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묵자성 맹주가 움직였습니다. 구대문파 장로들에게 보낸 서찰에 직인 대신 ‘철혈문주’라고 적어 보냈고, 얼마 전에는 사혈명 사패천 중 서패주 파륵과 만났다고 합니다.]
꿈틀.
호원은 서찰을 읽다가 인상을 썼다.
묵자성과 사혈명.
철혈사자맹으로 묶여 있을 때는 교류 자체가 불가능하게 만들었지만, 이제는 특별한 이유 없이 나설 명분이 없었다.
안 그래도 자신을 제외하고 강호삼대세력끼리 교류의 장을 넓힐까봐 신경 쓰였는데 그걸 묵자성이 시작할 줄이야.
톡. 톡. 톡.
임시로 만들어 온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힐끗.
여전히 메아리를 통해 함성이 들려왔다.
이 정도 싸움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소옥황봉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전해 주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쯧.”
저절로 혀가 차졌다.
싸움을 못 봐서가 아니라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때문이다.
이대로 군림단주와 투신의 싸움 결과를 기다릴지, 철혈문과 사혈명의 교류가 더 이어지기 전에 싹을 자를지.
전자의 경우엔 구왕을 노릴 수 있게 된다.
그 때문에 구신군과 귀암로의 최정예를 처리하기 위해 일백호천위 중 열을 준비해 둔 상태였다.
구왕이야 자신이 맡으면 되고 나머지 자잘한 숫자들은 연락만 기다리는 오대세가의 숫자들이 막으면 되는 것이다.
‘묵자성, 당신은 참으로 운이 없는 사람이구려. 감출 때는 모른 척하면 되니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드러냈을 때 아주 귀찮아질 소지가 다분한 사람이 당신이야. 항상 그래 왔지. 그래서…….’
호원은 결정을 내렸는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궁주님?”
“찬진아,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은 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단다. 그런데 어차피 하나를 결정해야 해. 그럴 때는 다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쪽을 선택해야 한다. 오성위는 다가와 명을 받아라.”
‘오, 오성위?’
호찬진은 당황한 표정으로 다른 오성위들이 다가올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너희들은 나와 같이 철혈사자맹으로 돌아간다. 이곳으로 부른 모든 인원들에게 돌아가서 내 명령을 기다리라고 전해라.”
호원의 명령이 떨어지자 호찬진을 제외한 네 명의 오성위가 빠르게 흩어졌다.
“호 성위, 움직여야지?”
“예? 아, 예.”
역시나 이번에도 호찬진이 아니라 ‘호 성위’였다.
“흐음. 오성위와 호찬진. 두 개의 역할이 아직도 버거우냐?”
“아, 아닙니다!”
“……가서, 일백호천위 열 명을 데려오너라.”
호원은 서둘러 달려가는 호찬진을 보며 낮게 숨을 뱉었다.
애초에 선택을 잘못한 자신의 책임이다.
오성위로서의 호찬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재목이니, 더 욕심을 내선 안 되는 것이다.
‘묵자성은 구대문파의 장로들에게 신임을 잃었다. 새로운 젊은 피로 철혈문을 구성하겠다는 발상은 좋지만, 누가 환영을 할까?’
피식.
호원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묵자성 하나 죽는다고 그들의 기득권이 무너질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공고해진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사혈명 같은 곳과 손을 잡아? 감히!”
호원의 입과 얼굴 근육은 분노하면서 눈은 웃고 있었다.
***
호원이 떠난 뒤 일각이 지났다.
호리호리한 인영들이 사방에서 소리 없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열두 명이 됐다.
서로를 확인한 뒤에도 열두 명은 소리를 내지 않고 주위를 살피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신한 뒤에야 다시 움직였다.
탁. 탁.
절벽 쪽으로 가 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두 명이 허공 위로 솟구쳐 올랐다.
“사부님, 들으셨어요?”
먼저 내려선 인영이 반대편을 돌아봤다.
머리칼을 위로 올려 천으로 감싸고 몸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정도로 붙은 옷을 입고 있는 인이예였다.
“이예야, 그렇게 입으니까 정말 예쁘다.”
추영영은 인이예와 같은 복장을 한 채 허리에 손을 올리며 감탄했다.
“사부님, 급해요.”
“찬진? 그 녀석의 이해를 돕느라 자세히도 얘기하더구나. 나 듣다가 웃을 뻔했잖아? 천하의 사자궁주가 뭘 할지 일일이 설명하고 움직이다니. 까르르.”
추영영은 다시 생각해도 웃긴다는 듯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꾸끼!”
인이예는 추영영에게서 눈을 떼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커다란 매가 나타나더니 인이예의 팔뚝으로 떨어졌다.
“이예야,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싸우는 사람에게 쪽지를 전하는 건 무리지. 꾸끼 죽일래?”
추영영은 십이월 중 일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일월은 곧장 준비하고 있던 도구를 추영영에게 건넸다.
먹물을 머금은 얇은 붓과 백지 한 장이었다.
슥슥.
[회주님, 호원 궁주가 오성위에게 하는 말 중 기억나는 내용만 서둘러 전해요.
군림단주와 투신의 싸움 결과를 보려고 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철혈사자맹으로 회맹한다며 떠나더군요.
이 상황을 만들어 놓고 돌아가야 할 정도의 큰일이 뭘까요?
군림단주가 이길 거라 생각하지만 투신이 이겨도 축하하러 갈게요.
―태루주.]
“사부님, 이게 뭐예요?”
인이예는 추영영이 쓴 마지막 문장을 보고 붓을 뺏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미 준비하고 있었는지 추영영은 붓을 아무 데나 던져 버리고는 종이를 일월에게 건넸다.
“일월, 이리 줘. 다시 써야겠어.”
인이예가 일월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서둘러! 촌각을 다투는 일인 걸 몰…… 헙! 사부님, 놓으세요!”
덥석.
추영영이 인이예를 뒤에서 팔로 감싸며 일월에게 서둘라는 눈짓을 했다.
“루주가 너를 십이월에서 자르면 내가 책임지마. 빨리 안 가?”
추영영은 머뭇거리는 일월을 향해 인상을 썼다.
그러자 일월도 더는 어쩌지 못하고 몸을 돌려세웠다.
“……사부님, 놔주세요.”
인이예는 일월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낮게 숨을 뱉었다.
그러나 추영영의 손은 더욱 세게 조여들었다.
“하나, 둘, 셋……. 됐다.”
추영영은 인이예가 일월을 쫓아가지 못할 시간을 번 후 손을 놓았다.
“좀! 예?”
인이예는 몸을 흔들며 원망하는 눈으로 추영영을 돌아봤다.
“뭐?”
“근사하게 써 줄 수도 있었잖아요?”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추영영은 그것이 최선이라는 듯 팔짱을 끼고 옆으로 돌아섰다.
―……아아아아!
인이예와 추영영의 고개가 동시에 함성이 들려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끝났나?”
인이예는 손을 자신의 가슴에 댔다.
“가라, 루주. 군림단원들이 아무리 강해도 몇 만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다. 다치지 말라고 은린갑까지 보낸 성의가 있으니 은영루주의 백색살인을 제대로 보여…….”
추영영이 진지한 표정을 하고 소옥황봉 쪽을 손으로 가리킬 때였다.
덥석.
“시간 없다면서요?”
인이예가 추영영과 팔짱을 낀 채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으아!”
“어머, 저기 돌이 튀어나와 있었네?”
척.
인이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추영영은 허리를 접으며 아래를 쳐다봤다.
돌 따위는 없었다.
“어휴, 제자가 아니라 요물이야, 요물.”
추영영이 미미하게 고개를 흔드는 순간, 인이예가 팔목에 차고 있던 은잠사를 풀어 벽에 박으며 속도를 줄였다.
탁. 탁. 탁.
인이예와 추영영의 신형이 표홀하게 움직이며 아름다운 동작으로 봉우리를 내려갔다.
***
쩡!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무수한 돌 조각들이 일대로 퍼졌다.
콰다다다다―.
높이가 있어선지 힘이 실린 돌조각이라서 그런지 땅과 부딪쳐도 굉음이 터졌고, 막는 사람들은 힘겨워했다.
―뭐, 뭐냐, 돌멩이 하나에 압사될 것 같은 이 힘은?
―어흑! 다들 막지 말고 피해요!
소옥황봉 주위의 네 봉우리에 있던 무인들은 일반인들 중 올라온 사람들을 보호하며 사방에 대고 경고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던 묵 노야는 양손을 움켜쥐며 소옥황봉 정상을 쳐다봤다.
그때, 누군가 묵 노야의 어깨를 건드리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음? 아!”
묵 노야는 어깨부터 빙그르 한 바퀴 돌다 발밑에 떨어진 서찰을 발견했다.
추영영으로부터 온 서찰이었다.
“호원이 철혈사자맹으로 돌아갔다고?”
묵 노야의 눈이 반짝였다.
추영영이 던진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봐야 했다.
소옥황봉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림단주와 투신의 대결보다 중요한 일이 뭐지?
대결의 승자와 구왕이 싸울 때 나타나 모두 처리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남겨 둔 인원으로는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철혈문과는 이미 갈라선 사이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여기서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정보가 더 필요했다.
슥.
묵 노야는 다시 소옥황봉으로 고개를 들었다.
“일단 호원과 관련된 계획은 전부 멈춘다. 추측만으로 투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다.”
계획대로 움직이면 된다.
오히려 가장 위험한 자가 빠졌으니 다행으로 여기고 기뻐해야 한다.
까득.
추영영의 서찰이 구겨질 정도로 세게 쥔 후 품에 넣었다. 그러고는 턱이 불룩해지도록 입을 악다물며 탁자에 올려놓은 붉은색 깃발을 쥐었다.
군중들이 소옥황봉 가까이 몰려들 때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다 깃발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
퍽!
“끄악!”
소옥황봉에서 떨어진 돌을 피하지 못한 무인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쉬악.
더 지켜보지 못하고 조균이 떨어지는 낙석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스스―.
낙석들이 먼지가 되어 조균의 주위로 사라졌다.
‘한 자리에서 싸우는 건가? 투신의 그 강력한 갑옷을 군림단주는 무슨 수법으로 상대하는 거지?’
조균은 둘의 대결을 직접 보고 싶었다.
한 번씩 천둥 같은 굉음이 터질 때마다 여전히 낙석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힐끗.
소옥황봉 정상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도 다른 높은 봉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의미가 없었다.
고민을 이어 가려 할 때였다.
“어? 저, 저기! 두 사람이 내려오는 거 아냐?”
누군가의 외침이 터졌다.
네 봉우리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옥황봉으로 집중됐다.
“아!”
조균도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한 명이 봉우리를 벗어나 허공으로 튕겨졌고,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백의의 사내가 무형의 거대한 도를 수직으로 휘둘렀다.
쩡!
‘큭!’
조균은 다급히 귀를 막았다.
그러나 이어진 고통으로 하마터면 손을 뗄 뻔했다.
고막을 파고드는 소리와 전신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동시에 전해진 까닭이다.
―끄아아악!
―나, 나 좀 살려……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나, 조균은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