이다.”

“크읍!”

단림은 격하게 몸을 떨었다.

묵 노야의 흔들리지 않는 동공을 봤기 때문이다.

서찰을 받고서 웃었던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곧바로 전하겠습니다.”

단림이 서둘러 천막을 나갔다.

“회원들만 걷어 내도 구왕의 무리들과 확연히 구분이 될 것이다. 자, 구왕, 어떻게 할 건가?”

묵 노야는 앞으로 강호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싸움 중 하나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갈증이 났다.

***

군림단을 쫓아 절벽 끝까지 따라온 사람들은 건너편 절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며 물러나려 했다.

“저긴 저기고, 여긴 아직 싸움도 시작 안 했어. 내 두 눈으로 군림단주가 얼마나 강한지 꼭 보고 만다!”

군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소신을 말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 한마디로 물러서려던 군중들이 자리를 지켰다.

목청을 높인 자는 의기양양하게 좌우를 돌아봤다.

“잘했…….”

검은색 도포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자들 중 한 명이 칭찬하려다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삼정일사회원들은 회주님의 소집명령이 떨어졌으니 모두 봉우리 중턱으로 가시오!

멀리서 말만 전한 자는 곧장 돌아섰다.

그러자 군중들 사이에서 묘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알 수 없는 손동작을 하더니 이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자리를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각도 안 돼서 절벽 위에 있던 사람들의 숫자가 반으로 줄었다.

검은색 도포를 입은 십여 명의 인영들은 그 모습을 보고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 검은색 도포를 입은 자들 사이에서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삼정일사회라.”

우뚝.

움직이려던 검은색 도포의 인영들이 일제히 멈춰 서서 목소리가 이어지길 기다렸다.

“아우는 단원 하나에 잡혀서 저 난리를 치고 있고, 삼정일사회는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고 있다? 이해가 가질 않는군. 명진아, 짐작되는 것이 있느냐?”

듣기 편한 목소리와 함께 말을 잇던 사내가 검은색 도포를 벗었다.

백발과 어울리지 않는 사십 대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내는 흘러내린 백발을 정리하며 오른쪽의 검은색 도포를 돌아봤다.

“공교로운 일이 분명합니다, 사부님. 허나 구사부들이 내려가 있고, 귀면대와 암천대가 부르면 언제든 투입될 준비를 마친 상황입니다. 제자는, 군림단이란 자들의 허세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구왕의 유일한 제자가 된 명진은 검은색 도포를 벗으며 대답과 함께 허리를 숙였다.

“그래, 네 말대로 가당치도 않은 짓을 벌이고 있지. 나도 같은 생각이다.”

구왕 사도천은 겉으로는 명진을 기특하다는 듯이 칭찬해 주었으나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호원만 나타나지 않는다면 곳곳에 심어 둔 전력만으로도 충분하지. 하지만 소문을 퍼뜨려 줄 자들이 빠져나가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대로 끝내라는 명령을 내리기 아쉬웠다.

―콰콰쾅!

힐끗.

군림단원 중 하나와 사도경이 요란하게 싸우고 있었다.

남아 있는 궁중들은 둘의 싸움을 지켜보느라 다른 곳으로 눈도 돌리지 않았다.

이 자리를 만든 자신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말이다.

“진아, 가서 구신군과 함께 저들을 모두 묻어 버리고 오너라.”

사도천이 명령과 함께 명진을 돌아봤다.

순간, 깜짝 놀라 고개를 든 명진은 사도천과 눈이 마주치자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탈각 이후 명진의 주변은 모두 변했다.

유일한 구왕의 후계자라는 조건 때문일까?

귀면대장과 암천대장이 직접 찾아와 인사를 건넸고, 그들을 데려온 사람들은 다름 아닌 구사부들이었다.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직접 구사부들을 지휘하라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사도천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

삼십 평생 이보다 자신을 고무시킨 사건은 찾을 수가 없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사부님.”

명진은 대답과 동시에 곧바로 절벽 아래로 몸을 떨어뜨렸다.

“내가 구신군들과 군림단을 처리하는 동안 귀면대와 암천대는 퇴로를 막는다.”

절벽을 평지처럼 달려서 내려가던 명진은 혼잣말을 하듯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명진에게서 분리된 그림자 두 개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많이 늘긴 했군. 준비해라.”

사도천은 절벽을 내려가는 명진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거두었다.

“호원의 움직임을 관찰하기엔 최적의 장소입니다. 싸움이 시작되면 반드시 근방까지 와야 합니다. 벗어나려는 자와 전서구를 날리는 자가 있으면 무조건 추적하라고 일러 두었습니다.”

흑포를 쓴 사내들 중 한 명이 대답을 한 후 다시 고개를 숙였다.

“혈록과 어부하는 이곳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머리를 바꿔. 여우락과 사야벌에 잡혀 제 집도 못 나오는 천치들이다.”

“존명.”

흑포인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어디서 보고 있느냐, 호원.’

사도천은 좌우를 돌아보며 웃었다.

자신이 절벽 위에 있는 이유였다.

***

명진이 바닥에 내려서자 용연의 기를 느끼고 밀어내기까지 했던 곳에서 노인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와르르― 텅. 텅.

한 명, 두 명 늘어나던 노인들의 숫자는 아홉이 됐고, 모두 모였을 때는 길이 사라진 뒤였다.

“군림단을 묻어 버리고 최대한 빨리 올라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명진의 말에 아홉 노인, 구신군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검신군 이욱이 선두로 나서다 멈춰 섰다.

모여 있던 군림단의 형태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내 뒤로 방 교림이 붙는다.”

슥.

서화가 앞으로 나섰다.

“양 학림, 따라라.”

방적이 양안을 불렀다.

셋이 한 조가 된 것이다.

“형 교림, 붙어라.”

이번엔 소황선이 형도준을 불렀다.

“무묵, 붙어.”

이렇게 한 조가 더 만들어졌다.

군림단의 가장 완벽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조합.

선림 한 명, 교림, 한 명, 학림 한 명.

현승과 몽외를 제외한 여섯 개의 조가 앞을 방패처럼 막아선 순간, 달려오던 명진 등의 속도가 확 줄어들었다.

“진아, 속도를 늦춰라.”

권신군이 명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마자 당겨서 속도를 늦췄다.

“권 사부님, 퍼져 있을 때…….”

“아니, 저들은 우리가 상대할 테니 너는 뒤로 가서 귀면대와 암천대를 불러 뒤를 받쳐라.”

“예? 권 사부님, 저는 탈각을 했습니다.”

명진은 여전히 어린애 취급을 하려는 권신군에게 항의하듯 쳐다봤다.

“안다. 그래서 물러나 있으라는 거다. 저들은…… 그 정도로는 상대할 수 없는 자들이다.”

“……!”

홱.

명진은 두 눈을 부릅뜨며 다른 사부들을 돌아봤다.

다른 말을 해 줄 사부가 한 명은 있을 거란 기대 때문인데, 모두 권신군과 같은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뭐지? 내가 못 본 게 있나?’

명진이 처음 보는 아홉 사부들의 비장한 모습이었다.

“신군들, 아무래도 호원의 농간에 당한 것 같소. 우리만으로 저들을 죽일 수 없다는 걸 알고서 힘이라도 빼놓으려는 것 같소.”

지신군이 명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마디를 더 꺼냈다.

“같은 생각이오. 진아, 귀면대와 암천대를 이곳으로 부르자마자 곧장 올라가서 구왕께 우리가 한 말을 전해 드려라.”

장신군도 한마디 거들었다.

“사부님들, 도대체 저들이 뭐기에…….”

명진은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한 채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나도 궁금하다. 도대체 어떤 무공을 익혔기에 우리들 못지않은 기세를 뿜어낼 수 있는지.”

권신군은 차마 하고 싶지 않은 말을 명진에게 해 주었다.

***

명진의 움직임은 용연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구겨진 얼굴이었다.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아 자리를 피하려는 것이다.

‘나라면 이렇게 좋은 기회를 구왕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 같은데. 당신은 당신이 만든 완벽한 기회가 아니면 나서지도 않는 모양이군, 호원.’

용연은 낮게 숨을 뱉으며 입가를 씰룩였다.

호원이란 한 인간의 의지에 진심으로 감탄했기 때문이다.

앞뒤가 막힌 공간에 군림단 스물아홉 명이 모두 모여 있는데, 이 정도의 조건으로도 호원을 움직이도록 만들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최악의 수를 써야 했다.

구왕과 호원을 연속으로 상대하는 수를.

“군림단에 명한다. 모여 있던 장소까지 밀고 나가 나를 기다려라.”

용연은 명령을 내리고 나서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건너편에서는 몽외와 사도경의 사나운 싸움이 계속되는지 굉음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절벽은 무너져 평평해진 상태였고,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멀리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국 교림, 여 교림, 잠 교림. 세 사람은 이곳에서 몽 선림을 기다렸다가 같이 합류하라.”

용연의 시선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 교림에게로 돌아갔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국진세, 여벽, 잠사우가 웃으며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현 선림.”

용연이 현승을 돌아봤다.

현승은 용연의 뜻을 이해하고 가볍게 목례를 한 뒤, 허공을 밀듯이 양손을 뻗었다.

드드드―.

군림단과 구신군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절벽 양쪽에서 진동과 함께 굉음이 이어졌다.

“안 오려나 보다. 우리가 먼저 가자.”

현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삼 인 일 조로 구성된 여섯 조가 일렬로 전진했다.

그러자 구신군들이 서로를 돌아보다 검신군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검신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양손을 펴며 입을 열었다.

“넓은 곳에서 기다리마.”

검신군의 한마디에 나머지 팔신군들은 슬쩍 뒤로 물러나다 뒤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단주님께서 내리신 첫 임무다. 전멸 외에 완수는 없다.”

현승은 둥실, 허공으로 떠올라 구신군이 향하는 앞쪽을 살핀 후, 용연을 돌아봤다.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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