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용연은 담영호와 현승이 빠진 여섯 명의 선림들과 태산 정상에 올라와 있었다.
아래쪽에 흐르는 운해로 만들어진 하얀 바다는 너무도 황홀해 손을 뻗어 만져 보고 싶을 정도였다.
주위의 어떤 봉우리도 군림대전보다 높아 보였고, 올려다보는 하늘도 넓게 느껴졌다.
이곳에서,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곳에서 군림단주와 투신의 대결 결과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까지 선림들과 상의를 끝냈다.
“단주님, 이곳에 올라왔을 때는 장소만 군림대전에서 태산으로 옮겨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주님의 말씀을 모두 듣고 나니, 제가 군림단의 일원이란 자부심 역시 이곳만큼이나 높아진 것 같습니다.”
소황선은 허허롭지만 담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나머지 다섯 선림들이 일제히 소황선을 돌아봤다.
언제부터인가 속이 울렁이는 것 같았는데 그 정체를 소황선 덕분에 깨달은 것이다.
“군림대전에서는 사천성의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태산에서는 땅을 내려다보고 있네요.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곳이라서 그렇겠죠?”
용연은 담담하게 말을 하며 돌아섰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곳.
선림들은 용연이 왜 자신들을 이곳으로 불렀는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후오오옥!
닿으면 베일 것 같은 칼바람들이 달려들었으나 용연과 여섯 선림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용연은 선언한 것이다.
군림단은 앞으로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곳에 서게 될 것이라고.
용연의 포부 앞에 여섯 선림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오감을 통해 이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 상태로 일각쯤 지나자 담영호가 올라왔다.
“단주님, 진 대교에게 학림들과 교림들을 말씀하신 위치에 배치시키라고 전했습니다.”
슥.
용연은 담영호의 보고가 끝나자마자 돌아섰다.
“모두 현 선림이 지시할 때까지 자리를 지키세요.”
“예.”
일곱 선림이 동시에 머리를 숙여 예를 취하자, 용연은 몸을날려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정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행렬이 구름 아래로 내려가자 모두 눈에 들어왔다.
용연은 현승에게 소옥황봉(小玉皇峰)으로 가 있으라고 지시해 두었다.
크기만 작을 뿐, 소옥황봉 좌우를 네 개의 봉우리가 감싸고 있는 것이 옥황봉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중턱을 지날 때쯤 주위 네 곳에서 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투신이다!
―무슨 소리! 투신께선 벌써 올라가셨다!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했는지조차 중요해진 모양이다.
용연은 가면 아래 입을 슬쩍 비틀고는 좀 더 속도를 내 직각에 가까운 경사를 평지처럼 올라갔다.
―와아아아아!
사람들의 함성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런 용연을 가는 눈을 한 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
‘뭐야, 혼자 올라가? 군림단주는 벌써 올라가 있는 건가? 하필 장소를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봉우리로 결정해서 난감하게 만드네. 다른 자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기는 해야 하는데…….’
정체를 감추기 위해 입가를 가린 조균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주위의 네 봉우리를 돌아봤다.
―사자궁이 단독으로 일을 벌이고 있다. 구대문파는 그 일과 무관하다는 것을 강호에 공표하여 사자궁과의 연맹을 끊을 생각이다. 나는 군림단주가 이기든 투신이 이기든 아무 관심이 없다. 오직 하나. 호원 궁주가 그 자리에 나타나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조균은 묵자성의 방법이 옳다고 생각했다.
철혈사자맹.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은 항상 구대문파연합인 철혈문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가르쳤다.
조균 역시 그렇게 믿었으나, 어릴 때부터 존경하던 사숙이 맹에서 돌아온 뒤 해 준 말 때문에 실상을 알게 됐다.
오대세가연합의 위세가 이미 오래전에 구대문파연합를 앞섰고 호원이란 사람이 궁주로 있는 한 결코 깨지지 않을 것임을 알려 준 것이다.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묵자성과 만났다.
적당히 살피다 돌아가거나 하고 싶지 않았다.
***
꿈틀.
“이게 무슨.”
사혈명 사패천 중 서패주 파륵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수족 열 명만 데리고 태산의 봉우리 한 곳에 올랐다.
군림단주와 투신의 대결 때문에 직접 나선 것은 아니었다.
―……(중략)……구왕 다음은 누가 되겠소? 나? 아니면 혈주? 어쩌면 모두일지도. 나는 이번 싸움이 끝나고……(후략)…….
묵자성은 호원의 야망을 강호에 공표한다고 했다.
사혈명 혈주인 사황 경오로서는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으니 묵자성을 만난 김에 확인까지 하라고 파륵에게 명령한 것이다.
파륵은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호원이 언제 나타날지, 나타나기는 할지 반신반의하며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여유를 잃게 됐다.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행렬.
저 정도 인파가 최근 들어 유명세를 얻은 두 고수의 싸움을 보기 위해 몰려든다?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파륵은 의문이 들었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흩어져서 사람들이 왜 군림단주와 투신의 싸움을 보려고 하는지 알아봐. 서둘러.”
파륵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스물네 명으로 구성된 유성인부(流星刃斧) 중 열 명이 움직였다.
군림단주와 투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여겼건만 상황을 보니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때였다.
―투신이 소옥황봉을 오르고 있다!
누군가의 외침이 메아리로 퍼져 일대를 떠돌았다.
‘음?’
순간적으로 파륵의 몸이 굳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다시 한번 주위를 빙 둘러봤다.
이 정도의 군중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거기에 스스로 강호의 주인을 자처할 만한 사람이라면,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지 않을까?
‘구왕?’
파륵은 구왕을 찾기라도 하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위를 샅샅이 훑었다.
***
푸드덕.
전서구가 날아와 회색 무복을 입은 사내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사내는 전서구 다리에 묶인 쪽지를 확인도 하지 않고 곧장 임시천막으로 달려갔다.
안에는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한쪽 발을 의자에 올리고 비스듬히 자세를 잡은 사내가 있었다.
“쪽지가 도착했습니다.”
사내는 한쪽 무릎을 꿇고 비장한 어조로 보고했다.
“구경꾼들은 다 모였느냐?”
산발 머리 사내는 명령을 바라는 자에게 오히려 되물었다.
쪽지를 손에 든 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켰다.
“앞으로 모든 보고는 네가 받고, 내가 이곳을 나가야 할 때만 들어와.”
“그…….”
“꺼져.”
“……예.”
쪽지를 든 채 사내는 밖으로 나와 혼이 반쯤 나간 상태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듣던 구왕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구왕께선 항상 구신군을 대동한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혼자이신 거지?’
힐끗.
사내는 임시 천막을 돌아봤다.
미심쩍지만 감히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
소옥황봉 정상은 바위들이 왕관처럼 삐죽하게 둘러져 있었다.
용연이 정상에 발을 올려놓자 가장 높은 바위 아래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사내가 일어났다.
머리칼도 검고 얼굴에는 주름살 하나 보이지 않는 젊어진 현승이었다.
용연은 멈춰 선 채 주위를 둘러봤다.
멀리 높은 봉우리들이 보였으나 이곳을 자세히 볼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적당하군요.”
“올라오는 자들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렇게 하면 멈추겠죠.”
용연의 손이 자신보다 몇 배는 큰 바위에 닿았다.
쩍!
순식간에 균열이 바위 전체로 퍼졌다.
투카학!
바위 파편이 무너지듯 봉우리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본 현승 역시 옆의 거대한 바위에 손을 댔다.
쩌저적!
와르르―.
부서진 바위 조각이 봉우리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잠시 그 상태로 있자 밑에서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고오―.
용연의 주위에서 먼저 와류가 일어나자, 현승 역시 미미한 웃음을 지으며 맞섰다.
틱.
돌멩이 하나가 두 와류 사이에 끼었다가 튕겨 나갔다.
순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움직임이 동시에 일어났다.
***
―……아아아.
멀리서 시작된 함성이 뒤늦게 도착했다.
“시작했군. 군림단주는 역시 영리해. 소옥황봉이라니.”
옥황봉 근처 봉우리 중 한 곳에 자리를 잡은 호원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용연이 대결 장소를 태산이라고 알렸을 때 당연히 옥황봉을 고를 줄 알았으나, 보기 좋게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궁주님,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호찬진이 재빨리 나섰다.
“됐다. 내가 이곳까지 왔다는 것을 굳이 알려서 좋을 게 뭐라고. 결과나 기다리자꾸나. 아, 찬진아, 군림단주가 왜 소옥황봉을 택했는지 짐작이 되느냐?”
“……모르겠습니다. 소옥황봉처럼 낮은 봉우리라면 굳이 태산이 아니라도 많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 태산이 아니라도 저 정도 봉우리는 흔하지.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려면 그만한 곳이 없기도 하지.”
‘고작 그런 이유로?’
“어떻게 싸웠는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뜨리려는 투신의 계획이었겠지. 군림단주는 거절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 받아들인 것이고.”
호원은 호찬진의 표정을 보고 알아듣도록 한 번 더 풀어서 설명을 해 주었다.
“아!”
그제야 호찬진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상대의 수를 읽는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이 상대에게 있을 때, 상대로 하여금 유리한 선택을 했다고 여기도록 주변을 통해 유도할 수도 있겠지.”
‘궁주님께선 하나만 보고도 몇 수 앞을 내다보시는데 나는 언제 그럴 수 있을는지.’
호찬진은 탄성을 터트린 것이 무색하게 주눅 든 표정을 지었다.
“찬진아, 내가 보는 것을 못 본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럴 수가 없지. 나는 평생 사람들의 머릿속을 읽으며 살아왔고, 너는 그런 나를 보좌하며 살아왔으니. 알아 두라는 거다. 언제고 그런 눈을 갖게 되면 좋지만, 아니라고 해도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을 찾으면 되잖느냐?”
호원은 웃으며 진심으로 호찬진을 격려했다.
그동안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호찬진을 곁에 둔 이유는 마지막 말에 모두 담겨 있었다.
자꾸 들어야 어떤 사람을 찾아내야 하는지를 알게 될 테니까.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많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자신과 호찬진 같은 관계에서는 끝없는 인내와 끝없는 신뢰를 전해야 한다. 그래야 완전한 충성심을 끌어 낼 있기 때문이다.
“찬진아, 싸움이 끝나 가는 조짐이 보이면 알려다오.”
호원이 막 말을 마쳤을 때였다.
오성위 중 한 명인 남궁찬이 무언가를 들고 다가왔다.
“궁주님, 이걸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