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용연은 서두르지 않았다.
학림들과 교림들이 선림들의 뒤에 붙을 때까지 천천히 걸었다.
용연이 선두에 섰고, 그 뒤로 역삼각형 모양을 만들며 단원들이 따랐다.
일부러 계곡 아래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길이 용연을 이끌었다.
오랜 세월 대자연의 힘에 순응해 온 결과물일 뿐인데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길이었다.
그리고 길이 끊어진 곳에 도착하자 삼 장 넓이의 공간 저편에 백여 명의 무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티디딕.
뒤쪽에서 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힐끗.
용연은 뒤가 아닌 계곡 위쪽을 올려다봤다.
군림단을 쫓아온 사람들이 절벽 위에 다닥다닥 붙어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들 때문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들이 내는 소리였다.
‘음?’
위를 향해 있던 용연의 시선이 건너편으로 돌아갔다.
―후우…….
숨소리 하나가 용연을 포함한 군림단의 시선을 무리의 중간 어디쯤으로 잡아끌었다.
그리 크지 않은 흐트러짐.
앞쪽에 있던 자들이 비켜서자 평범한 키와 체격의 산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앉아 있다가 일어나기라도 한 것일까?
갑자기 사내의 몸이 거대해진 것처럼 건너편 계곡이 빡빡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작 숨 한 번 내쉰 것만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번득.
앞으로 늘어진 머리칼 사이로 산발 사내의 눈빛이 뻗어 나왔다.
사나웠다.
‘구왕?’
용연은 사내가 기를 드러냈음에도 구왕이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크크. 단주님, 진짜 사나운 게 뭔지 알려 주고 와도 되겠습니까?”
몽외 역시 용연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윗니와 아랫니를 맞물린 채 웃으며 허락을 구했다.
끄덕.
용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팟.
몽외는 용연의 허락을 얻은 순간 단숨에 건너편으로 넘어가 두어 번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십여 명이 뒤로 물러났고 개중에는 밀려서 절벽에 떨어진 자도 몇이 됐다.
사내가 반응을 보인 것은 그때였다.
“구, 구왕, 저희들은…….”
부하들이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 구왕의 손짓에 의해 양쪽 벽으로 밀려 나갔다.
“음? 크크크.”
사내를 향해 다가가던 몽외는 그 모습에 웃고 있던 얼굴을 더욱 활짝 펴며 반색을 했다.
부하를 거추장스러워 하는 종자라니.
이 얼마나 기쁜 상황이란 말인가?
광대는 더 양쪽으로 벌어지고, 윗니와 아랫니에는 침이 잔뜩 고였으며, 눈동자는 사백안이 되어 악마가 재림했다고 믿을 만한 모습이 됐다.
슥.
몽외는 사내를 반기듯 양손을 모았다가 옆으로 밀자, 사내 역시 같은 방법으로 부하들을 갈랐다.
쿵!
몽외가 발을 구르자,
꾸웅!
사내도 답하듯 앞으로 한 걸음 옮기며 진각을 일으켰다.
그가가각!
둘의 진각이 땅속에서 부딪치며 열린 길 중앙이 불룩해졌고, 무인들은 이내 좌우로 굴렀다.
쿵!
꾸웅!
진동이 한 번 더 일어나자 계곡 전체가 흔들렸다.
“크크. 제법이구나.”
몽외는 진심으로 자신에게 반응하는 사내의 능력에 감탄했다.
“……한참 생각했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라서. 정말로 내게 한 말이군.”
사내는 트실트실 웃다가 양손을 들어 머리칼을 넘기더니 이내 손목에 차고 있던 끈으로 고정시켰다.
그러자 머리칼이 회색으로 변했다.
안쪽의 하얀 머리칼이 검은 머리칼을 덮은 것이다.
그때였다.
“구왕을 뵙습니다!”
양쪽으로 갈라졌던 무인들의 입에서 계곡이 무너져라 외침이 터졌다.
―구왕…….
구왕이란 메아리가 계곡 사이에 난 길과 좁은 허공을 누비며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구왕?”
몽외의 펴졌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사내를 향해 되물었다.
구왕은 항상 구신군과 정예군단을 데리고 다닌다는 말을 이미 들은 후이기 때문이다.
“이봐, 임자 있는 물건을 길에서 주웠다고 주인이라고 우기면 안 돼.”
구왕의 시선이 바로 앞에 있는 몽외가 아니라 건너편에 있는 용연을 향했다.
‘아!’
용연은 구왕이라 불린 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머릿속에 불이 켜지듯 환해졌다.
저 눈빛은 가진 자보다는 빼앗긴 자의 것에 가깝다.
구왕이 저런 눈빛을 가졌을 리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역배열.”
용연의 입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팟.
선림들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지며 학림들 뒤에 나타났다.
“쯧.”
구왕은 용연의 반응에 미간을 좁히며 짧게 혀를 찼다.
시선을 잡아 두려고 꺼낸 말인데 그것 때문에 뭔가를 느낀 모양이다.
“크크. 역시 가짜였느냐?”
몽외는 꽤나 만족스러운 듯 윗니와 아랫니를 맞물리며 활짝 웃었다.
“……사도경. 내 이름이다.”
사도경의 말투에는 억양이 없었다.
“사도경? 구왕의 이름은 사도천 아닌가?”
“가끔씩 사도천이 되기도 한다.”
“아아, 쌍둥이. 그래서 그렇게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있었던 거군. 크크크.”
몽외는 이해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그렇게 웃기냐?”
콰우―.
사도경의 몸에서 일어난 엄청난 기운이 몽외를 덮쳤다.
그러나 몽외에게서 나온 반응은 거미줄이라도 뜯어내듯이 손을 휘저은 것과 이죽거리듯 입꼬리를 비튼 것이 전부였다.
“네 것을 형이 가져갔다는, 그런 개소리는 아니지? 귀 후벼야 하나 고민했잖느냐. 크크크.”
척.
몽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도경의 손이 위로 들렸다.
콰앗!
미세한 먼지 같은 것들이 사도경의 몸에서 떨어지며 허공에 멈춰 섰다.
암(揞).
구왕이 검, 도, 창, 권, 장, 지, 편, 곤, 비 외에 갖지 못한 한 가지.
사도경의 것이다.
머리칼을 묶을 때 이미 머리카락들을 잘라서 세류강(細流罡)을 입혀 전신에 묻혀 놓은 상태였다.
잘게 잘랐다고 해도 웬만한 고수의 눈에는 보인다. 하지만 머리칼을 세로로 세운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지금처럼.
적당한 어둠과 휘도는 먼지들 사이에 머리카락 조각을 섞었다.
이제 손짓만 하면 몽외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모르는지 몽외는 여전히 악마들이나 지을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맞아, 그 개소리야.”
슥.
사도경의 들렸던 손이 몽외를 향해 누웠다.
쾌애애액!
허공에 멈춰 서 있을 때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던 머리카락 조각들이 몽외를 향해 날아가며 엄청난 소리를 동반했다.
“크흐…….”
몽외는 사백안으로 변한 동공을 빠르게 움직이며 다가오는 암기들을 향해 양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미세한 빛들이 양손에서 빠져나오며 암기들과 부딪쳐 갔다.
강린기(罡鱗氣).
강기를 열 손가락에 집중시켜 비늘처럼 내보낸다고 해서 이름 붙인 무공이다.
극심한 진기 소모를 동반하지만 몽외는 이미 몇 번을 반복해서 펼칠 만큼의 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콰콰콰콰콰!
끄드드드드―.
엄청난 폭음에 이어 끊어진 길 양쪽 위로 솟구쳐 있는 절벽이 마구 흔들렸다.
“몽 선림님의 강린기를 정면에서 막아낼 정도의 고수였다니.”
서화 선림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몽외의 강린기는 자신도 끝까지 받아 내지 못하고 물러섰던 힘이다.
그런데 사도경이 저 사나운 힘을 받아 낸 것이다.
놀란 사람은 서화만이 아니었다.
교림들 전원과 학림의 입은 이미 벌어져서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자 가장 동요가 없던 현승이 용연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단주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게는 저 소리가, 강한 상대를 만나서 반갑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몽 선림은 상대가 인정할 때까지 짓누르는 못된 심보를 갖고 있습니다.”
현승은 단원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건너편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현 선림님의 말씀은, 몽 선림님이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까?”
학림 이서는 반문을 하고 나서 다급히 입을 막았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튀어나온 말에 자신도 놀란 것이다.
학림들의 얼굴이 구겨진 것은 당연했다.
“그럴 리가. 몽 선림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학림. 단지 익힌 무공의 특성이 그런 것이라 본인의 의지로 어찌할 수가 없을 뿐이다.”
현승은 나름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나 이서가 알아듣기엔 너무 어려웠던 모양이다.
“현 선림님, 제가 알아듣도록 설명해 주겠습니다.”
양안이 재빨리 나섰다.
“그래, 양 학림이 알려 줘. 이제 나올 때가…….”
현승의 시선이 건너편으로 향했다.
그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무너졌던 바위들이 터져 나가며 옷자락 하나 망가지지 않은 몽외의 기괴한 웃음이 사방을 울려 댔다.
콰콰콰―.
“크하하하! 단주님, 곧 튀어나올 놈은 구왕 사도천의 쌍둥이 동생 사도경…… 큿!”
몽외는 사도경이란 이름을 말하다 돌무더기를 뚫고 올라오는 인영에 의해 허공 높이 솟구쳤다.
사도경 역시 몽외와 마찬가지로 멀쩡한 모습이었다.
“사도경! 조금 전의 공격이 전부라면 너는 이번에 죽는다.”
쾅!
허공에서 두 인영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대단하군. 저 몽 선림과 대등하게 공방을 펼치다니. 그렇다면 진짜는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는 뜻인데…….’
용연은 천천히 돌아섰다.
선림들과 함께 있을 때부터 신경을 건드리던 감각.
구왕이 저 안 어디에 있을 것 같았다.
“구왕, 동생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구경만 할 셈이오?”
탁.
용연은 삼제의 원리를 운용해 기감을 계곡 안으로 넓게 퍼뜨렸다.
그러자 길과 벽에 색이 물들듯이 모든 형태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시야 끝까지 잘 이어 간다 싶던 순간, 물들지 않고 지나치는 혹들이 생겨났다.
용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형태가 불분명한 곳들을 쳐다봤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들어 계곡 위를 올려다봤다.
구왕이 자신을 쫓아온 사람들과 섞여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절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절레절레.
용연은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끊어진 길에 섰을 때 이미 무너뜨렸을 것이다.
용연의 시선이 다시 계곡 안으로 내려갔다.
자신이 사도경을 지켜보는 동안 수족들을 위아래 모두 배치해 둔 모양이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구왕이 얼마나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인지 알 수 있었다.
뒤쪽은 천 길 낭떠러지고, 앞에는 맹수가 들어오라고 입 벌린 채 기다리는 상황인가?
용연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선림들이 길을 뚫으면 교림들은 그 뒤를 받쳐 주고 학림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발을 맞춘다. 이 명령은 구왕이 나타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계곡 위든 아래든 중요한 것은 이곳에 모두 모여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경이란 자를 미끼로 쓸 줄은 몰랐지만, 결과적으로는 용연이 의도한 상황은 만들어졌다.
군림단 스물아홉 명이 모여 있다는 의미.
그것도 군림단주가 중심에 서서 지휘하는 군림단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구왕은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